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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사순시기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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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사순시기 신부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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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사순시기

주님 수난성지 주일은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십자가 죽음, 부활을 기리는 주요한 기념일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며 신앙생활의 중요한 기간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이 기간은 주님 고난주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주님 수난과 부활을 주제로한 파스카 예식과 다양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합니다.

주님 수난성지 주일은 가톨릭에서 핵심적인 신앙을 기리고 기념하는데 중요한 시간입니다. 교회에서는 가장 경건하게 보내야 하는 날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역사를 되새기고, 그의 사랑과 희생을 기리는 예식을 하게 됩니다.

 주님 수난성지 주일은 일반적으로 공휴일이나 명절로 지정되지 않지만 그 중요성은 교회 내에서 매우 큽니다. 주님 수난성지 주일에는 특별한 예식이 마련되며(아래에 주님수난성지주일에 거행되는 예식에 대한 설명 페이지가 있습니다.) 이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거룩한 기도와 미사로 이루어집니다.

 성삼일은 교인들에게는 그들의 신앙과 희망을 되새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주님 수난성지 주일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통해 그의 희생을 회고하고, 부활시기를 기다리는 기간으로도 여겨집니다. 이는 곧 죽음에서 생명으로, 새로운 삶과 희망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주님 수난성지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거운 의미와 함께, 죽음과 부활의 믿음을 되새기고 신앙을 강화하는 기간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불굴의 희망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기간이며,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깊은 체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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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사순시기 독서 및 복음

 

(주님 수난성지 주일 독서와 복음이 길어서 아래 페이지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수난 성지 주일 (일요일) 독서와 복음 보러가기

 

 

2024년 3월 24일 매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주일 복음 묵상

2024년 3월 24일 매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주일 묵상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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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사순시기 용어 총정리

 

사순시기 용어 총정리

 

주님수난성지주일,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의 의미(성 토요일에 미사가 없는 이유),

성삼일 뜻, 파스카 뜻

사순시기에 등장하는 용어에 대한 총정리입니다.

 

20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 금요일, 성 목요일 뜻, 성삼일 뜻 총정리

20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 금요일, 성 목요일, 성삼일 뜻 총정리 안녕하세요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는 일반인 사람 필로테아입니다. 사순시기가 끝나가는 무렵에 성주간이 무엇인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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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 때의 파스카 예식과정 알기

 

 

파스카예식 때 알면 은총이 풍서해질 파스카예식의 순서

 

파스카예식 전례나 파스카예식서는 미사 때 많이 접해 보셨을 텐데요.

각각의 예식이 의미하는 것은 알고 계셨을까요?

 

2024년 3월 31일 매일미사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성야 예식 및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31일 매일미사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성야 예식 및 오늘의 묵상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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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주일미사 주님 수난 성지 일요일 미사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서는 그 시작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이라고 할 정도로 ‘예수님의 신원’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의 입을 통하여 이를 다시 한번 선언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사실 이 고백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무력한 죽음’, 그러나 ‘무력한 죽음’을 통한 ‘영광’이라는 십자가 신학의 총체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역설적 신비는 성주간 내내 좀 더 명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성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말씀은 이 십자가 사건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예수님의 사랑과 순명에 기초하였음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죽기까지 순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라고 언급하고, 제2독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결국 이것으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십자가는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린 자리라고 고백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엄청난 수난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할지 황망해집니다. 어쩌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촘촘히 드러나는 시간이니, 눈과 마음을 열어 그 사랑을 알아보면 됩니다. 우리가 금욕적 실행을 결심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결연한 사랑과 그 완성을 알아보고 그 사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번 부활 시기에도 우리의 신앙은 구체성과 깊이를 얻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전례력 중에 가장 거룩하고 신비로운 시간인 성주간이 시작됐다.

예수님은 이번 예루살렘 성지 순례, 파스카 축제가 지상에서 지내는 당신의 마지막 축제이고 거기서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직감하셨다. 그래서인지 예루살렘 입성부터 파스카 만찬 준비까지 정성스럽게 잘 준비하셨다.

전례는 과거 사건을 기억하는 단순 기념식이 아니라 그것을 지금 여기서 재현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 년 전 사건이고 문화도 많이 달라서 사제를 따라 성당으로 들어가는 행렬이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의미만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수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마치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처럼 평화롭게 들어가셨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다면 그분을 온 마음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그분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신뢰하며 따라간다.

 

  유다인의 파스카 축제는 그 옛날 조상들이 이집트 노예 생활 탈출하기 전날 밤 당장 떠날 채비를 하고 서둘러하던 식사를 기념한다. 그 식사의 주요리는 1년 된 수컷 양이나 염소다.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두면 죽음의 신이 그 집에 있는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인 줄 알고 그냥 지나쳐 갔다. 그 외 다른 집에서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맏이들은 다 죽었다. 그 희생양은 이스라엘의 노예 생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희생됐고 그 피로 그들은 살았다. 예수님은 당신을 바로 그 파스카 희생양으로 여기셨다. 이제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파스카 희생양이 되셨다.

 

「강론지침」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주간에 교회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정서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주간의 전례 거행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바로 그 파스카 신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77항).’

 

예수님을 환영해 맞이하고 그분 뒤를 따라감은 죽음을 건너 새로운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감이다.

인간은 초월적인 존재다.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낫기를 바란다. 뭔가를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삶의 질을 개선하는 세속적인 가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에 뛰어들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해서 새로운 사람, 완전한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파스카 신비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 대신 하느님 뜻을 따른 것이고 그래서 천지창조 때 하느님이 그 진흙 인형에 당신 숨을 불어넣으시며 그리셨던 바로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이다. 지난 사순 시기에 나름 보속과 희생, 극기와 단련을 실천했고 여러 번 실패했지만, 다시 시작하고 또다시 시작했던 교우들은 이 파스카의 신비를 알아들을 수 있을 거다. 수난과 죽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고 평화롭게 그 안으로 들어가신 것은 그 외의 다른 길이 없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좋을 것 같다. 진리가 자유를 주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늘 평화롭다.

 

예수님, 베드로 사도는 멀찍이 떨어져서 붙잡혀 가시는 주님을 따라갔습니다(마르 14,54).

돌밭에 뿌려진 씨앗처럼 기쁘게 주님 말씀을 듣고 뜨겁게 결심하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마는 사람 같습니다(마태 13,20-21).

주님 앞에서 주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감동적으로 고백했고(마태 16,16), 모두가 떨어져 나가도 자신만은 그러지 않고 죽는 한이 있어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었습니다(마르 13,29.31).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습니다(마르 14,38).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주님의 도움으로 이 파스카 신비 안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성주간을 잘 지내 제 믿음이 조금 더 성장하게 도와주소서.

아멘.(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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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오늘 저는 강론 주제를 다음과 같이 잡았습니다.
수모는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 받지, 억지로 당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주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수난(受難)이라는 한자어를 뜻풀이하면 ‘받을 受’, ‘어려울 難’입니다.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려움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받는다는 것이니 수동태(passive)입니다.
그런데 받기는 받되 억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저 받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니 수동태이되 능동적 수동태인 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고통을 기쁘게 받게 하고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까?
사랑이 아닙니까?
그래서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번역한

‘Passio Christi/Passion of Christ’

Passio 또는 Passion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이 Passion을 흔히 ‘열정’, ‘격정’, ‘열광’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뜨거운 사랑’ 또는 ‘불타는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즉시 불나비를 생각하고 ‘불나비사랑’이라는 옛 노래를 떠올립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이냐,

밤마다 불을 찾아 헤매는 사연

차라리 재가 되어 숨진다 해도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무엇으로 끄나요 사랑의 불길

밤을 안고 떠도는 외로운 날개

한 많은 세월 속에 멍들은 가슴

아아아 너를 안고 가련다 불나비 사랑”

 

자신을 불태우고 죽는 사랑입니다.
그렇게 죽어도 행복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의 수난은 수난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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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십자가를 진다’는 단어는 βασταξειν(바스타제인)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기를 품고 갈 때, 이 동사를 씁니다.

복음을 보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루카 11,27)에서

‘배었던’이 바로 바스타제인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그 무게에 눌려 힘들게 버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 삶의 일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고통과 시련을 거부하고 없어지기만을 바라는 우리입니다.

이때는 십자가에 눌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안는 사람은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힘차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마태 5,4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는 당대 로마법을 기억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로마 병사는 언제든지 식민지 백성을 붙들어 짐을 나르게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 거리가 천 걸음, 약 1.5km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도 이 법에 따라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진 경우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이 이런 명령을 받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먼저 나서서 천 걸음을 더 가겠다고 합니다. 처음 천 걸음은 명령이지만, 두 번째 천 걸음을 나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끌려가는 삶이 아닌 이끄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거룩한 성주간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교회의 명령이라면서

성주간 예식에만 참여하면 그만일까요?

아닙니다.

바스타제인이라는 단어의 뜻인 ‘귀중한 것을 품고 가다’라는 의미를 기억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끌려가는 삶이 아닌 자기 삶을 이끌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칠곡 할머니들이 모여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할머니 래퍼 그룹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균 연령 85세의 8인조 칠곡 할매 래퍼 그룹 ‘수니와 칠공주’입니다.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이제야 글을 배우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래퍼 그룹도 만들었습니다. 억지로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늦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나이이지만, 자기 의지를 앞세워서 이끄는 삶을 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조명연 (빠다킹)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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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은 한결같음이다.”

 

어제 어느 자매로부터 받은 그림과 더불어 위 짧은 말마디가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일희일비하지 않는 한결같은 삶입니다. 깊은 내공의 믿음을 반영하는 한곁같음입니다. 이런 한결같은 사람을 만나면 신뢰와 더불어 참 편안함을 느낍니다. 다산 어른의 다음 3월 24일 오늘 말씀도 이런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믿음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마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나도 빛난다.”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 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오늘 가톨릭신문 글로벌칼럼 난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한 로버트 미켄스의 글에서도 교황님의 한결같은 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장애물을 넘어 계속 전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나이들면서 건강 약해져도 오히려 더 큰 결단 보이는 중, 반대 세력과 급진 세력 모두 교황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주눅 들지 않고 교회 이끌어”

이런 어려움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한결같이 늘 미소 띤 얼굴 표정을 짓는 교황님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가톨릭신문에서 소개된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가톨릭교회 26분의 사제와 사제서품 60주년 “회경축”을 맞이한 3분 사제 역시 한곁같은 삶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삶은 흡사 장애물 경기와 같습니다.

예전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때 장애물 경기는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흥미진진했는지요!

일상의 삶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을 온갖 지혜와 용기로 타개해 나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한결같은 신망애 정주의 삶도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성지주일부터 시작된 성주간은 가톨릭교회에서 파스카 신비가 실현되는 절정에 속하는 전례시기입니다.

성지주일의 긴 복음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한결같음이 어둠을 밝히는 빛 같습니다. 가톨릭 굿뉴스에 한결같이 제 강론을 올려주는 형제의 댓글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아마 이 글을 쓰시기 위해 전날 하루의 성찰과 고백과 감사와 찬미의 삶의 결정판을 우리에게 매일 주십니다.

항상 신부님의 묵상글을 보면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 한줄기를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아멘.”

어둔 세상 한 복판에서 “주님의 빛”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가는 형제님이 참 경이(驚異) 롭습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은 세상 곳곳에서 크고 작은 주님의 빛을 반사하며 살아가는 형제자매들 덕분입니다.

오늘 수난복음 중에도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빛이 어둠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저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전개된 수난복음의 목차를 정리해 봤습니다.

 

(마르 14,1-15,47)

1.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미다

2.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3.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다

4.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5.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시다

6. 성찬례를 제정하시다

7.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다

8.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다

9. 잡히시다

10. 알몸으로 달아난 젊은이

11.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으시다

12. 예수님을 조롱하다

13.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시다 14.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15. 군사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다 16.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7. 숨을 거두시다

18. 묻히시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통과 수난을 겪어낸 주님의 한결같이 깊고 깊은 믿음, 희망,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호산나!" 당신을 환영하던 군중이 폭도로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침에도 한결같은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평상시 참으로 듣고 배움에 충실했음을 깨닫습니다. 다음 주님의 종이 고백하는 바 그대로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한결같이 듣고 배우는 공부에 충실하셨을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어 제2독서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가 또 깊은 감동과 더불어 깨우침을 줍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 토요일 제1저녁 기도 시 바치는 찬미가입니다. 그 일부를 인용합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수난복음의 요약처럼 느껴집니다. 역시 하느님 향한 사랑의 비움,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입니다. 수난복음에서 주님의 이런 모습에 감동한 백인대장의 다음 고백이 수난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입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앞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던 여인과 더불어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 역시 칠흑 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수난복음 마지막 묘사,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두 여인 역시 칠흑같은 어둠을 비추는 주님의 빛입니다. 과연 나는 수난복음의 누구에게서 나의 얼굴을 발견합니까?

 

예수님은 수난복음에서는 물론 평생 삶에서 겪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 비움의 계기로 삼으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겸손, 사랑의 순종, 사랑의 비움이 파스카 신비의 완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닮는 것은 우리 모두의 평생과제입니다. “어떻게?” 저는 셋을 권합니다.

 

“배워라, 비워라, 닮아라”

 

주님처럼 한결같이 배움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닮음의 여정에 항구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열렬한 신망애(信望愛)의 삶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처럼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가 이런 한결같은 배움과 비움, 닮음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의 감동적인 두 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나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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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장면을 한번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갈 때 타고 들어갈 동물을 선택하시는데, 엄청 웃깁니다.

이제 마지막인데, 이왕이면 좀 있어 보이게, 코끼리 정도는 타고 들어가시면 참 좋았을 텐데. 코끼리가 아니라면 키 큰 낙타나 멋진 백마 정도는 괜찮았을 텐데...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선택하신 동물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나귀는 말과에 속하지만 그 모습이 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고 왜소합니다.

생긴 것도 생뚱맞습니다. 어린 나귀!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그분께서 타시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힘과 권세와 능력을 겸비한 초강력 세속 왕권을 학수고대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의 그릇된 기대감에 ‘빅 엿’ 하나를 제대로 먹이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분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마음껏 발휘하셨습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머릿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고 있던 의식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마음을 따뜻이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 사이로 내려가야 하고,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대중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가시는 곳마다 백성을 웃음의 도가니,

그리고 감동의 도가니로 빠져들게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와 마주 앉아 썰렁한 아재 개그를 연발하시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 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키를 낮추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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