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11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연중 제6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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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11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연중 제6주일

by 필로테아 2024.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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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1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연중 제6주일

(세계 병자의 날)

 

오늘은 연중 제6주일이며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1858년 2월 11일부터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프랑스 루르드 근처의 마사비엘 동굴에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여러 차례 발현하셨습니다. 어린아이를 통하여 성모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셨고, 교회에서는 기도와 사랑의 놀라운 정신, 특히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도우려는 열정을 일으키셨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분리시키는 죄악에서 건져 주시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차별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우리는 나병 환자의 얼굴에서 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에 협력하면서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자비를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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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1일 주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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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13,1-2.44-46

 

1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44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46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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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0,31─11,1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3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환자를 만나고 있는 사진
앓는 이들을 만나는 프란치스코 교황 (바티칸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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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라고 씌인 배너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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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서 나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져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º레위 13장 참조). 그래서 그들은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나병 환자들은 예루살렘과 다른 성곽 도시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사회 공동체에서 배제되었고, 이러한 배제는 그들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아픈 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를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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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자비는 나병 환자의 몸뿐만 아니라 그 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져 주십니다. "º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제에게 치유 사실을 인정받고,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라는(º레위 14,2-32 참 조)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배척하는 자들이 없으니 공 동체로 돌아가도 된다.'는 뜻으로 나병 환자의 마음에 난 상처를 낫게 하는 따뜻한 위로로 들립니다. 몸의 병은 마음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오랜 병고로 고통받은 이들은 마음도 함께 약해져 있기에 병자들의 마음도 치유되도록 함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거동이 불편한 병자와 장애인들이 루르드 성모 발현 성지를 순례하도록 함께하여 주는 단체(ºUNITALSI)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붕을 떼고 중풍 병자를 내려 준 사람들의 마음으로(마르 2.4 참조) 병자들의 루르드 순례에 함께 하는 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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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순례를 통하여 병자들의 내 면이 치유되는 수많은 체험을 합니다. 병자들은 순례 가운데 자신과 함께하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고, 공동체의 사랑을 느끼면서 마음의 상처가 낫는 기적을 체험한다고 합니다. 병고에 시 달리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치유되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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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너(김찬선)

 

오늘 복음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와서 치유를 청해 치유받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나병 환자와 주님 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나병 환자를 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대단한 사람이고, 오늘 얘기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우선 그의 신앙 고백이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주님 능력에 대한 믿음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일뿐 아니라 하시고자 하는 의향도 있으신 분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 선의가 없으신 분,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다면 주님께 나왔겠습니까? 애초에 주님께 나아오지 않았겠지요.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나병 환자가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이렇게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하고 그것을 어기고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면 사람들은 돌을 던져 죽일 수도 있었던 그런 사회 상황에서 그는 마치 겁이 없는 사람인 양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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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아온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직진한 겁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때 주님만 보고 걸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고, 물에 빠지지도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사실 오늘 나병 환자에게는 병의 치유보다 두려움의 치유가 더 중요하고 값진 것이었을 겁니다. 육신의 치유보다 마음과 정신의 치유가 더 값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제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육신의 병, 마음의 병, 정신병, 영혼의 병 곧 마귀 병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또는 선택의 순서를 정하라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순서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육신의 병을 선택할 것이고, 그다음이 마음의 병이요, 정신병과 마귀 병이 그 다음 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병 환자가 이렇게 겁이 없이 나아올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지만 그의 믿음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에 '믿음직한 사람이니', '믿음이 가는 사람이니', '믿음을 주는 사람이니' 하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는 분이십니다. 병자에 대한 구약의 그 차별과 격리와 단절의 법과 관습을 타파하시는 구별과 차별이 없는 주님의 사랑 곧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와 빛을 주신다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주님의 파격적 가르침과 실천이 믿음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세 번째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들은 숨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과 같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병 환자가 주님께 나아올 때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병 환자를 피하거나 불평하지 않았고 아마 환대했을 겁니다. 오늘 병자의 날인데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면 병자들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을 뿐 아니라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듯 병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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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너(이수철)

 

 삶의 목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

 

“당신은 내 피신처(避身處) 시니, 구원의 기쁨으로 나를 휘감아 주시나이다.”(시편 32,7)

오늘 화답송 후렴 고백이 위로와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주님은 우리의 피신처가 되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성 이네네오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우리 믿는 이들 삶의 목표이자 삶의 의미요 삶의 잣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거창하거나 비상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성규 57,9) 수도원 정문을 들어서며 커다란 바위판에 새겨진 글자가 선명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우리 분도수도회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의 영광이 바로 우리 삶의 모두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하느님의 영광이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오로의 전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일 때 저절로 주님의 위로와 치유의 구원도 뒤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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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겠습니까?

첫째, 주님만을 찾는 삶입니다. 우리의 모든 결핍된 상황이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가 그 모범입니다.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바 결핍된 우리 인간입니다. 바로 나병환자의 간절한 기도와 믿음은 주님을 찾는 갈망의 표현입니다. 고립단절된 지옥같은 환경의 삶에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바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악성 피부병 역시 나병이었을 것입니다. 따로 격리되어 혼자 살아야 하는 그 상황이 바로 지옥입니다. 아마 복음의 나병환자도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의 나병환자가 있었겠는지요.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는 복음의 나병환자 하나였습니다. 비단 육신의 나병환자만이 아닙니다. 고립단절의 자폐적 삶을 자초해 사는 이들 역시 영적 나병환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어져 연결되면 살고 끊어져 단절되면 죽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소통해야 비로소 탈출의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터치할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무릎을 꿇은 나병환자의 간절한 믿음의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에 대해 주님은 치유로 응답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도 예수님의 삼박자 치유의 구원이 분명해집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사랑의 터치, 권능의 말씀에 의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나병이 가시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환히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바로 치유의 구원을 통해 환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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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삶을 사십시오. 이웃의 기쁨이 나의 기쁨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닌 이웃 중심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자기실현은 역설적으로 이웃을 위한 삶을 살 때 이루어집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영광이 환히 드러나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온통 그러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삶에 전념하셨던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주님을 닮으며 노력했던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입니다.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의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항상 기뻐하라’(1 테살 5,16)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기쁨으로 빛나는 삶은 바로 하느님 영광으로 빛나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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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복음선포의 적극적 삶입니다. 치유받은 나병환자의 응답이 바로 복음선포의 적극적 삶이었습니다.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전 삶으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런 적극적 복음선포의 삶이 우리의 영육을 건강하게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처신이 주목됩니다. 바로 많은 이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자 지체 없이 물러나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십니다. 결코 세상 인기의 유혹에 빠질 주님이 아니십니다. '공성이 불거(功成而不居)'라 공을 이룬 후 사라짐으로 하느님의 영광만 환히 드러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외딴곳에 머물러 내적으로 충전시키는 일 역시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우리 삶의 목표이자 의미입니다. 항구히 간절히 주님을 찾으십시오.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십시오. 적극적 복음선포의 삶을 사십시오.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구체적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영광이 환히 드러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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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너(빠다킹)

1989년 조지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테서가 이끄는 사회심리학 연구팀은 11세에서 14세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에게 텔레비전 채널 선택이나 숙제하는 시간 등과 관련된 모든 의견대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모와 의견대립이 많은 청소년이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더 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와의 의견대립에 대해 열린 관점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 가능했습니다. 종종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서 전혀 대화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친한 친구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심하게 싸웠고 역시 기도만 하면서 이 친구와 예전 관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과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길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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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든 강도는 창구 여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천만 원 내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천만 원을 내주거나, 아니면 몰래 비상벨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강도를 바라보며, "천만 원은 왜요?"라고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 말에서 강도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강도는 총을 내려놓고 지금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직원은 은행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천만 원 내놔!"라는 말에서 대화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하고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데, 왜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주님과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병은 무서운 병으로, 공동체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곁에 갈 수 없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 나병 환자를 내쳤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온 사람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만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낫게 하셔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이런 겸손한 모습보다는 맡긴 것을 찾는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라며 주님께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겸손, 그래야 주님과도 또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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