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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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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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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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금요일 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제1독서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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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분노에 대하여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는 십계명의 규정을 풀이하여 심화시키십니다. 바리사이들에게 의로움이란 조문에 쓰인 극단적 행위를 삼가는 것이지만, 예수님께는 그러한 행위로 나아가게 하는 싹을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분노하지 마라.’, ‘분노를 한 사람과 화해하여라.’라는 뜻으로 풀이하십니다. 문자 그대로 살인만 금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의 원천이 되는 분노라는 감정까지 제어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성내는 것을 금지하시고, 나에게 원망을 품은 이들과도 화해하기를 바라십니다.

 

교부들은 분노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 분노는 오늘 복음에서 말한 분노로서 영혼이 굳는 병입니다. 이는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 뿌리마저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분노도 있습니다. 죄악과 불의 앞에서 일어나는 분노, 악으로 억압받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솟아나는 분노입니다.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든 것을 보시고 상을 뒤엎어 버리신 예수님의 분노나 구약에서 불의 앞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분노가 이러한 분노입니다. 이 두 번째 분노는 이유가 있는 분노로, 성내지 않으면 오히려 죄가 되는 분노입니다. 무질서한 것을 올바르게 질서 잡으려는 분노는 정당합니다. 이것은 정의와 사랑을 위한 ‘거룩한 분노’로 일컬어집니다. 지금 나에게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것이 이기심에서 오는 분노인지, 의로움을 지향하는 분노인지 식별하여야 합니다. 불의 앞에서 분노하지 못하는 것은 덕이 아니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거룩한 분노일 때도 그 분노의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겸손도 함께 지녀야 하겠습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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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모두 용서받고 살 수 있다.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당신께 돌아와 살기를 바라신다(에제 18,23). 악인이 그의 악행만큼 벌을 받고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잘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너무 다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에제 18,24)”라고 하신다. 하느님이 넘치는 사랑으로 공평을 잊어버리신 것 같다.

그런데 하느님은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우리가 공평하지 않다고 말씀하신다(에제 18,25). 하느님 셈법과 우리 셈법이 다른가 보다. 하느님 앞에서는 선행과 악행이 그 크기나 양(量)으로 셈해지지 않는 게 분명하다. 아니다, 다시 곰곰이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나의 선행과 악행들이 그런 식으로 저울에 올려지지 않는 게 나에게는 분명 이득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8).” 예수님은 이 약속을 지키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당신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으며 죽어가는 그 죄인의 청원을 들어주셨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2-43).”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하지만 죗값은 치러야 한다. 이웃에게 손해를 끼친 것이 있다면 변상하고 배상해야 한다.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친다(마태 5,23-24).’ 그런 의도가 아니었어도 그가 아팠다면 사과한다. 이 밖에도 알아내거나 기억하지 못한 잘못과 그런 줄 모르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더 남아있을까? 여기서 다 못하면 하늘나라 문에 이르기 전까지 그 후회와 괴로움을 고스란히 다 겪고 견뎌야 한다. 이런 죗값, 잠벌(暫罰)까지 없애주시려고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서 대사(大赦)를 받게 하셨다. 이게 역사적으로 면죄부로 남용, 악용된 때도 있었지만 하느님의 바람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한시라도 빨리 당신 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신다.

죄를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죄만 생각하며 하루를 죄 속에서 지낼 수는 없다. 알아내지 못한 죄를 기억해 내려고 허물투성이인 과거만 뒤돌아보며 아까운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문득 그런 기억이 나거든 잠시 멈추고 마음 깊이 아파하고 이런 나를 용서해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에게 실질적으로 변상할 수 없다면 변상과 보속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 혹시라도 본의 아니게 이웃에게 피해를 주면 어떻게 하나 마음 졸이며 불안하게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되지 않게 도와달라고 수호천사에게 청하고 그 대신 이웃을 더 많이 더 깊게 더 넓게 사랑하기를 결심하고 실천한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 즉시 이웃을 도와줄 마음의 준비를 한다. 나는 남을 위한 존재일 때 가장 아름답고 진정으로 나답다. 예수님을 닮을 때 가장 아름답다.

예수님, 또 새로운 하루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날은 회개하라고 제게 주신 기회이고 선물입니다.

이웃사랑을 위한 수고와 고통을 저의 보속과 여기서 앞당겨 하는 연옥단련으로 셈해주십시오.

세속적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청원이지만 실제로 이런 셈법이 아니면 제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사랑의 계명을 더 잘 지키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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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끄러운 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부끄러운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 의로움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불의를 자주 많이 보는데, 얼마 전엔 어느 나라 대통령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정권을 잡으면서 종교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요즘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 인간이 사라져야 종교 자유가 올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비단 한 번이 아닙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났을 때도.

그런데 오늘 에제키엘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는 그들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그들의 죽음이 당신의 기쁨이겠냐고 저에게 물으십니다.

저의 의로움은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을 단죄하는 의로움입니다.

저의 의로움에는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로움이 의로움이기는 한 것입니까?

자기 불의를 보지 못하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하고, 사랑이 없는 의로움을 어떻게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가 악하면서 더 악한 사람을 단죄하려는 저의 의로움, 사랑이 없는 저의 의로움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이제 악인도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의도도 고작 저와 인간의 죄와 악을 들추는 것이 아니고 악인도 살게 되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을 돋보이게 하고자 함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왜 압도적인 사랑이라고 합니까?

어떤 거대한 힘들도 어쩔 수 없을 정도일 때 우리는 압도적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하느님의 압도적인 사랑이란 어떤 거대한 악도 하느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의 이해는 자주 능력의 하느님이 왜 극악한 사람을 내버려 두시는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사람까지 살려 두시는지 이해하기에 버겁습니다.

그 한 사람의 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데, 그러니 그 한 사람을 척살하면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데, 그러니 많은 이를 위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의일 텐데 왜 그러지 않으시는지.

그러나 어쨌거나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의보다 사랑을 선택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의로움 때문에 악한 인간을 죽이시면 살아남을 자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내가 나보다 더 불의하다고 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하면 의로우신 하느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튼 하느님은 아무리 악해도 그가 죽길 바라지 않고 살길 바라십니다.

물론 하느님도 의를 선택하여 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벌도 사랑입니다.

그 벌은 불의에서 의로 돌아서게 하는 사랑의 벌이고, 돌아설 기회마저 없애버리는 마지막 징벌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벌 때문에 의로 돌아서는 그런 미성숙한 자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악을 압도하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돌아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작은 형제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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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시편130,3)

 

오늘 화답송 후렴이 반갑고 은혜롭습니다. 이런 깨달음에 투철한 이들이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이들이 남을 판단하지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들은 결코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습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히어 새로운 것을 온전히 앎으로’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과거의 것을 새로운 깨달음의 계기로 삼는 일이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겠습니다. 면담고백성사를 통해서, 또 지난 옛 스승을 책에서 다시 만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습니다. 새삼 반복되는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20년 전에 수도원을 찾은 어느 자매가 참 반가워했습니다. 당시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30대 초반이었는데 아르헨티나에 이민 중 잠시 20년 만에 귀국했고, 그 사이에 세 자녀를 둔 50대 초반의 나이라 했습니다.

 

“20년 후에 귀국할 때 그때 다시 뵈어요.”

“20년 후에라, 하루하루 살다 보면 되겠지요.”

대답을 하고 나이를 헤아려 보니 96세! 자신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 살아야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지난 20년이 순간이듯 앞으로의 20년도 순간일 것입니다. 

 

70대 말의 노부부와의 만남도 잊지 못합니다. 비슷한 연배의 형제자매들을 만나면 세월의 무게와 더불어 저절로 동질감과 더불어 친밀감을 느낍니다. 어느 자매의 고백도 잊지 못합니다.

   “몇년전 시어머니는 9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6.25 사변 시 남편을 잃고 26세 홀로 되어 유복자 아들 하나만 키웠고 제가 며느리로 들어왔을 때 시어머니는 46세 참 젊었습니다. 독실한 신자분으로 믿음으로 사셨지만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결혼 후 평생을 모시고 살았고 임종 전 몇 년 동안은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을 시켜드리며 온갖 시중을 다 들었습니다. 임종 전 마지막 말씀이 모든 앙금을 말끔히 씻어냈습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나도 네 에미다. 네 아픈 것들은 내 모두 가지고 가서 요단강에 버리고 가마. 아프지 마라.’ 마지막 유언 후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일주동안 누워 계시다가 임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온 시어머니의 한평생 삶이 얼마나 기구했는지 마음이 아렸습니다. 6.25 사변 전후로 얼마나 많은 분들이 참혹한 불행과 시련을 견뎌냈는지, 정말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는 전쟁이 한반도에서 다시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1970년대 제 20대 시절은 군부독재의 엄혹한 시대였지만 사회 곳곳에는 어른도 많았고 의인도 스승도 큰 스님도 많았고, 찾아 읽고 또 들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현실이 잡목(雜木) 우거진 야산(野山) 같다면, 그때는 곳곳에 큰 산에 푸르른 정신의 우람한 아름드리 거목의 스승들도 많았습니다. 그 한 예가 김수환 추기경입니다. 다른 생존 인물을 꼽으라면 함세웅 신부와 저보다 몇 살 적지만 여전히 한결같이 꼿꼿한 선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영원한 현역의 원로 정치가 충남 청양 출신의 이해찬일 것입니다. 이분의 평전도 동시대 사람으로서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어른도 스승도 예언자도 찾아보기 힘든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이요, 지식인은 많아도 지성인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입니다. 삶의 희망을, 길을, 중심을, 의미를, 목표를, 방향을, 가치관을 잃어 정신들도 많이 사악(邪惡)하고 쇠약(衰弱)하고 왜소(矮小)하고 변질(變質)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서사가 사라진, 스토리와 컨텐츠가 너무 빈약한 세상이요 개인들입니다. 뜻밖에 찾아 읽게 된 “리영희(1929-2010) 평전”을 어제는 뜨거운 마음으로 틈틈이 많이 읽었습니다. 시인 고은은 화갑 기념문집에서 그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항상 웃어른으로 모신 '시대의 스승', 무위당 일속자 장일순(세례자 요한1928-1994)에 대한 그의 고백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사회에 매몰되지도 않고, 인간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시키면서도 본인은 항상 그밖에 있는 것 같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밖에 있으면서 인간의 무리들 속에 있고, 구슬이 진흙탕에 버무려 있으면서도 나오면 빛을 발하고 하는 그런 사람은 이제 없겠죠.” 이런 분들이 저에게는 지금도 빛을 발하는 스승들이요 평전도 늘 가까이 두고 읽습니다.

   답은, 진리는, 구원은, 빛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늘길도 하늘문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빛나는 깨우침을 주는 분이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이분들의 존재가 그대로 살아 있는 하느님 증명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정말 신자들이라면 늘 깨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는 정신(精神)으로, 결의(決意)로, 기개(氣槪)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직설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무시와 멸시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형제를 바보라고 멍청이라고 하는 것, 말하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의 근본적 변화를, 마음의 순수를 촉구하는 주님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자비와 지혜요 용기요 바로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주저함 없이 예물을 바치기 전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다면 이들을 찾아 용서를 청해 화해할 것이며,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더라도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는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이겠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 모두 근본적인 마음의 혁명인 회개를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다시 생각하는 참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회개한 이들의 과거를 묻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어제가 아닌 오늘이요 과거가 아닌 현재입니다. 용두사미가 아닌 유종의 미가 되도록, 끝이 좋도록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은,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이 중요합니다. 변절, 배신의 부패한 삶이라면 정말 희망이 없습니다. 역시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를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이다.”

 새삼 삶은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용기와 지혜로 의인의 삶을 선택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의롭고 지혜로운 의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에제 18,30-31). 아멘.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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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는 ‘결과보다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말합니다. “A 학점을 맞지 못한 것을 보니, 공부 안 했구나.”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해도 A 학점을 맞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산수’를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산수’를 잘해야 중학교 올라가서 수학을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시간 시험을 봤고, 그 결과를 보시고는 몽둥이로 때리셨습니다. 특히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에 다 맞았는데, 이번에 1개 틀렸으면 성적이 떨어졌다고 맞아야 했습니다.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고, 이때 많은 친구가 수학 자체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를 가지고 실패의 삶이라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완벽주의는 직관적이고 익숙한 문제 해결에는 탁월하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익숙한 문제만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직관적 형태의 문제만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과 중심의 삶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도 결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정 중심의 삶이 이 세상을 사는데 훨씬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결과보다 과정의 삶이 중요함을 명령하십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결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결과를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삶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계명을 새롭게 해석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는 험담이나 멸시도 금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래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화해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형제와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바친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과만을 위한 삶보다 과정을 더욱더 깊이 있게 실천해야 한다면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고 화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대로 사랑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다고 하는 순간, 하늘나라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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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재단의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이 복음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마태 5,23)'이 아니라 '내가 어떤 형제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이렇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의 원망을 풀어주라고 하신 것인데 저는 저의 원망만 생각했던 겁니다. 복음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니까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좀 생각을 해봤습니다. 과연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처음에는 제가 워낙 착하게 살아서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없을 거야'라고 생각을 했는데 계속 생각해 보니까 내가 참 나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소시오패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 죄책감이 없고, 그것이 잘못인지도 인정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으로 보이고,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신의가 없고 우울이나 슬픔을 보여야 할 그런 상황에도 냉정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동감하는 능력이 없고 사회성이 없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이코패스하고 비슷한데, 근데 사이코패스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폭력을 쓰지만, 이 소시오패스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에 의한 폭력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위험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인구 100명당 4명이 이러한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냉철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 때문에 기업의 대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어떤 높은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모든 판단과 행동들이 다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원망을 품게 합니다. 하지만 소수 패스는 구성원들이 원망을 품고 있든 말든 크게 상관없습니다. 전혀 그런 것들에 대해서 공감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늘 복음 말씀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가 너희에게 원망을 품고 있거든'에서 형제가 너희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재단의 예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특히 수도자나 사제들은 더욱더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100명 중에 4명이 소시오패스라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나'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분명 우리 주위에 우리에 대한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감해 주면서 그 원망을 풀어주는 그러한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고, 예수님의 의로움을 배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이민우 유스티노 신부님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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