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및 내생각
본문 바로가기
내생각 및 묵상 (필로테아)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및 내생각

by 필로테아 2024. 2. 23.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제1독서

<어서 그를 치자.>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8,18-20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18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19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20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7-28

17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18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1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장면을 그립니다. 바로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이 예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고집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리석음은 당신에게 닥칠 잔인하고 참혹할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더 무겁고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들은 복음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자기 아들들이 그리스도의 옆자리에 앉게 하여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들이 마셔야 할 주님의 잔이 어떤 잔인지 모릅니다. 그들의 담대함은 신앙이 아닌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옆자리를 차지하려는 행동에 다른 제자들은 불쾌해합니다.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높은 사람은 통치자처럼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이가 아니라 더 사랑하고 더 낮은 곳에서 섬기는 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아직까지 그들이 바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한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세속적 성공입니다. 곧 제자들은 종교적 영광의 탈을 쓴 세속적 출세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어떤 잔을 마시는 것인지, 교회라는 하느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지 못합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존재한다고, 교회 안에서 세속적 지혜와 세속적 문화를 적용하려고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처럼 하느님께 청하는 것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는지 알면서도 마치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합니다. 주님께서 아파하고 슬퍼하시는 순간에도 자기밖에 모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무의미한 논쟁을 하며 힘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우리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리고, 주님의 뜻에 눈과 귀를 열 수 있는 은총을 청하여야 하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

 

  나라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좀처럼 길이, 빛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는 지도자들도 참 보기 힘듭니다. 국내 사정이나 정치사정은 더욱 그러합니다. 극한 대결과 분열상태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또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인류는, 역사는 진보하는가? 때로는 회의하기도 합니다. 저절로 묻게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입니다. 강론 제목이자 답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으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이때쯤 맞이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자화상>이란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라 했습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바람을 산으로 바꿔 “요셉수도원에서 36년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암산”이라 주저 없이 고백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지금도 여전히 되뇌는 고백입니다. 산은 한결같은 정주의 상징입니다. 제가 쓴 무수한 시중 불암산이 대상인 경우도 참 많습니다. 불암산을 볼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시편 121장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 121,1-2)

  여기서 오랫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힘들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말 그대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대로 살아온 느낌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18년 전 2006년 봄철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여기 살면서 답답하고 막막한 적은 있었어도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놀라운 책을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의 어른과 30대 초반의 손자뻘 후배가 나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라는 대화집입니다. 손자뻘 되는 청년의 서문 일부를 나눕니다.

 

    “할아버지뻘 되는 정성헌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저는 끝없는 낙관에 놀랍니다.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이 남았다’면서 저를 다그치시죠. 따르고 싶은 어른이 생기니 앞길이 보입니다. 저는 고작 6년 차인데 선생님은 지구 생명 살리기 운동만 60년 하셨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먼저 태어나신 선생님에게서 저의 미래를 봅니다.

반응형

 

절망이 대죄입니다.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지론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두 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을 줍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레미야의 절박하고 간절한, 한결같은 기도가 답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기도는 하느님 향한 영혼에 창문을 내는 것입니다. 햇빛같은 은총이, 시원하고 향긋한 바람같은 성령이 들어오지 않는 창문 없는 방같은 영혼이라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오래전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영혼의 방에 하느님 향한 창을 내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분은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말마디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은 부활의 희망에로 활짝 열린 문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 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의 공동체,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만나러 매일 외딴곳을 찾았던 듯싶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이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들어설 때 예수님 자리 양쪽에 있게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모두가 철부지들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응이 극히 침착합니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좌절하거나 흥분함이 없이 부인과 문답을 나누셨고, 아마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바로 하느님 향한 신뢰와 희망의 반영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도 제자공동체의 유일한 대안이자 처방은 “종과 섬김의 영성”뿐임을 천명하십니다.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군림과 세도는 일체 배제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도 같으니 섬김의 종입니다. 이에 영감 받은 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는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영성이 있다면 섬김과 종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학교, 병원, 식당처럼, 주님의 교회나 수도원도 예외 없이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저는 서비스업의 3대 요건에 늘 유의하곤 합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며 좋아야 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서비스업의 삼박자를 갖출 때 손님들도 끊임없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능하면 서비스업에 실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 우리 요셉수도원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갖췄는가 점검해 보곤 합니다. 일례로 의사가 사람만 좋고 실력이 없어 무능하다면 정말 쓸모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건물이 아닌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무장하여 당신의 서비스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글)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3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학창 시절에 제 가슴을 뛰게 했던 노래였습니다. 감미로운 멜로디로 시작하다가 중간으로 넘어가면서 강력한 사운드를 내는 멋진 노래입니다. 특히 이 노래를 받치고 있는 기타 연주 소리는 십 대의 저를 푹 빠지게 했습니다. 그때 바라보던 오십 대는 젊은이들의 문화에는 전혀 관심 없고, 술 한 잔 마신 뒤에 젓가락을 두드리며 트로트를 부르는 것밖에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오십 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 대에서 바라본 오십 대의 모습은 잘못 본 것임을 깨닫습니다.

   오십 대도 열정이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요즘 노래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또 오십 대도 아이돌 노래를 들으며 가슴 설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냥 단정 지었습니다. 오십 대는 우리 세대와 너무 다르다고 말입니다.

    지금을 사는 청소년도 저의 청소년 시절과 같은 시각일 것입니다.

‘꼰대’라며 기성세대를 꾸짖으며 ‘우리와 다르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꼬마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면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어른들에게 사탕을 드리면 어떨까요? 더 좋아하십니다. 어른들도 노는 것 좋아하고, 뜨거운 열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대와 차이, 나이의 차이, 사상의 차이 등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다를 것 없다는 시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함께하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말입니다.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청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마 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을 다른 제자와 다르게 본 것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권력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다른 열 제자들의 반응은 불쾌함이었습니다. 이 제자들도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권력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누구나 가고 싶은 나라, 누구나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통치자, 고관들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되고 오로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취해야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다른 점’만을 따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글)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4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어제 복음의 끝부분과 오늘 복음의 끝부분은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어제의 말씀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주님의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자들이 자리다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죽으러 들어가시는데 제자들은 권력을 잡으러 들어가는 줄 알고 자리다툼이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는 기득권인 데 비해

자기들은 입성하여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사람인 셈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수난 예고를 하셨음에도 수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3년이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야말로 구악을 대신하는 새로운 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높은 사람,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서번트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요.

  진정한 리더는 종처럼 조직원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일까요? 첫째와 높은 사람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일까요?

쉽게 얘기해서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는 것을 말함일까요?

사실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도 섬기는 자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자들도 그러하면 그 섬김을 받는 백성이 행복하고 자신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높은 자리와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런 자리에 오르는 비결로서 서번트리더십과 첫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닐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일 높은 권좌에 오르려는 사람들은 “너희 가운데에서” 곧 “우리 가운데에서”라고 생각지 않고 “그들 위에서”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백성들 가운데 있지 않고 늘 위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무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무리 위에 홀로 높은 자라고 생각할 것이며, 백성을 우리라고 생각지 않고 늘 그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을 대영광송과 연결하여 생각해 봅시다.

대영광송은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시라는 말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고, 높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아무도 홀로 거룩하거나 높지 않으며, 아버지나 스승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할 형제들일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은 위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여럿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이때 높은 사람의 의미도 높은 곳에서 멀리 보고 무리 전체를 보는 사람입니다.

‘너희 가운데 첫째인 사람’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무리 가운데에서 첫 번째로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앞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물길로 치면 맨 앞에서 물살을 갈라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진정 높은 사람은 무리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높이 나는 갈매기처럼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이어야 하고,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는 사람이 아니라 시야가 넓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첫째인 사람도 무리를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맨 앞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힘든 일을 감당하는 수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글)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5

  살신성인하거나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을 넘어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거룩한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사람이 본래 남을 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증거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일들을 아셨다. 성경에서처럼 마치 미래를 다녀오기라도 한 것 같이 상세하게 알지는 못하셨어도 배척당하고 사형판결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실 수 있었다. 권력자들과 자주 충돌했고, 안식일 법을 대놓고 어겼고, 많은 이들이 당신을 따라다녔다. 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지키려는 권력자들, 그들이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건 조금만 생각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꿋꿋하게 그 길을 가셨다. 당신의 뜻과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고집스럽게 그리로 들어가셨다. 그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고, 다른 길은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다른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신 것은 말씀하신 대로 행동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삶이 곧 그분의 말씀이었다. 내 마음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를 지지하고 도와주고 헌신한 이들이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려고(1 코린 9,22)’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 곧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남을 위함이다. 그래서 바보처럼 자신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하느님을 본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봉사하는 기회를 찾고, 섬기는 권한을 구한다. 성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의 자리에서 그런 고귀하고 거룩한 것들을 추구한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과 언제나 동행하신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봉사와 섬김을 추구하고, 낮은 자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을 아무도 모르기를 바란다. 그래야 숨을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주시는 상을 받기 때문이다.

 

예수님,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가족을 보호하시고 위로하시어 저희가 이 세상에서 언제나 선행을 하고 마침내 천상 선물을 풍성히 받게 하소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당신의 망토로 자녀들을 유혹에서 보호해 주셔서 지치거나 낙담하지 않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싶은 거룩한 욕망을 일으켜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묵상)

반응형

 

 

 

2024년 2월 28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수요일 필로테아의 복음묵상 (내 생각)

현대사회는 데이터와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보급으로 인공지능 개발과 같이 마치 하느님의 일처럼 보이는 부분마저 인간이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로봇,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생명공학 등의 기술 발전에 많은 투자를 하는 것은 꼭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강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아닌지 싶습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구조, 학습환경, 노동시장, 소비구조 속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산다는 것과 특히 '섬기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현재의 삶 이른바, '현생'을 살아가는 경우가 반드시 대단한 사건은 아니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소소한 일상 에피소드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빈도와 동기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섬김'은 분명 가난하고 헐벗고 정신적·경제적·신체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하지만 자칫하면 '섬기는 사람'에 대한 피상적인 모습만(-마더테레사 수녀님이나 이태석 신부님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장면같은-) 떠올릴 뿐, 나의 실질적인 삶 한가운데서 동력을 일으키고 실천에 탄력을 가할 수 있는 촉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삶이 '섬기는 삶'인지 생각해 보니 너무나도 다양한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 묵상을 한다는 핑계로 사람들이 인공지능 개발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근 사회에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인공 지능의 발전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초월적인 어떤 것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로봇에게 머신러닝을 통해 학습시켜 인간의 마음과 관계능력, 행동까지 최대한 사람과 유사하게 만들려고 하는 일은 일종의 영적 세계에 대한 요청이자 호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반드시 사제나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세속의 평범한 일반인이 섬기는 삶을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세상에서 인공 지능을 발전시키기 위한 인간 심리의 기저에는 어떠한 목적이 있습니다.  인공 지능의 개발에 뛰어들면서 이와 같은 큰 혁신과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을 닮은 또 다른 로봇을 사람과 가장 유사하게 만들어 심지어 신념을 담은 인격까지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나를 조금은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영적 존재와 유사한 것'을 찾고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 새로운 존재는 나에게 경제적 자유를 누리도록 해줄 것 같고, 지금보다는 조금 더 좋은 혜택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개발을 앞당기고 예산을 투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처럼 행동할 수 있는 캔(can)을 연구하고 개발하면 나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주거나 이 깡통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를 보호해 줄 것 같아 인공지능을 더 연구하고 개발하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막연하게 찾고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호소와 갈망이 인공지능 개발로 발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반응형

마태오 20장 26~27절너희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 머물면서, 만약 하느님께서 2024년 이 급변하는 시점에 이 말씀을 필히 이루고 성취할 것이라고 하신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섬긴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요?

'섬김'이 내 삶의 영역으로 들어와 실현된다고 가정하면, 지위와 환경적 자원을 많이 가진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의 영향력이나 지위, 지식, 권력, 그 밖에 환경적인 요인을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섬김'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활용될 자원, 영향력, 지위나 권력, 환경자원은 더 낮은 지위와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특히 눈에 보이는 특정한 '섬기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정신적, 경제적 소유가 상대적으로 적고 힘이 없어 속수무책인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 안에서 작은 보탬이라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막대한 부와 자원을 가진 사람이 '섬김'을 실현할 수 있는 법 (내 생각)

 

1. 부에서 기인한 특권 문화에 대한 행동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물질적 부와 지위를 우선시하는 불우하고 어려운 사회적 규범에 대해 공감과 연민, 연대를 더 강조하면서 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교리에서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합니다. 물질 앞에서의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으로서 부나 지위를 소유하는 것이 특권이라는 믿음이 소셜네트워크(SNS)와 미디어에 널리 퍼져 있을 때 연대과 연민,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섬기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을 사로잡는 부와 명예를 우월하게 여기는 문화는 누구도 정해놓지 않은 기준에 몰두하게 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부추깁니다. 이것은 스스로에게 얽매이는 삶, 자신의 정체성을 오히려 상실하는 삶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하느님께서 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그렇게 살기보다 당신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참된 '나'로 살아가는 것을 더 바라시지 않을까요? 부자와 고위층이 그러한 것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은 빵을 나누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곤란을 나의 것으로 공감하는 선한 행동일 것입니다. 이러한 연대와 공감, 연민의 중요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큰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에 섬기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2. 인정과 감사, 칭찬하기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거나 저평가되는 사람들의 기여와 노력이 수반될 때 충분한 감사를 표하고 인정하는 것은 일종의 섬기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낮은 위치에 있다는 것에는 부족한 정보력과 기회, 뒷받침되지 못하는 배경, 경쟁력이 없는 상태, 현저히 다른 인생의 출발선, 지역 격차, 사회 진출에 장기적인 어려움 등 부당한 대우나 차별에 취약한 사람을 포함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사기와 동기를 높이고 타인의 삶에 좋은 에너지 제공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좋음, 선한 것 =goodness)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그 자체로 하느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이 '좋음'을 전해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복음의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정적인 부를 소유한 리더는 포상, 칭찬, 격려를 포함하여 공식적인 인정을 통해 개인을 격려하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도록 인정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업무 환경을 조성하고 각 고유한 사람들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탁월함과 우수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도록 크나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 CEO는 회의에서 직원의 뛰어난 성과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맞는 대우로 함께 적절한 범위 내에서 급여 인상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글로벌 100대 브랜드 중 브랜드가치 623억 달러로 세계 5위를 오르며 세계 경제에서 우뚝 선 삼성전자의 이건희 회장은 "좋은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작은 일에도 항상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감사의 표현과 칭찬을 많이 하는 것은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 코린 6,16)"라는 말씀에서 하느님의 성전이기도 한 사람들의 공헌과 노고에 대한 찬미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작은 수고와 헌신 안에 머무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영광을 드리기 위해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삶을 통한 고백일 것입니다. 

3. 하느님의 인내를 닮은 멘토링과 지도

고위직에 위치하고 있는 임원이나 관리자, 그 외의 전문가들은 더 낮은 직위에 있는 개인들에게 사회생활에서의 보조자로서 멘토링과 지도를 제공함으로써 '섬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낮은 직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포함합니다. 또한, 경력을 발전시켜 커리어를 성장시킬 수 있는 조언을 제공하고, 자신의 시행착오 과정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전문적인 환경을 탐색하는 데 안내자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잘하는 이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말며, 실수를 하는 개인에는 관대함으로 응하여 실수의 원인을 함께 분석하는 것은 훌륭한 격려입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루카 17,4)"하신 말씀의 실천은 팀원이 기를 꺾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게 하고 일종의 연대가 될 것입니다.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하위 직원들에게 멘토링을 제공하여 그들이 실무에 쓰이는 업무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경력을 발전시키는 데 지속적인 도움을 주면서 응원하는 멘토로서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4. 기회에의 손쉬운 접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채용이나 인턴십 혹은 프로젝트와 같은 중요한 기회에 접근할 수 있는 역량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소유한 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나눔으로써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기회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줄 수 있고, 그들이 경험을 쌓고 경력에서 발전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글로벌 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사업가는 열악한 환경으로 정보와 기회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경영 능력과 탁월한 리더십을 전수하면서 리더십 개발의 기회를 제공하면서 섬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5. 지속 가능하고 윤리적인 소비 장려(하느님 창조질서 보존)

일반적으로 세상의 시장경제 속 기업과 개인은 최대의 이익추구를 목표로 과도한 소비를 장려하는 흐름을 보입니다. 특히 부유한 기업이나 개인, 특히 SNS(소셜미디어)와 온라인 플랫폼으로 소비를 장려하기 위는 것을 주된 목표로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재정적, 정신적으로 열악한 사람들을 기억하기보다는 은연중에 상대적 박탈감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소비를 촉진하기보다 조금은 더 지속가능하고 윤리적인 소비 관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시장경제와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섬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방법으로 자원을 조달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것과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하며 사회적 책임을 우선시하는 제품이나 브랜드를 성장시키고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팔로워들이 더 신중하게 구매 결정을 내리도록 독려하는 것도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실현하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기부 등 재정적으로 지원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보편적 다수에게 재정을 지원하기 위한 건설적인 지원 프로그램이나 계획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장학금 기부나 지역 사회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거나 경제적 역량을 증진시키는 단체를 지원하는 것뿐 아니라 보편적 다수를 아우를 수 있는 인도주의 철학을 가진 건실한 기업을 성장시킴으로써 실현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밥상 물가를 고민하는 서민생활의 안정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기업이 보편적 다수와 공감하고 연대하는 기업일 수 있습니다. 또한, 경정적 어려움으로 교재 구입을 꺼리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배경의 학생들이 학업에 필요한 교재 구입을 지원하거나 장학금을 마련하는 일 등이 있습니다.

7. 인맥 활용을 통한 소셜 네트워킹 기회 확대

 높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과 환경을 경함 한 적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높은 가치를 가져다줄 광범위한 연결 소위 인맥과 사회적 네트워크망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적 네트워킹의 기회, 영향력 있는 지인의 소개, 또는 업계 행사를 진행할 때 이러한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으로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네트워크관계망이 협소한 개인들이 업계의 전문적인 인맥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기회에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위 관리자는 업계 리더들을 만나는 자리에 후배 직원을 초대하거나 다양한 만남의 장을 열어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8. 영향력 있는 사람의 솔선수범하는 모습

 돈이 많은 기업들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고, 장기간 동안 지속적인 봉사나 기부와 같은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다소 포퓰리즘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꾸준한 활동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이 같은 일을 하도록 고무시킬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이를 수행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이 재정적, 정신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동참하도록 응원하는 일에 솔선수범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

9. 모든 마케팅 메시지에 '섬김' 접목하기

 기업과 개인은 소비와 물질주의 촉진에만 궁극적인 목적과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공감과 사회적 책임, 연대라는 주제를 마케팅 시 접목할 수 있습니다. 바이럴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마케팅 플랫폼을 포함한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그들의 팔로워들이 심각하게 훼손된 환경에 대해 인식하게 하거나 재정적, 정신적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의로운 행동을 통해 생활 속의 섬김을 실천하도록 격려할 수 있습니다.

10. 옹호자와 지지자로서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

 높은 위치 혹은 보다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은 더 넓은 사회에서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와 권리를 옹호해 줌으로써 섬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해 평등한 대우, 공평한 기회 더 나아가 탄탄한 복지환경과 근로조건을 만들자고 외치는 요청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영향력 있는 글로벌 기업인은 자신의 철학과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새로운 관점에서 모든 근로자들의 생활임금을 지원하는 정책을 지지하고 옹호함으로써 다양한 인프라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대변하여 목소리를 내고 구체적인 행동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11. 사랑의 나눔 확장하기

 부자들은 선행과 기부를 통해 자선 활동을 크게 펼쳐 섬김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지원하는 다양한 시설과 복지기관에 돈을 기부하는 것과 정신 건강 지원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하여 빈곤과 불평등 완화에 일조하여 그러한 기관에 투자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것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시스템 개발로 섬기는 것 (조직구조를 만들어주는 것)

 재정적, 심리적 어려움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자금력이 있는 사람은 시스템과 자원을 구조적으로 개발해 규모있는 다양한 지원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기 쉬워집니다. 자금력이 있는 사람들은 개인과 각종 조직과 단체, 사업 상의 거래처와 협력하여 보호기관, 푸드뱅크, 상담, 직업 훈련 조직을 만들어 제공함으로써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새로운 '나'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삶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이전보다 나은 삶으로 진입하기 위한 그들의 필요와 요청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13. 변화에 대한 훈련과 개발

리더들은 자발적인 의지로 리더십 함양을 위해 자원을 할당하여 낮은 위치에 있는 개인들에게 리더십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개인적 투자로든 일종의 훈련과 양성으로 변화로 접근하고 사회에 잘 적응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움직임으로 리더십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교육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그들의 기술과 지식을 갖추고 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기업은 신기술에 대한 교육을 최신성을 갖추기 열악한 여러 지역에 조직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참여시켜 그들에게 접근용이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분야의 최신성과 경쟁력을 전하면서 리더십 함양에 참여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14. 소외되고 열악한 지역사회의 역량 강화

 노후되고 방치된 지역의 안위를 고려하여 소외되고 열악한 지역사회가 자립하고 주민들이 탄력적이고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은 의로운 행동을 실천하게 할 것입니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한 장벽과 고립의 악순환을 끊도록 최신성을 담은 인프라를 제공하고, 일자리에 대한 기회와 교육을 지원하는 것 등 일 것입니다.

 

  이처럼 높은 위치에 있는 영향력 있는 개인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와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7).'는 복음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모습은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그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진 사람들은 실상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부와 능력을 여러 면에서 가난을 경험하는 취약하고 무력한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소유한 부와 자원을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열악한 환경에 있는 누군가에게 변화의 불씨를 제공하고, 누구보다 전문적인 도움을 주어 실질적인 기여라는 도구로 그들의 위치와 영향력이 활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섬기는 행위는 어려운 사람들의 보편적인 삶이라는 과녁의 정곡을 명중시키는 복음의 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필로테아)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