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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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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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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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1독서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제1독서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 나훔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3; 3,1-3.6-7

1 보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유다야, 축일을 지내고 서원을 지켜라. 불한당이 다시는 너를 넘나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완전히 망하였다.

3 약탈자들이 그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들을 망쳐 버렸지만

정녕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영예처럼 야곱의 영예를 되돌려 주시리라.

3,1 불행하여라, 피의 성읍!

온통 거짓뿐이고 노획물로 가득한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다.

2 채찍 소리, 요란하게 굴러가는 바퀴 소리, 달려오는 말, 튀어 오르는 병거,

3 돌격하는 기병, 번뜩이는 칼, 번쩍이는 창, 수없이 살해된 자들,시체 더미, 끝이 없는 주검.

사람들이 주검에 걸려 비틀거린다.

6 나는 너에게 오물을 던지고 너를 욕보이며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라.

7 너를 보는 자마다 너에게서 달아나며“니네베가 망하였다! 누가 그를 가엾이 여기겠느냐?” 하고 말하리니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해 줄 자들을 찾으랴?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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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복음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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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8월 9일 매일미사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나훔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라고들 합니다.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멸망한 것에 대하여 말하면서, 니네베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원하고 그 함락을 지나치게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첫 부분에서는 니네베의 함락을 “기쁜 소식”이라고, 그 소식을 알려 주는 이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나훔 2,1)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훔서의 첫머리에서는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1,2)이라고 선포합니다. 매우 비슷한 구절이 이사야서 52장 7절에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이 “평화를 선포”한다고 말합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이사야서의 구절은 훨씬 듣기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동전의 다른 면입니다. 유배 간 이스라엘에게 해방이 선포되려면 바빌론이 멸망하여야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 또한 압제자가 몰락하여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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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훔서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억압에서 풀려나려면 아시리아가 무너져야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의 성읍”(3,1)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기쁜 소식”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면서 나훔서의 “기쁜 소식”은 거북하다고 느낀다면,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아니, 비논리적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훔서가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아시리아라 하더라도 그 힘을 심판하시는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힘이 곧 정의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아시리아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이 드러나야 합니다. (안소근 실비아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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