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가톨릭 매일미사 복음 묵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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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가톨릭 매일미사 복음 묵상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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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가톨릭 매일미사 복음 묵상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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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0일 평일미사

 

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제1독서

나의 말은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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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복음 말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2월 20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최정훈 바오로신부님의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보러 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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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①

 

용 서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다. 사람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것을 본 제자 중에 하나가 “주님,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주십시오.(루카 11,1)”라고 청해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을 거다. 그분은 당신과 아버지 하느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요한 17,11)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구원이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이 사람으로 수십 년 사셨던 경험에서 나온 기도다. 예수님의 지상 선교 사명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좋은 아버지 하느님’을 사람들이 믿고 그분께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보니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데 가장 큰 걸림돌, 사랑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가 ‘용서하지 못함’이라는 걸 알게 되셨다. 하늘에 계실 때는 천사들과 함께 지내시니 도대체 왜 인간들은 저러는지 이해하실 수 없었을 거다.

   참 좋은 아버지, 전능하신 하느님 말씀을 왜 안 듣는지,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봄이 오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데 왜 인간들은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으셨을 거다. 당신이 사람이 돼보니 아셨을 거다. 사람이 왜 청개구리처럼 말을 안 듣고,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아팠으면서도 같은 죄를 반복하는지를. 주님의 기도는 다 청원이다. 그중 딱 한 가지만 나의 결심이고 행동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 내가 용서해야 하느님도 비로소 나를 용서하시고, 내가 용서한 만큼만 용서하신다는 뜻은 아닐 거다. 하느님과 나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님이 들것에 실려 온 그 중풍 병자를 보자마자 바로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라고 다정하고 따뜻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을 거다.

   우리는 준 만큼만 받는 줄 아니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셨을 거다. 내가 용서해야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인 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뜻일 거다. 나는 훌륭하지는 않지만 사악하지는 않다. 이웃에게 잘해주고 그와 잘 지내고 싶지 그를 괴롭히거나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자꾸 그렇게 되어버린다. 연약해서 자꾸 넘어지고 귀가 얇아서 유혹에 빠진다. 선하고 의로운 것을 바라지만 마음만 뜨겁고 실천은 차갑다. 안 해봐서 어색하고 서툴고, 성인과 의인이 고생하는 걸 보니 겁도 나고 그렇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위대한 인간적인 행위다. 그래서 용서는 하느님 마음과 아주 가깝다. 그게 쉬운 거였으면 주님의 기도에 들어올 필요 없었을 것이고, 예수님이 재차 강조하지 않으셨을 거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지 않으셨을 거다. 나는 하기 싫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바라시니 한다. 잘 못하고 잘 안 되지만 예수님이 기뻐하시니 있는 힘을 다해서 시도한다.

예수님, 주님께는 자연스러운 것이 저에게는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죄인이고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도와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 말씀을 더 믿고 신뢰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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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 ②

 

 

 전에 몇 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환갑이 되고, 사제 서품 30주년이 되던 해에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지요. 그때 저는 제가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라는 뼈아픈 성찰을 하였습니다. 엉뚱한 방향 또는 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열심히 간 것 같은, 그래서 오랫동안 그리고 멀리 잘못된 방향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처럼 제게는 느껴졌는데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면에서 말입니다.

   기도한다고 오래 앉아 있었는데 기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단호하고 엄밀하게 얘기할 때 빈말은 기도가 아닙니다. 말일뿐이고 그것도 빈말이며 말 잔치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기도입니까? 어쩌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기도이고, 우리가 흔히 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말을 하느님께 막 쏟아놓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며, 심한 경우는 내 말만 하고는 대화를 끝내는 겁니다.

  이것은 또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걸어오는 전화는 받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 걸고서는 내 말만 하고 끊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하느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를 맞듯이 하느님 말씀을 그저 듣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고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나이다.’ 하는 것이고, 듣고 나서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때도 그 침묵을 못 견뎌하지 말고 가만히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또한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앞부분과 같은 자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길 빌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어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길 비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하는데 일용할 양식만 청할 것이 아니라 용서의 은총도 청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 말을 잘 듣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임을 묵상한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2024년 2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묵상③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시편 34,2)

역시 만세육창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어제 2월 19일은 본격적인 영농준비와 함께 봄에 들어선 우수였습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믿는 이들의 모두가 기도이며 기도가 모두의 답입니다. 부패나 변질되지 않은 한결같은 발효인생, 사랑의 삶도 기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늘 한결같은 향기로운 사랑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하였던 형수님께 들은 '러브스토리(love story)'가 잊히지 않습니다.

얼마 전 방문했던 베리굿 피부과 병원에 관한 일화입니다.

의사분과 함께 일하던 친절한 자매 모두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부부처럼 생각되었는데 어제 알게 된 두 분의 러브스토리에 감동했습니다. 두 분 다 20대 성당에서 교리교사로 함께 일하며 결혼까지 계획한 사이였는데 남자 의사분의 모친의 반대로 무산되어 둘 다 헤어져 따로 홀자 살게 되었고 반대하던 남자분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소문하여 그때까지 혼자 살던 연인이었던 여자분을 찾아 둘 다 나이 50에 결혼했다는 순애보(純愛譜) 일화였습니다.

 '베리굿(Very good)' 병원 명칭 그대로 베리굿 사랑이요 베리굿 인생인 두 분께 축복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한결같은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사랑입니다. 베리굿 인생, 베리굿 사랑을 원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마침 방문하여 집무실을 정리해 주던 형수님이 손잡이가 떨어져 불구가 된 자그맣고 예쁜 연푸른색 컵을 버릴까 하기에 만류했습니다. “놔두십시오. 20년 이상 강론집과 시집을 복사 제본하며 함께 해 오던 어느 자매가 선물한 컵인데 그 자매님은 지금 병고로 인해 이런 컵 상태와 흡사합니다. 애틋한 마음, 고마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간직하고 이용하려 합니다.” 사실 저는 평생 살아있는 동안 매일미사를 봉헌해 드리기로 내심 결정하여 실행하고 있는 고마운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가니 저를 포함해 주변에 온통 아픈 분들이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분들 소식도 자주 듣습니다. 몸은 서서히 무너져도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끝까지 한결같이 초롱초롱 맑고 밝게 빛날 때 정말 건강한 삶이요 이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신건강, 마음건강, 영혼건강이 으뜸이고 답은 기도와 사랑뿐입니다. 문득 제 창안의 팬티끈과 팬티천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며 팬티천은 육신입니다. 팬티끈 영혼이 넘치는 사랑, 희망, 기쁨, 감사로 튼튼하면 팬티천 육신은 좀 낡고 떨어져도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 영혼이 늘어지거나 끊어지면 그 좋은 육신의 팬티천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니 육신한테 끌려가지 말고 튼튼한 영혼이 주도하여 육신을 추스르고 다독이며 끌고 가도록 하십시오.” 튼튼한 팬티끈 영혼에는 기도와 사랑이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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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며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없는 삶은 상상이 안됩니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사랑의 얼굴인지 그렇지 않은 얼굴인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도 나중에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과연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한 당신을 닮은 ‘사랑의 얼굴’인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관한 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됩니다. 사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기도도 말도 글도 행위도 군더더기가 없고 단순하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형용사들은 점차 사라지고 동사들만 남습니다. 주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잘 우리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잘 아시는데 왜 기도하는가? 내가 아쉬워서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에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고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되고 이런 참나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나의 발견이 참기쁨이요 참 행복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사랑의 기도뿐임을, 하느님 한 분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 사랑의 힘,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힙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의 아름다운 말씀은 그대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을 상징합니다. 어느 것 하나 생략할 수 없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대로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 같은 말씀이며, 이런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 됩니다. 요즘 간혹 내리는 봄비를 보면 20여 년 전 써놓은 봄비라는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이수철신부님 시

 

기도 중의 기도가, 봄비같은 기도가,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적 요소가 그대로 담긴 예수님의 진실하고 단순하고 가난한 삶이 요약된 기도입니다. 이 기도대로 살면 예수님을 닮아 참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가난을, 겸손을, 감사를 깨닫고 배우게 하는 기도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참사람이 되는 답도 주님의 기도에 달렸습니다. 평생 기도해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전반부 셋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즉 하느님 중심의 청원기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둔 한 가족의 형제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우리는 모두 한가족의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를 때마다 어머니 교회를 생각하며 어머니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곤 합니다.

    전반부 셋의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청원과 더불어 후반부 넷은 일상의 삶에서 본질적 필요한 넷의 청원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용서를,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악에서 구함 받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간절하고 항구 한 청원입니다. 모든 원하는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의 청원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총과 노력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도록 맡기는 무책임한 삶이 아니라 청원과 더불어 적극적인 협력의 삶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삶의 자세입니다. 바로 일곱의 청원과 더불어 동시에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사랑의 협력을, 책임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 믿음의 삶이, 응답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감동적인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봄비같은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기도가 이뤄지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 34,6).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베네딕도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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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회사에서 직원 교육을 합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많은 회사에서 특강 부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돈을 굴리는 법도 모르고, 회사 구조도 잘 모릅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강의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사에서 인성 교육을 해 달라고 했고, 자기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금융, 회계, 인사, 마케팅, 가격 책정 등의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고, 주도력, 자제력, 결의 등의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습니다.

이 두 회사 중에서 어느 회사의 교육 효과가 더 컸을까요?

  이 교육은 똑같이 5일 정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그 후 2년에 걸쳐 회사 수익이 평균 30% 증가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업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아니라,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였습니다. 품성 기량 훈련을 통해 훨씬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신제품을 선포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 것을 통해서만 이 세상 안에서 더 잘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실제로 이 사랑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또 현명하게 지금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맺어야 하는 단순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모욕받았음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도 상하고, 상대방이 나를 우습게 볼 것 같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지금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고 굳게 믿기에 그분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라는 사랑 실천이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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