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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성인(아씨시), 프란치스칸 삶에서의 가치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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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성인(아씨시), 프란치스칸 삶에서의 가치기준

by 필로테아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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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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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의 삶에서의 「가치기준」

 

 

무엇을 '잘해야 한다'는 기준이 없을 때 자유롭다.

'잘해야 한다'는 가치기준이 없는 기준을 「절대기준(무;無)기준)」이라고 한다. 이 절대기준을 무(無)라고 하지만 이것을 극단적으로 표시된 곳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어떠한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은 기준은 참 좋으며 그 때부터 해방 된다.

 모든 가치기준을 버리는 것, 그것이 존재, 그리스도이다. 기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가치기준이 없어진 그것, 거기에는 모든 것이 녹아 들어간다. 무(無)기준이 가지고 있는 행복이 무엇인가 느낌이 오는가? '이래야 된다'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 희생자이고, 그 올가미에서 벗겨주는 사람이 '그리스도'이시다.

 

프란치스코는 십자가에 못박힌 세라핌 천사를 신비적으로 목격하고 그의 몸에 그리스도 수난의 상처를 받았다

 

얽매는 것 : Caro

 내 아이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그 가치관이 없어진 그것이 하느님, 선(善:착할 선), 가난이다. 그 안에 보물이 많다. 성 프란치스코는 매일 떠났는데 우리는 한시도 못 떠난다. 한시도 떠나지 못하게 나를 얽어매는 것이 'Caro'이다. 그것을 놓아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내 배우자, 내 아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가치기준'이다.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는 방법은 첫째, 내 안에 '공부 잘하길 바라는' 맺혀 있는 것을 바라보라. 바라 볼 여유도 없이 현실에 끌려서 살면서 나와 동일시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무(無)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두 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과 나의 'Caro'를 바라보는 협조가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지상적인 것에 의지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가치기준을 버리면 죽을 것 같다. 그것이 어두움이다. 내 말의 흐름을 볼 때 그 어두움을 통과해야 될까? 후퇴해야 될까? 뽑힌 자는 어두움을 통과한다. 그 어두움을 통과할 힘을 내는 자는 ‘믿는 사람’ 이다. 거의 모두 기도중 시도는 했지만, 하고나서 금방 어떠한 빛이 오기를 바란다. 그 어두움은 죽을 것 같이 만신창이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이 믿어지면 힘을 내서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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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 형제여, 창조주를 찬양하고 그를 사랑하라 하시니 날개를 달아주셨군요. 우주와 하늘, 그리고 자유를 형제에게"

견디는 것: sustinere

성 프란치스코의 사상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견딘다(sustinere)’ 이다. 나는 무언가를 잘해서 잘난 것이 아니라 못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잘난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달라야 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특히 공동생활에 많이 있다. 철근 같은 뿌리가 박혀 있음을 느낀다면 그리스도의 무(無)가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박힌 뿌리를 사라지게 한다. 좀 더 대표하는 것이 빵(성체)이다. “이는 내 몸이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치기준을 산산조각 낸다. 먼저 나의 'Caro'의 실체를 인정하고 나를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구원이 이루어진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불행하게 만드는 '어떠한 기준'을 절대 가치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없이 그냥 살면 행복하고 평화롭다. 그것이 없을 무(無)기준이다. 못난 사람이 똑똑하다.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 가치기준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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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전능하시고 지극히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으시며 으뜸이신 하느님,

 모든 선이시고 으뜸선이시고 온전한 선이시며, 홀로 선 하신 당신께,

모든 찬미와 모든 영광과 모든 감사와 모든 영예와 모든 찬양과

그리고 모든 좋은 것을 돌려드리나이다.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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