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매일미사 2024년 2월 19일 (월) 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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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매일미사 2024년 2월 19일 (월) 사순 제1주간 월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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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2월 19일 (월) 사순 제1주간 월요일

2024년 2월 19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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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2월 19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제1독서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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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9일 매일미사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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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2월 19일 오늘의 묵상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첫 번째

 

 

2월 19일 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가기 (클릭)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글은 ↑ 위의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매일미사

 

 

 

 

매일미사 2024년 2월 19일 오늘의 묵상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두 번째번째

 

사랑의 십자가

 

내가 그리스도인인 게 참 좋고 감사하다. 예수님의 기대는커녕 충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내 기대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내가 가는 이 길은 바른길이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영원하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말씀을 따라 십자가를 진다. 흔히들 십자가의 세로대는 하느님과 나의 관계, 가로대는 이웃과 나의 관계라고 말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가장 큰 이 두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하나로 만드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보이는 이웃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본다. 아무것도 필요 없는 하느님에게 잘해드리고 잘 보이고 싶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잘해준다. 더 나아가 보상은 말할 것도 없고 나에게 보답할 수 없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더 잘해준다. 그 보람마저 마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보상은 그런 것이 아니라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이 주시는 상이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 기준에 대한 예수님 말씀이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해드린 것임을 저절로 외워질 정도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다. 그 기준에는 종파는 물론 종교도 없고, 기도를 얼마나 많이 또는 깊게 했는지도 없다. 업적이나 성과의 크기도 없다. 오직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만 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잘해주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긴다. 그러고 보면 순교자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성인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헌신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에는 무게가 있다. 가벼워도 십자가를 지는 건 수고롭다. 아저씨들을 따라 처음으로 통나무를 어깨에 짊어졌을 때는 어깨뼈가 부서지는 것 같아 바로 내려놓았다. 알고 보니 요령이 있었다. 그 후론 나도 무거운 통나무를 편하게 나를 수 있었다. 큰 냉장고를 혼자 짊어지고 무거운 포대를 손도 안 대고 어깨에 짊어진 아저씨, 숙련된 짐꾼들이 짐을 나르는 모습은 예술에 가깝다. 사랑은 수고하고 때로는 귀찮기까지 한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어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때로는 맛보지 못한 신성한 기쁨을 느낀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그 수고와 귀찮음이 나를 거룩한 사람으로 변모시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거룩하신 것처럼 나도 거룩해져야 한다.

 예수님, 저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두 사람을 동시에 만나고 모두에게 잘해줄 수 없으니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중 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만납니다. 다른 이는 다른 천사가 가서 도와줄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십자가를 잘 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미사 강론)

 

 

 

 

2024년 2월 19일 평일 미사 오늘의 묵상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세 번째

 

본당 교우들이 제게 늘 바빠 보인다고 하십니다. 단체 모임에 강복 주러 갈 때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또 무슨 일이든 서두르게 하는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 책상을 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을 채우고 있는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은 저의 바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표를 두 달 치씩 확인하며 사는 것 역시 바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리고 아는 지인의 부고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제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십 중반을 살았으니 분명한 것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려고 늘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던 중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다 힘들어졌습니다. 걷는 것도, 눕는 것도 심지어 양말 신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면서 살았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나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시지요. 즉,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 신심 행위가 심판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 이웃에게 어떻게 실행했는지가 그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와 희생, 봉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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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9일 평일 미사 오늘의 묵상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세 번째

 

 

“나, 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이 레위기와 복음의 말씀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면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랑을 할 것이고,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님처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을 후렴구처럼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인 내가 너의 주인님인 것이 맞다면 너흰 내가 명령한 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계명으로 실천하라고 하신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은 맞지만 나의 주님은 아닌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비유한다면 바이든이 대통령인 것은 맞지만 그가 나의 대통령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고, 나의 대통령이 아니기에 아무리 명령해도 명이 서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여기는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여긴다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여기라는 하느님 말씀대로 우리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주님처럼 여기면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이웃을 쓰레기처럼 여기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쓰레기처럼 여기면 쓰레기더미에서 살 것이고, 주님처럼 여기면 누구를 만나든 주님과 함께 살 것이며 자신처럼만 여겨도 이 세상 사는 동안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니 이웃을 아무렇게나 여기지 말고 잘 여기며 살 것입니다. 여기기를 신중히 하고 소중히 하여 행복을 살고 천국을 살 것입니다.(OFM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강론)

 

 

 

 

 

2024년 2월 19일 평일 미사 오늘의 묵상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네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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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날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은 강론을 씁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과 공자의 말씀도 귀한 깨우침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다산)

무지,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논어)

다산은 물론 공자 역시 얼마나 신중하고 합리적인지, 또 겸손하고 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무모하고 용감한 어리석은 이들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무모(無謀)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새벽 일어나 열심하고 한결같은 사제도반들의 매일 말씀을 바탕한 묵상글을 몇 편 대략 읽어봤습니다. 정말 다양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복음과 독서 말씀을 기본으로 한 묵상글이지만 사제마다 참 다양합니다. 모두가 진리를 반영하나 진리의 한 부분만 반영할 뿐 진리자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올해 사순시기 교황님 담화문은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지 사순시기 동안 독본(讀本)으로 삼고 싶습니다. 유다인들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의 전통적 수행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한 설명도 참 명쾌했습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서로 관계없는 세 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버리는,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들은 회복될 것입니다.”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로 요약되는 겸손과 사랑과 자유의 삶이요, 이래야 비로소 참된 자유인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자유에로 인도하는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의 권고 말씀으로 제가 참 많이 자주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이런 가르침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삶이 사랑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 레위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가르치시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금령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뤄짐을 봅니다. 한번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2. 속여서는 안 된다.

3. 사기해서는 안된다.

4. 거짓맹세를 해서는 안된다.

5.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된다.

6.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7. 이웃에 줄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8.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된다.

9. 눈먼 이에게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된다.

10. 재판할 때에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11.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되고, 세력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된다.

12. 중상해서는 안된다.

13.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된다.

14.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된다.

15.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참으로 구체적 금령들로 표현된 섬세하고 자상한 실천해야 할 사랑의 내용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열거해 봤습니다. 새삼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사랑의 내용들입니다. 주님 친히 명령하는 다음 두 마디 말씀이 이 모두를 요약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참으로 거룩한 사람은 이런 하느님 경외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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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최후심판의 잣대는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기도나 전례, 계명의 준수도 아닌 사랑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과 왼쪽의 심판받은 염소들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1.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2. 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3.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4. 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5.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6. 너희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아주 구체적 사안에 어떻게 응답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국적, 종교, 인종, 남녀노소를 넘어 곤궁한 이들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전인류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한 오른쪽 양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응답 말씀에 이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왼쪽 염소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겠는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요 어느 누구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바로 이들 하나하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주님이니, 이들은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대하듯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인 이웃 하나하나를 귀히 대해야 함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한 성녀 마더 테레사요, 성 샤를로 후고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순시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 복음 말씀이요, 마지막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화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요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최후심판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모시듯 오늘 하루도 만나는 하나하나 형제를 주님의 성체처럼 귀히 대하며 구원의 삶을 살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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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기도와 자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작은 형제회 이기남 마르첼리노 마리아 수사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교회 전통 안에서 회개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금욕하라는 것으로만 이해한 나머지 복음의 가르침과 다르게 알아듣거나 거리가 있게 되었습니다. 희생하고 극기하고 더 많은 양의 기도문을 바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회개는 짐스러운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지금 여기서 누리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기도

기도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기도문을 더 많이 암송하라는 뜻으로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돌보고 계시는 가를 아는 시간이며 그러한 돌보심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사랑받음에 대한 앎과 응답하고 있는 실재를 아는 시간입니다.

단식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라기보다 나를 포기하는 가난과 겸손에 이르게 하는 내적 죽음의 시간입니다. 단식은 내려가고 내려놓고 허용하고 놓아주는 내면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과 나와, 너와 나와, 피조물과 나 사이에 흐르는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도록 하는 치유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하여 막히고 끊긴 수로를 다시 연결하는 복구의 현장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죽음이 없이는 하느님과 너와 피조물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단식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이사야 58,4-12)

자선

관계 안에서 발견하게 된 너의 필요성을 채워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법으로 관계를 돌보는 일로써 허물어진 관계, 단절된 관계를 풀어내어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너에게 흘러가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단식과 자선은 따로 분리해서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회개의 과정은 이 세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통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느님과 실제로 적용되는 하느님 상(像)은 공생하는 관계에서 살아있게 만드는 “내어주는 몸과 쏟는 피”로써 구체화됩니다. 장차 되어야 할 내 모습과 현재의 나와는 거리가 있고 그 거리를 얼마나 가깝게 만드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닮고 따르기 위하여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과 만납니다.

 나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편 가르기와 관계의 단절로 인하여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가만 따지고 율법과 도덕적 판단으로 사람들을 심판하는 데 그 기준이 바로 자신의 자와 저울로 그렇게 합니다. 자신이 차지한 꼭대기의 자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경쟁하고 비교하고 높이고 헐뜯습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식과 체면과 자존심이라는 겉껍질을 벗게 해 줍니다. 골방에서 기도하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단식을 감추고,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감추라고 하시는 자선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 마음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십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포장했던 내면을 고발하시는 예수님 앞에 항복을 선언하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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