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월4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24) 2024년 2월 4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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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월4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24) 2024년 2월 4일 주일

by 필로테아 2024.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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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4일 주일

(연중 제5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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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고통을 겪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십니다. 성자의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에 그들을 결합시키기고 굳건한 믿음과 한결같은 사랑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복음의 정신을 심어 주시기를 청하며 독서와 복음을 묵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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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오늘의묵상
2월4일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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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나는 고통스러워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 욥기의 말씀입니다.7,1-4.6-7
욥이 말하였다.
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4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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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미사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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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23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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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4일 주일미사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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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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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고통스럽고 수고스러운 우리의 삶을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제1독서에서 시련에 부딪힌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임을 선언하며 비탄에 잠겨 있습니다.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루는 노고와 현신으로 가득 찬 우리의 하루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며 허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이 고역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던져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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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의무"라고 여기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따로 "삯을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받는 "삯"이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에게 주어진 무거운 의무를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불행하게 되는 행복의 원천으로 여깁니다. 삶은 우리가 반드시 살아 내야 하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같습니다. 이 의무에는 어려움과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이면에는 기쁨과 행복이 자리합니다. 삶이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기에, 산다는 것은 그자체로 우리에게 선물이자 보상이 됩니다. 삶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 이웃과 주고받는 따뜻한 사랑, 세상의 아름다운 인물들과 아름다운 사건들은 삶이 주는 행복이고, 이 행복은 수고스러운 삶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과 같은 "삯"일지도 모르겠습니다.-우리는 반드시 이 삶 속에서, 이 삶을 통해서만 행복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평범함에서 나오는 특별함

평범함에서 나오는 특별함 -조명연신부-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몇 년 뒤라는 자막이 보이면서 새로운 화면이 나오곤 합니다. 그 몇 년 동안을 잘 지냈는지 성공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았는지 남들에게 위로를 받는 불쌍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 몇 년이 사람의 모습을 과거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이러한 구성에 대해 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럴 수 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모습을 한번 천천히 바라보십시오. 지금 모습은 몇 년 뒤에 어떻게 될까요? 남들의 부러움을 받을 만큼 잘 될까요? 아니면 엉망진창이 되어서 사람들의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받게 될까요? 그 몇 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분명하게 결정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게 그 몇 년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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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은 틀려먹었어. 지금의 상황은 바뀌지 않아."

남의 몇 년이 변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몇 년 역시 변화 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멋지게 변화시킬 몇 년이 있음을 그리고 그 몇 년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사랑이신 주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그 몇 년을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따라서 무엇이 무서울까요? 또 무엇이 걸림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습니다. 이 시몬의 장모 모습처럼 많은 이들도 세상의 각종 문제로 힘들어합니다. 제1독서의 욥이 말하는 것처럼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을지도 모릅니다.(욥 7,1 참조) 그래서 나의 나날이 희망 없이 사라져가고,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 같기도 합니다.(욥 7,6.7 참조)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몬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시게 됩니다. 즉, 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힘만으로는 지금 이 순간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습니다. 밤새 병자를 고쳐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도 새벽에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마르 1,35 참조). 기도는 특별할 때에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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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우리에게 선물로 줍니다. 종종 18년째 새벽 묵상 글을 써오고 있는 저를 향해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그러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밥을 먹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져봅니다. 모두가 당연하지요. 안 먹으면 살 수 없으니까요 라고 대답하십니다. 이에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하고 묵상 글을 쓰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밥 먹는 것이 특별하지 않은 것처럼, 묵상 글 쓰는 것도 특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평범한 일상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함도 꾸준히 하니까 특별함이 나오나 봐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평범한 일상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특별함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을 잡으신 분은 결코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시몬의 장모가 주님 곁에 시중을 들었던 것처럼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기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꾸준한 기도를 통해 주님의 손을 잡을 수가 있었고, 그는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코린 9,16) 지금 자신이 주님의 손을 잡고 있는지를 떠올려보셨으면 합니다. 그 방법은 오로지 평범한 일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꾸준한 기도밖에 없습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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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괴로움이 되지 않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다.” 고통과 불행 오늘 연중 제5주일은 고통과 불행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은 곧 불행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갑니다. 불교는 고통과 불행은 다 자업자득 곧 자기 업보이기에 누가 어떻게 구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업보를 끊어 소멸해야 하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업보를 쌓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하고, 고집멸도의 길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조금 더 풀어 얘기하면 온갖 욕심과 집착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달아 고통에서 벗어나고 열반에 도달하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불교의 이런 가르침은 자기 아닌 누구에게 고통의 탓이나 원인을 돌리거나 고통을 누구에게 의지하여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탁월합니다. 사실 고통이란 자업자득인 면이 큽니다. 고통이란 우리말로 풀이하면 괴로움과 아픔인데 아픔/통증은 아픔일 뿐 아직 괴로움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행무상하고 제법무아하며 일체개고의 이치를 인정하지 않고, ‘왜 고통이?’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왜 내게만 고통이?’라고 거부의식을 가지는 순간 아픔은 괴로움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니까 온갖 질병이 육체적인 아픔과 통증이라면 고통과 괴로움은 마음 곧 심리적인 통증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일체유심조 곧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임을 깨닫고 그러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렸음을 깨달으면 아픔이 괴로움으로 발전하고 고통이 불행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괴롭지 않고 불행하지 않는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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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도 가르치고 그러니 이 세상에선 영원을 찾지 말고 저세상에서 영원을 찾으라고,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모두 행복을 주실 하느님 안에서 만족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대 데레사도 이렇게 기도하지요.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그리고 이 하느님은 네 고통과 행복은 네가 해결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에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똑같은 고통을 당하시며, 당신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시는 분이시고,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 온갖 병고에 시달리는 이를 찾아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신과 마음의 병만 고쳐주시는 분이 아니고,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까지 고쳐주시는 분이시며, 이 치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구원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치유가 목적이 아니고 언제나 구원이 목적입니다. 사실 치유가 목적이라면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치유해주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친히 말씀하셨듯 나병 환자가 많았어도 나아만만 치유해주셨고, 과부가 많았어도 사렙다 마을의 과부만 구해주셨습니다. 아무튼 주님을 믿는 우리는 아픔이 괴로움이 되고 괴로움이 불행이 되는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을 통해 구원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안에 평화를 빕니다. (OFM,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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