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든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남동 난방 성당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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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말씀

응원봉 든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남동 난방 성당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애

by 필로테아 2025.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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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든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남동 난방 성당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애

응원봉 든 신부, 그리고 난방 성당 꼰벤뚜알 수도원 이야기

응원봉 든 신부

응원봉 든 신부 이야기가 주목되면서 해당 신부님이 머무는 한남동 수도원인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13세기 이탈리아 아시시의 한 청년이 무너져가는 나의집을 다시 지으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시작한 작은 삶의 행동들이 오늘날 전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수도원으로 퍼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성 프란치스코, 그가 창시한 프란치스코회는 8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류의 고통과 함께하며 시대의 부름에 응답해오고 있는데요. 그 중심에서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수도회가 있습니다. 그중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에서 든든한 버팀목으로서 지난 70년간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왔습니다. 2028년에 정확한 70주년이 되는데요. 하느님께서 이 형제들을 위해 마련하실 일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가 직면한 여러가지 빈부 격차나 환경 위기, 평화에 대한 깊은 갈망 앞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창립자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카리스마를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하며 복음을 실현하는 징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도시 빈민들과 연대하기, 위한 무료 급식소 운영, 생태환경 보호를 위한 캠페인, 그리고 국제 평화 활동은 이들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수도회의 역사적 인물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였는데요. 콜베의 형제애를 이어오고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합니다.

 

응원봉 든 수사님

 

한남동 수도원에 깃든 ‘꼰벤뚜알’ 뜻

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회의 계열 중 하나로, 영어로는 Order of Friars Minor Conventual (약칭으로 O.F.M. Conv.) 한국어로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콘벤투알프란치스코회)이라고 불리는데요. Conventualis라는 단어는 라틴어 'convenire'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함께 모이다', '공동체'라는 뜻으로, 수도원에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으며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형제애를 실천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성은 꼰벤뚜알 형제들의 복장에서도 드러납니다. 검정색 또는 회색 수도복을 착용하는 이들은 "The Grey Franciscans"(회색 프란치스칸)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고유의 정체성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꼰벤뚜알이 추구하는 '함께 모임', '공동체성'은 수도원의 담장을 밖으로 나아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형제애로 함께하며 교회의 쇄신과 사회 적응을 통해 세상에 흡수되어 세상에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걸어가고자 하는 강한 사명을 품고 있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형제들은 특히,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박탈당한 이들, 가난과 소외 속에 살아가는 이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힘을 실어야 할 이들과 함께 걸어온 여정들이 있습니다. 이 형제들의 발걸음은 이들과 동행과 함께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품위있고 세련된 방식으로 전하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도 물리치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신념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그 삶의 본보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성인이었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입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는 한 가장(家長)을 대신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어 생명을 내어놓은 신부였습니다. 콜베 신부의 이러한 숭고한 희생은, 오늘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추구하는 형제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의 삶과 희생이 오늘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걸어가는 길을 명확히 보여주는 빛나는 등불이었던 만큼,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의 이야기도 아래 곧 이어집니다.

꼰벤뚜알

 

‘난방 성당’으로 이어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70년의 여정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1209년,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동료들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복음적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받으면서 공식적인 수도회로 탄생했습니다. 이후 이들은 회개의 삶을 몸소 실천하며 '작은 형제들'로 불리며 교회 안팎에서 가난과 회개의 삶을 전파했습니다. 1223년 호노리오 3세 교황이 최종적으로 회칙을 승인함으로써 그 기틀이 확고해졌습니다.

세기가 흐르면서 회원 수가 증가하고, 평신도 단체인 재속프란치스코회(OFS)도 창설되면서 프란치스칸 운동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중반 이후, 도시 안에서 활발한 사도직을 펼치던 형제들(‘꼰벤뚜알’)과 엄격한 은수자적 생활과 가난을 강조한 파(‘옵세르반티’, 이후 OFM으로 발전) 간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어 16세기에는 엄격한 개혁을 추구하는 카푸친(OFM Cap.)이 분리되면서, 오늘날 성 프란치스코를 창설자로 모시는 수도회는 세 갈래(OFM, OFM Conv., OFM Cap.)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겪으며, 각기 다른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발전해왔습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의 원래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사회적 역할을 확장하고, 세속과의 연계를 강화함으로써 교회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가 오늘날까지도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서 그 역할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꼰벤뚜알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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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든 신부가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기원

13세기 이탈리아판 '재벌집 막내아들' 이야기

예수님을 사랑한 부잣집 청년, 성 프란치스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이야기할 때 성 프란치스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의 영성은 사부 성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영성은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 카푸친 등 1회와 2회인 글라라를 비롯해 제3수도회까지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한 바로 그 인물이 성 프란치스코이기도한데요.

예수님을 따랐던 성 프란치스코는 멀고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부인’이라 칭하며 삶의 동반자로 삼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열망으로 충만한 청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가난을 벗 삼으며, 세상과 연민 속에서 하나 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 프란치스코가 1181년 또는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처럼 부잣집 아들을 세상의 복음을 전하는 형제로 부르신 과정은 놀라울 뿐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집안은 당시 패션과 의류업계에서 성공을 거둔 거물급 가문이었는데요. 어린 시절 그는 아시시 거리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며, 집에는 값비싼 옷과 풍족한 음식이 넘쳤습니다.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샤넬과 에르메스 같은 명품을 자연스레 걸치고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던 젊은이가 SNS에서 '금수저 라이프'를 자랑하며 '좋아요'를 양산하는 그런 청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당시의 풍요를 당연하게 여기며 음유시인의 노래와 축제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갔습니다.

 

 

샤넬 에르메스 대신 베옷을, 샴페인 대신 물을 선택한 남자

성 프란치스코 동상

 

부르심을 받은 부자 청년, 성 프란치스코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처음에는 세속적인 화려함과 즐거움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특별히 선택하셔서 '부름 받지 못한 부자'아니라  '부르심 받은 부자' 의 삶으로 이끄셨습니다. 집안이 부유했던 것과 달리 그는 키가 작고 약간 왜소했었는데요. 그는 사명의식과 함께 약간의 허세를 품고 1202년, 아시시와 페루자 간의 전쟁에 참전해 영웅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이 재벌집 아들 프란치스코가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가 1년간 감옥 생활을 기점으로 인생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그후 부모의 재력 덕분에 석방된 뒤에도, 그는 다시 또 속세적인 삶을 이어가려 했지만, 희안하게도 이전과 같은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공허함에 시달렸습니다. 그 이후  브리엔 백작 발터 3세의 군대에 한번 더 자원해 길을 떠나다가 스폴레토라는 곳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환시를 보여주십니다.
환시 속에 프란치스코는 수많은 갑옷과 무기가 가득한 방 안에 있었고, "너는 주인을 섬길 것이냐? 아니면 종(노예)을 섬길 것이냐?"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주인을 섬기고 싶습니다."라고 응답하고, 전쟁에 나가지 않고 아시시로 돌아갑니다. 이 환시를 체험한 후, 프란치스코는 삶에서 완전히 달라져 영적인 삶으로의 변화를 시작합니다.

프란치스코의 삶은 당시 많은 부유한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세속적인 즐거움과 화려함을 쫓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풍요 속에 그는 부족함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를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도록 이끌기 시작하십니다. 그의 물적 재산과 배경은 세상의 허영과 사치에 머물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그 환시를 계기로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버리고, 자신의 화려한 비단 옷들과 고가의 물품들을 팔아 걸인들에게 나눠주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가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현대의 청년사업가처럼,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 환원'하기로 결심하는데요. 고가의 물품들을 팔아 직접 거리의 걸인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더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가난'을 자신의 신부(新婦)로 선언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나병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이런 프란치스코의 파격적인 행보에 주변에서는 "미쳤다"며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묘하게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께서 ‘부자’에게 바라시는 진정한 삶의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자연과도 특별한 교감을 나눴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들판에서 설교할 때, 새들이 그 설교를 들으려 모여 드는가 하면, 아시시에서 맹수로 악명 높던 늑대들이 그의 말 한마디에 순한 양처럼 변화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람들은 그를 '모든 피조물의 친구'라 불렀습니다.

 

 

걸인을 왕처럼 대한 남자, 그 뒤를 따른 수천 명 형제들

"빵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한때 프란치스코와 화려한 인싸의 길을 걷던 사람들도, 그가 가난한 생활을 일부러 선택하고, 구걸하며 살기 시작한 모습을 보며 정신이 나갔다며 혀를 찼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한 빵을 구하러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병환자들과 거리의 빈민들을 위해서였는데요. 당시 나병환자는 천형(天刑) 즉, 하늘의 벌을 받은 자들로 여겨져 마을에서 추방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그들을 위해 베옷을 입고 맨발로 먹을 거리를 구하러 다니며 나병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을 껴안고, 그들의 상처를 씻어주며, 함께 빵을 나누며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했는데요.
이런 그의 모습을 본  젊은이들은 처음에는 그를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여기다가 점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우리도 당신처럼 살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처음으로 '열두 명'의 형제들이 모이게 됩니다. 여기서 '함께 모이다'는 뜻의 꼰벤뚜알의 의미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열두명의 작은 형제들이 모여 작은형제회가 탄생합니다. 초기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직접 창시한 남자 수도회로 제1회라 불리는 작은형제회(OFM)를 비롯해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FM Conv.), 카푸친 작은형제회(OFM Cap.)로 각기 다른 시대적 요구와 사회적 상황에 맞추어 퍼져나가게됩니다. 세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모두 성 프란치스코의 규칙을 따르며 형제애를 나누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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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작은 형제들입니다."

초반에 열두명의 형제들이 모였을 때 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화려한 저택 대신 허름한 오두막에서 지내며, 매일 아침 빈민들을 위해 구걸에 나섰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삶을 선택하는 12명의 형제들로 인해 갑작스럽게 프란치스코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점이다. 수년 만에 그들의 수는 수천 명을 넘어섰고,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들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당시에는  "거지가 된 재벌아들을 따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습니까?" 라고 귀족이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거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상속자들이지요."
이렇게 시작된 작은 움직임은 프란치스코회라는 이름으로 발전했고,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돈과 명예를 버린 한 청년의 선택이, 역설적으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젊은 시절 인싸였던 탓일까죠? 바이럴 효과라고 하죠, 그에 대한 입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재벌가 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산다는 소식에, 다른 재벌가나 귀족 자제들도 그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가난한 프란치스코의 추종자들로 많은 이들을 부르셨고, 수천명 넘는 이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이렇게 부잣집 아들에서 하느님의 가난함으로 내려간 작은 형제 프란치스코의 삶은 하느님이 원하신 진정한 부유함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증명하게 되었고, 그렇게 프란치스코회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나병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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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동 수도원 사명과 비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정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사명과 비전은 이렇게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헌신과 봉사의 손길을 내미는 데에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형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찬미하는 삶을 실천하며, 세상에서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모든 형제들 안에서의 하느님의 선하심 발견

성 프란치스코는 모든 형제들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을 발견하고 찬미했습니다. 이 정신은 오늘날 꼰벤뚜알 수도회에서도 이어져, 형제들 간의 상호 존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헌신과 봉사

수도회의 형제들은 세상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헌신과 봉사를 실천하며, 그들의 삶을 돕고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물질적 지원을 넘어, 정신적, 영적 위로와 지지를 제공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형제들은 다양한 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고자 합니다.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 만들기

꼰벤뚜알 수도회는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행동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활동을 통해 실현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그들의 권리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러한 실천은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며, 사회적 화합과 조화를 이루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환경 보호와 생태적 관심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자연과 모든 생명체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꼰벤뚜알 수도회는 환경 보호와 생태적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는 수도회가 단순히 인간 중심의 삶을 넘어서, 모든 생명체와 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삶을 지향함을 보여줍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사명과 비전은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현대 사회에 맞추어 재해석하고 실천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남동 수도원

 

한남동 ‘난방 성당’ 70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여정의 의미

2028년을 맞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한국에서의 70년의 여정을 기념합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안에서 '꼰벤뚜알 작은 형제들'이라 불리는 사제와 수사님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면,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낮은 자세로 섬기며 성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듯, 평화의 도구로써 차별 없이 '하느님의 선'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싶이 뿌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0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도회는 세상과 함께 걸어가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영적, 실천적 대안을 제시해왔습니다.

 

'가난'영성과 함께 해온 시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의 영성'을 현대적 맥락에서 살아내면서, 수도회는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주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던 시기에 '작은 마음'의 가치를 꾸준히 설파해 왔다는 것입니다. ‘작은 마음’, ‘형제애’, ‘공동체 정신’이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물질주의와 권력 중심의 현대 사회에 대안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해왔습니다.

 

환경 위기 시대의 프란치스칸 응답

환경 문제가 전 지구적 위기로 대두되기 훨씬 이전부터,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태 영성을 실천해 왔는데요. '태양의 찬가'로 대표되는 프란치스칸 생태 영성은, 오늘날 기후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영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수도회의 환경 보호 활동은 '생태적 회심(ecological conversion)'이라는 깊이 있는 영성적 차원을 내포하 있어  성 프란치스코의 자연과 생명 등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수도회는 환경 보호와 생태적 관심을 촉구해왔습니다.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해 다양한 강의과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인식을 높이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프란치스칸 도전

흥미로운 점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디지털 시대의 도전을 어떻게 수용하고 계시는가 입니다. 전통적인 프란치스칸 가치관을 지키시면서도, 현대 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선교와 봉사를 늘 모색하고 있는데요. 이는 8세기 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혁신적이고 선구자적인 영성이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수도회는 SNS와 유튜브 채널등다양한 매체를 통해 현대적 관점에서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평화의 도구로서 사회적 역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와 실천적 노력을 통해,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영적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는데요. 한반도의 분단 속에서 '평화의 도구'로서의 소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70년 역사는 한국 교회와 사회의 성장에 함께 호흡하며 살아있는 복음의 증언이 되어왔습니다. 수도회의 여정은 우리에게 '진정한 형제애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지며, 다가올 미래를 밝히는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한남동 집회 현장에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님이 어둠 속에서 응원봉 불빛을 의지하며 추위에 떨던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쉴 공간과 시간을 내어준 일은, 특별한 행동이라기보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영성과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한 한 단면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극한 선으로 이끌어오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앞으로도 시대의 표징이 되는 발자취를 남기게 될지, 그 여정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또 다른 빛으로 세상에 퍼질지 기대하게 됩니다.

한남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프란치스코 계열 수도회들, ‘난방 성당’처럼 훈훈한 세 갈래 길

한 뿌리, 세 가지로 퍼진 프란치스칸의 나무

성 프란치스코의 유산은  굵은 뿌리에서 뻗어 나온 세 개의 큰 가지처럼 발전했습니다. 이 세 계열은 놀랍게도 경쟁 관계가 아닌, 하나의 프란치칸 가족을 형성해 각자 개성을 살려 성장해왔다는 점입니다.

프란치스코 계열 수도회

 

제1회,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제1회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카푸친 작은형제회이 있습니다. 여기서 작은형제회(OFM)는 가장 원초적인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이어받아 철저한 청빈의 삶을 추구하며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OFM Conv.)는 도시 선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며 현대 사회의 요구와 시대의 징표를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현합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OFM Cap.)는 은둔과 기도 생활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프란치스칸 가족으로 형제애로 함께합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악기를 연주하면서도 하나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듯합니다. 시대적 요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각 수도회들의 유연성이 아닐까합니다. 엄격한 수도 규칙을 따르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필요한 사목 활동을 개발하시키고 상호협조적으로 발전시켜왔습니다. 빈곤, 환경 문제, 교육, 평화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각 수도회가 자신들의 특성을 살려 대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 갈래의 프란치스칸의 길은, 그리스도 육화의 신비와 사랑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제2회,  글라라수녀회

프란치스코회가 남자 수도회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프란치스코 가족은 더 크고 다양합니다. 800년 전 시작된 제2회 글라라회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함께 설립한 여자 수도회로 창설자 성 글라라의 뜻을 따라 지금도 엄격한 가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봉쇄 수녀회로 가난과 공동체 생활을 엄격하게 실천하며,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3회, 수도3회와 재속프란치스코회

프란치스코회는 수도3회와 재속프란스코회, 율수회를 통해 세상안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더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수도3회로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 프란치스코 전교봉사 수도회, 천사의 모후 수녀회 등이 있습니다. 율수 3회(T.O.R., Third Order Regular)는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프란치스칸 가족 중 하나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복음적 권고를 실천하는 남녀 수도자들로 구성된 단체입니다. 율수 3회는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는 아직 진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프란치스칸3회 중 재속 프란치스코회(O.F.S.)와 수도 3회에 속하는 여러 수도회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팎에서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이러한 분류는 각 계열이 독자적인 회칙과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통된 프란치스칸적 카리스마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하려는 여러 공동체의 발전 과정을 반영하며, 교회 안에서의 유기적 '일치'와 '형제애'를 보여주는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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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 든 신부'와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 이야기

위대한 사랑,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수도회 창립 이래 다양한 성인을 배출해왔지만, 그중에서도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의 삶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자신의 삶을 통해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정신을 구현한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인데요. 콜베 신부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은 수도회가 강조하는 형제애와 사랑의 이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꼰벤뚜알의 어린 콜베와 성모마리아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의 이야기는 1894년 폴란드의 작은 마을 즈둔스카볼라에서 시작됩니다. 어린 시절, 그는 형제들과 장난을 치며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았지만, 특별한 사건이 그의 인생을 바꿨습니다. 그의 집에는 검은 성모님의 제대가 있었고, 그는 종종 그 앞에서 묵주기도를 드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에 잠기곤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은 콜베 신부는 마음속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성모님께 잠시 기도를 드렸는데요. 순간, 성모님이 두 개의 상자를 들고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는 순결을 상징하는 흰색 상자, 다른 하나는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색 상자였는데, 어린 콜베는 주저 없이 두 상자 모두를 원한다고 대답했고, 성모님은 미소를 지으며 사라지셨습니다. 이 신비로운 성모님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이끄는 중요한 길잡이가 되면서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키우게 됩니다. 특히, 순결과 희생의 가치를 깊이 새기게 했습니다. 그는 14세에 수도회에 입회하여, 뛰어난 학문적 열정과 성취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 성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비상한 머리를 허락하시어 다양하게 배운 학문들을 신앙과 결합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신앙을 전파했던 미디어 혁명가

1917년,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로마에서 동료 수사들과 함께 '성모 기사회' 창립합니다. 당시 교회를 둘러싼 어려움 속에서 그는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전하고, 신앙을 강화하며, 교회의 적대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그후, 그는 폴란드에서 ‘성모 기사’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5만 부에서 1940년에는 100만 부에 이르는 발행부수를 기록하며, 잡지가 신앙과 사랑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습니다. 신문, 잡지, 기도문 소책자 등을 인쇄하고 배포하면서 콜베는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려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해 당시로서는 더 혁신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전통과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방법들을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일본 나가사키와 인도로 선교를 떠나며, 현지 언어로 잡지를 발간하고 성모 마을을 설립해 복음화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이 전 세계에 신앙의 불씨를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선택

꼰벤뚜알 정신의 극치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의 삶은 그의 순교로 절정을 이룹니다. 1936년 폴란드로 돌아온 콜베 신부는 나치의 침략 속에서 그의 영향력과 활동이 위협받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유대인을 보호하고 지하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수용소는 비인간적인 환경이었지만, 그는 수감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기도하며 희망을 전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죄수가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수감자의 탈출로 나치는 그에 대한 처벌로 죄수의 가족을 열 명을 처형하기로 명령했고, 가차없이 사형집행을 추진했습니다. 이 때, 콜베 신부는 자신이 그 수감자를 대신 죽겠다고 자원하며 숭고한 희생을 감행합니다. 그는 자원을 한 이후,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 속에 시달렸지만, 하느님께 모든것을 의탁하고 다른 수감자에게 사랑의 메세지를 남기기도 하고 그들을 위로하며 기도했습니다. 1941년 8월 14일, 그는 독약 주사를 맞아 처형당하고, 사랑의 메시지를 남겼고,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희생은 절망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나는 사랑의 증거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른 '사랑의 순교자' 

그 이후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는 '사랑의 순교자'로 불려졌고,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 반열에 올랐습니다.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는 친구를 위해 형제애로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을 떠올리게 했고, 많은 이들에게 희생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사제가 남긴 사랑의 유산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콜베 신부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지금-여기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도 이어지는 콜베 신부의 정신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 한국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비롯한 전 세계의 수도회는 그의 신념을 계승하며 신앙과 형제애를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디지털 시대에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디지털 매체를 통한 복음 전파, 소외된 이들을 위한 활동 등은 그가 강조했던 형제애와 사랑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노력들입니다.

그의 삶은 우리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남기며, 그의 사랑과 헌신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여전히 나아가는 길을 비추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희생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형제애'가 무엇인지를 묻는 살아 있는 물음표로 남아 있습니다.

 

 

'난방 성당'이라 불리는 한남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남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용산구의 중심, 고급스러운 건물들과 번화한 거리가 어우러진 그곳에 자리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동산 가치가 높은 지역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고수하는 가난한 수도회로서 깊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2028년으로 이어갈 70여년동안, 이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순수한 정신을 충실히 따르며 한국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요즘처럼 급변하는 예측 불가능한 AI시대의 여러 도전과 변화 속에서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작은 형제들은 성 프란치스코 창립자의 겸손하면서도 선구자적인 메시지를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습니다. 번화한 도심의 소음과 화려함 속에서도 이 수도회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약자들을 돕기 위해 당당히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차별과 혐오, 소외의 벽을 허물기 위해 사랑과 연대를 실천하며, 이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현장에서 구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전하신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라는 메시지를 깊이 실현하는 이 수도회는 세상과의 현대적인 방법으로 진정한 연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가난과 나눔, 평화와 생태 환경 보호를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영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방향성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사랑과 형제애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가난'에서 비롯된 진정한 자유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깊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오늘날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옷을 입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작은 형제회를 비롯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카푸친 작은 형제회뿐 아니라 수도3회들은 교회의 '허파'로서, 영적인 호흡을 담당하며 신앙 공동체와 세상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다른 프란치스코회가 하느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을 실천하며 세상과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두손을 모아봅니다. 진심 어린 기도가 이 수도회와 그들이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더욱 널리 퍼져, 사회의 어두운 곳에 빛과 희망을 전하는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남동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2

 

 

 

 

응원봉 든 신부가 있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미담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 속에서 따뜻한 미담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형제들이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며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수도회의 일상부터 영감을 주는 일화까지, 꼰벤뚜알 형제들의 따뜻한 삶을 조명해보려 합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련 미담들
아미밤 응원봉을 들고 시민들을 수도원에서 휴식토록 제안 한 분은 사진속 오상환 요셉 신부이다

수도원의 일상을 밝히는 반려견 '하심이'

꼰벤뚜알 수도원의 양성소에는 누구나 반하게 되는 대형견 '하심이'가 있습니다. '하심'이라는 이름은 '낮은 마음'을 기리기 위해 지어졌지만, 그 이름에 걸맞게 순한 성격으로 수도원에 사랑스러운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하심이는 지나치게 순한 성격 덕분에 혹시라도 도둑이 들어와도 경계보다는 애정을 보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하심이의 존재는 형제들에게 큰 기쁨을 주며, 수도원의 화목한 분위기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영성의 깊이를 더하는 박문식 베네딕도 신부님

박문식 베네딕도 신부님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서 뛰어난 영적 지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드리고, 마음의 병을 치유받았다고 회고하며, 깊은 영성과 따뜻한 상담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전합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신부님은 수도회 미사 집전을 6시 '17분' 또는 7시 '14분'과 같이 분 단위까지 세세하게 계획하십니다. 이는 한 장소에 안주하거나 편안함을 추구하기보다는, 자신을 벗어나 항상 즉시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한 준비된 삶을 강조해 오신 신부님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모습입니다. 최근에는 신부님의 뛰어난 칼리그라피 작품이 수도원을 장식하고 있으며, 칼리그라피로 손수 적은 좋은 글귀가 담긴 재활용 종이가방이나 달력 등을 선물하는 습관이 있어 이를 받는 이들이 기뻐하고 있다고 합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응원봉 든 신부

응원봉 든 신부가 전한 형제애, '한남동 수도원'에서 피어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형제들은 겸손한 자세로 세상과 동행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삶 속에서 구체화하기 위해 다양한 봉사 활동에 참여하고, 사회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서울의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밤, 희 눈으로 덮히는 차가운 도로 위에는 시민들이 우산과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침묵 속에 외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검은 수도복을 입은 한 수사가 집회 인파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의 손에는 수사가 들기에는 낯설고도 익숙한 물건이 들려 있었습니다. 방탄소년단의 응원봉, '아미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드럽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오세요." 그의 행보는 평소에는 수도자 외 출입이 제한된 봉쇄구역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수도원은 추위와 피로에 지친 시위대를 위해 기꺼이 휴식 공간과 화장실을 개방했습니다. 이는 차가운 사회 속에서 형제애와 연대의 따뜻함을 건네는 행위였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작은 형제들이 세상과 함께 걸으며 보여준 사랑의 실천은, 신앙을 삶 속에서 구체화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를 통해,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웠는데요.

아미밤 응원봉을 손에 든 검은 옷의 수사님과 그를 뒤따르는 시민들의 모습은 진풍경이었습니다. 현대의 상징과 전통의 만남이었고, 젊은 세대와 신앙 공동체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걸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조용한 선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날의 수도원 개방은 세상과의 경계, 그리고 차가운 벽들을 허물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 날의 작은 빛은 추위 속에서 더욱 갇힌 많은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에 빛을 비추었고, 세상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여지가 여전히 존재함을 속삭였던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날, 눈 덮인 거리 위로 이어진 그 작은 빛의 행렬은 아마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꺼지지 않을 등불로 남을 것입니다.

난방 성당

 

'난방 성당' 푯말을 붙힌 성당

겨울의 차가운 숨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을 때, 저마다의 고뇌와 시위의 외침이 밤을 가로지르던 어느 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작고 소박한 글귀를 내걸었습니다. '난방 성당' 이라는 짧은 문구에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으려는 깊은 신념이 깃들어 있는 듯 했습니다. 수도원은 남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노동자든, 시민이든, 혹은 추위에 지친 나그네든, 문턱을 넘는 이들은 모두 따스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수도회에서 제공된 것은 손에 덥썩 쥐어주는 무언가가 아니었지만, 그곳은 마음의 쉼표였고, 상처받은 영혼에게 속삭이는 작은 위로였을 것입니다. 수도원의 기도실과 휴식 공간, 그리고 불빛 아래 흘러나오던 기도는 냉혹한 세상 속에서 숨 쉴 틈을 제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당이 품은 그 온기는 추운 겨울날의 '난로'처럼 따스하고, 길 잃은 영혼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대통령 관저 앞에서 차가운 돌바닥 위에 앉아있던 노동자와 시민들, 그들의 피곤한 어깨를 받아준 것은 따뜻한 수도원 공간이면서도 꼰벤뚜알 작은 형제들이 지닌 '형제애의 손길'이었습니다. 헤아려 보면, 난방 성당은 세상과 화해하려는 노력의 표현이었고,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조용한 저항이었을지 모릅니다. 수도원에서 말없이 증명한 것이 있다면, 신앙이란 수도원 담장안에서 기도에 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이 겪는 곤란에 다가가고 그 고통을 나누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날 밤, 수도원의 작은 등불은 겨울 하늘 아래 그토록 밝게 빛났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포기하지 말라고 속삭이는 듯한 난방성당은, 희망이 없어보이는 현실과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이었을 것입니다. 그 빛은 분명 그곳을 지나던 이들의 가슴에도 하나의 빛을 남겼을 것입니다.

 

 

한남동 수도원 피정의집, 낮은 자세로 세상과 동행하는 형제들

난방 성당 어느성당

시민들에 감사 인사를 전하다

수도원을 개방하여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한 다음날 아침, 시민들은 수도원 앞의 미끄러운 눈길을 함께 치우기 시작했습니다.그들의 손끝에는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도원이 추운 밤 동안 시민들에게 휴식과 온기를 제공한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습니다. 그날의 풍경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선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후원 계좌가 공유되면서 많은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이어졌고, 뜻밖의 후원과 응원의 메시지들이 쏟아졌습니다. 이에 한 소속 사제는 짧은 SNS에 감사인사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형제들은 낮은 자세로 세상과 동행하며, 사랑과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현대에 맞추어 구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겸손한 헌신은 사회에 따뜻한 빛을 비추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 사제께서는 수도원 개방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고 있지만, '꼰벤뚜알'이라는 이름도 어렵고,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겸손과 사랑의 정신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현대에 구현하고 있는 수도회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지속적인 희망과 용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형제들의 헌신과 사랑을 통해 세상에 이러한 미담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수도회가 어떻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낮은 곳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형제애를 널리 전하며 세상의 빛처럼 조용히 타오르며, 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건넬 수 있길 두손모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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