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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복음 묵상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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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복음 묵상 강론

by 필로테아 2024.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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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매일미사 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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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  / 2024년 2월 18일 제2독서

 

 

 

 

사순 제1주일  / 2024년 2월 18일 제2독서

 

 

 

 

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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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오늘의 묵상①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오늘의 묵상을 보시려면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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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8일 사순 제1주일 복음 묵상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오늘 첫째 독서는 창세기 노아의 홍수 얘기이고, 둘째 독서 베드로 서간은 과거엔 노아가 물로 구원받았음을 얘기하면서 이젠 노아의 홍수보다 그 본형인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얘기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사순 제1주일은 먼저 물의 세례를 얘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물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이 우리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고 할 때 물을 섭취하면 살고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는 뜻으로 이 말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우리를 죽임으로써 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을 가지고 우리를 죽인 다음 살리시고, 우리는 물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정교하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죽어야 할 내가 있고 살아야 할 내가 있는데 죽어야 할 나는 육의 나이고 살아야 할 나는 영의 나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야 할 육적인 나는 어떤 나입니까? 나를 추구하고 세상을 추구하는 나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없는 나와 하느님 없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자기와 세상을 추구하게 하는 육의 영은 죽어야 하고, 육의 영과 대결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와 헌신의 영이 성령을 모셔 들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뒤 복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시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마르코복음은 마태오나 루카 복음과 달리 유혹받으셨다는 얘기만 할 뿐 유혹의 내용을 얘기하지 않고, 유혹받았다는 짧은 보고에 이어 복음 선포의 시작을 짧게 기술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의도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비로소 복음 선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빼먹어선 안 될 것이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내보내시어 광야로 가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악령과의 대면은 성령께서 원하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는 자주 대면하고 악령과의 대면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 정반대입니다. 악령은 피할 것이 아니라 대면하여 이겨야 하는 것이고, 대결하여 이겼을 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왜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악령은 도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피하다가는 우리는 교회 안이나 수도원에 갇힐 것이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을 받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시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악령의 유혹과 시련은 성령의 승리와 단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레 겁을 먹고 악령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은 시련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성령의 인도를 뿌리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디모 1,7) 음을 믿으며 힘차게 나아갑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다고 전합니다. 유혹이라는 단어를 보면 남을 속여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속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속이려고 작정하는 사람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유혹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채워주는 방식입니다. 자기의 말을 들으면 무엇을 주겠다는 식입니다. 그가 주겠다고 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말을 물리치기 어렵습니다. 즉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부분을 건드립니다. 우리가 완벽한 존재라면 가지지 못한 부분이 없다면 유혹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 원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에게는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는 그것을 욕심이라 표현하고 누구는 그것을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하기에 앞서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또 다른 모습 가운데 하나는 '조금 더'입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일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유혹하신다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만 그것을 주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전부를 다 주십니다. 당신 전부를 주시는 분이 동시에 우리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원하고 하느님을 희망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느님을 원하고 하느님께 우리의 눈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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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사순 제1주일 강론 제목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지닌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32년 전 1992년 1월 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 미사 때 제가 한 강론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였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답답한 마음에 끊임없이 묻게 되는 물음은 광야 순례 인생 여정,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요즘 매일 인용하게 되는 다산 어록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도 참 좋습니다.

 “공부는 나를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

 공부 중의 평생공부가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요,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공부하는 평생학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새로워지는 공부가 진짜 평생공부요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제 좌우명이 뭔지 아십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하루하루 살 때, 거품이나 환상, 허영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역시 올해 2024년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시기 담화문도 참 깊고 풍부하며 참삶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를 통해 우리를 자유로 이끄십니다”라는 제하에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호세아 예언자의 말처럼, 광야는 다시 한번 우리 첫사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형성하시어 우리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신랑처럼 우리 마음에 사랑의 말씀을 속삭이시며 우리를 당신께 다시 이끄십니다.”

  2월 18일 자 오늘 가톨릭평화신문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1월 30일 서울 명동 교구청 접견실에서 국민의 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환담했다”는 기사 내용도 이채로웠습니다. 대주교는 한위원장에게 “전국을 누비시면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으실 텐데, 특히 작은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 들어주시길 바란다”라고 당부했으며, 한위원장은 “포용의 자세를 잘 배우도록 하겠다. 힘없는 소수를 대변하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노력하겠다” 화답했다 합니다. 좌우의 극단의 대립과 갈등, 분열의 상태에서 좌우를 함께 품에 안아야 하는, 어느 한쪽도 내칠 수 없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어머니 교회로서의 통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지... 어머니 교회의 고뇌는 깊을 수뿐이 없습니다. 오늘날 광야 세상에서 겪게 되는 난제 중의 난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순시기는 물론 우리의 평생 삶에 대한 궁극의 물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이 답을 줍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됩니다. 끊임없는 영적전쟁의 광야여정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광야 여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삶을 압축 요약하고 있는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잘 살아야 나머지 삶을 잘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주님과 함께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전투의 삶이라 하여 너무 심각하고 긴장하지 마십시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놀랍게도 즐거움이란 단어 둘을 오직 사순시기에 대한 장에서만 사용합니다. 앞서도 소개했지만 내용이 고맙고 고무적이라 다시 나눕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광야여정의 영적전쟁의 삶,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광야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 광야여정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한 성령은 광야 여정중 사탄과의 영적전투 중에도 예수님께 결정적 도움을 주셨음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희망이 생생하고, 성령은 물론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우군이 있으며, 무엇보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면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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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광야는 낙원임을 잊지 마십시오. 광야를 광야로 받아들일 때 광야는 낙원이 된다고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오늘 광야여정 중의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넘어가거나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떨어진 하와와 아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입니다. 사탄이 없는 곳이 낙원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을 때 낙원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통과해 가면서 영적성장에 낙원의 실현입니다. 유혹이 없이는 영적성장도 멈춥니다. 그러니 유혹을 없애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아닌 성령께, 천사들에 귀를 기울이며 들짐승들과도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으니 그대로 지상 낙원의 실현입니다. 다음 복음의 짧은 대목이 예수님의 지상낙원의 삶을 요약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우리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 들짐승들이 상징하는바 사람 같지 않은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들짐승들 같은 사람들, 괴물 같은 사람들, 사탄 같은 사람들도 측은히 불쌍히 가엾이 여기며 평화로이 공존해야 하는 지상 낙원의 현실입니다. 자비와 지혜에 용기를 겸비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천사들 또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광야여정 중에도 낙원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십자가를 기억하십시오.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에 결정적 표지 역할을 하는 계약의 표징들인 무지개와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 홍수에서 살아난 노아와 그 가족들은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무지개를 가리키며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구약의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라면 신약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구약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의 하느님을 제동하는 장치가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였다면, 이제 우리 교회의 시대에 하느님을 제동하는 유일한 장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광야 여정, 탈출의 여정에 우리의 결정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하느님을 무한히 인내하게 하는, 계약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광야여정, 탈출의 여정 중인 우리에게 영원한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부단히 더불어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을 통해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광야의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사는 참으로 역동적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바로 은총의 사순시기는 물론 전생애를 관통하는, 우리가 날마다 살아 내야 할, 다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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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교우들이 제게 늘 바빠 보인다고 하십니다. 단체 모임에 강복 주러 갈 때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또 무슨 일이든 서두르게 하는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 책상을 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을 채우고 있는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은 저의 바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표를 두 달 치씩 확인하며 사는 것 역시 바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리고 아는 지인의 부고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제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십 중반을 살았으니 분명한 것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려고 늘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던 중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다 힘들어졌습니다. 걷는 것도, 눕는 것도 심지어 양말 신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면서 살았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나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시지요. 즉,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 신심 행위가 심판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 이웃에게 어떻게 실행했는지가 그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와 희생, 봉사를 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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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뜻,  새로운 눈으로 보는 신앙의 길

가톨릭(Catholic)이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숙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의미와 신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영향을 받아왔고,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런 표면적인 정의만을 알고 있을 뿐, 그 깊은 의미와 신앙의 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한 분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인 베드로에게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고 말했습니다(마태 16:18)."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은 교회가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권위와 연속성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안정감과 신뢰를 주기도 합니다.

가톨릭 7성사 뜻

 가톨릭에는 성사(Sacrament)가 있습니다. 7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표지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께서 전하는 일곱 가지의 성스러운 은사입니다. 이는 보이지 않은 하느님의 은총을 보여지는 표지로 전해집니다.

칠성사는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 혼인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의 일곱 가지로 13세기 교황 클레멘스 4세가 동방정교회에 동의를 구한 이후 교리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사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가까워질 수 있는 통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성사에 참여함으로 얻어지는 은총이 매우 큽니다. 가톨릭은 또한 성체성사의 실재를 믿습니다. 이는 성찬례의 빵(제병)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재를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깊은 관계를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가톨릭에서 또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자선에 대한 실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세상에 전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 가톨릭교리의 핵심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신 가톨릭 뜻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돕는 일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나누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가톨릭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중요시합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따라서 가톨릭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지향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황 프란치스코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수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측면을 강조해 왔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가톨릭의 본질을 강조하며 사랑하는 이를 통해 세계 각지의 신자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눌 수 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수용하는 교회의 역할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2015년 발표한 대표적인 문서인 '라우다토 시(Laudato Si)'에서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한 문화와 전통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메시지 등 다양한 국가와 문화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는 가톨릭교가 사회적 통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 다양성과 문화적 상호이해의 중요성을 알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출처로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교황님의 연설이나 복음묵상, 교리교육, 교황의 서적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라우다토 시(Laudato Si)'와 같은 교황의 대표적인 문서들은 그의 이러한 신념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황의 발언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다양성과 상호이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널리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자들은 가톨릭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 깊은 의미를 재고하는 것은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충분히 경험하고, 그 사랑을 세상과 나누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 속에서 더 깊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관계를 맺을 때 그분과 가까워지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복음을 세상에 실현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세상에 드러나는 결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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