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5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월요일 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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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5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월요일 복음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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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5일 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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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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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키려다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249-251년) 때 그를 차지하려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제1독서

계약 궤를 지성소 안에 들여다 놓았다.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8,1-7.9-13

그 무렵

1 솔로몬은 주님의 계약 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모시고 올라오려고,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하였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에타님 달, 곧 일곱째 달의 축제 때에
솔로몬 임금 앞으로 모였다.
3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가 도착하자 사제들이 궤를 메었다.
4 그들은 주님의 궤뿐 아니라
만남의 천막과 그 천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물들도 모두 가지고 올라갔는데,
사제와 레위인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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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솔로몬 임금과 그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함께 궤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바쳤다.
6 그러고 나서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제자리에,
곧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들여다 놓았다.


7 커룹들은 궤가 있는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 궤와 채를 덮었다.
9 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12 그때 솔로몬이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3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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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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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은 초대 교회의 대표적인 동정 순교자인 성녀 아가타를 기념합니다. 성녀는 시칠리아섬 출신으로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는 삶에 매료되었고, 열다섯 살 때 카타니 아의 주교 앞에서 공적으로 동정 서원을 하였습니다. 성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에 체포되어 지방 총독 퀸티아누스 앞으로 끌려갔는데, 이때 총독은 아가타의 아름다운 용모에 사로잡혀 성녀를 소유하려고 하였습니다.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성녀가 끝까지 이를 거절하 자, 총독은 성녀를 향락에 젖게 하려고 아프로디시아라는 창녀에게 보냈습니다. 그 방법으로도 하느님에 대한 성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자, 무자비하 게 고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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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를 잡아 늘이고, 쇠로 만든 갈퀴로 몸을 찢고, 불에 지 지며 마지막에는 큰 집게로 성녀의 가슴을 뜯어냈습니다. 그래서 성화에서 성녀는 두 가슴이 놓인 접시와 집게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감옥으로 보내진 성녀에게 아이 모습을 한 천사와 함께 베드로가 나타나 상처를 치료하여 주었습니다. 총독은 성녀의 상처가 다 나은 것을 보고 분노하며 그를 뜨거운 석탄불 위에서 태워 죽였다고 전합니다. 아가타가 재판 때에 축성된 동정녀임을 드러내려고 종들이 입던 흰옷을 입고 나타나자 총독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자유롭고 고귀하다면 어찌하여 종처럼 행동합니까?" 이에 성녀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최고의 귀족은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세속적으로 고귀하고 높은 지위가 보장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고 고귀 한 삶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신앙 안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돌 아보고, 성녀와 같이 영원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합시다. (최정훈 바오로신부)

 

 

 

 

"얼마나 매달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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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제가 불랙 리스트에 올라 중국에 갈 수 없고 그래서 이곳에 와 있는 이주민들을 위한 선교를 하지만 전에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종종 만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아는 지하교회 신부님을 만나러 갔는데 그분이 미사 중에 공안에 끌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베드로 사도가 붙잡혀 감옥에 갇혀있을 때 신자들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한 것처럼 저도 그곳 신자들과 신부님이 풀려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고 한밤중에 마침내 신부님이 풀려나는 뜨거운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은 아직도 이렇게 옛날 우리 박해시대 때처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들과 함께 미사 드리거나 그들에게 강론하면 통역을 두고 하는데도 그들의 뜨거운 열기가 느껴져 제가 그들에게 뭘 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너무도 귀한 것을 많이 받고 돌아옵니다. 그날도 그들과 밤새도록 기도하고 신앙 대화를 나눈 뒤 떠나기 전에 강복을 주는데 신자들이 모두 흙바닥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어서 놀랐고 모두 저의 바짓자락을 붙잡아서 더더욱 놀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신자 중에 이렇게 강복을 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제가 그리 소중하지도 않고 사제를 그리 존중하지도 않잖습니까? 그리고 강복도 그야말로 흔해 빠진 강복이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중국의 지하교회 신자들은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저 부모로부터 이어온 지식과 전통에 의지해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렇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강복 때 사제의 바짓자락을 붙잡는 행위도 그런 그들의 전통과 열성의 표현 중 하나이지요. 그리고 이 전통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붙잡으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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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한 고을을 찾아가시고, 그러면 사람들이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도 한곳에 편히 머물지 않으시고 계속 이 고을 저 고을로 병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주님께 병자들도 몰려듭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산과 내를 건너서 오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찾아가는 것은 우리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열성입니다. 아니, 열성 이전에 절실함입니다. '주님, 당신이 없으면 저는 안 됩니다.'라는 절실함입니다. 그런데 이 열성과 절실함은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열성과 절실함이 우리에게 없어도 우리를 치유해주실 분이지만 우린 이 열성과 절실함이 있어야만 주님의 치유에 충실하고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인 의사에게 갈 때도 이런 충실함과 집중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 아니면 의사가 없냐는 태도로 가면 의사의 처방과 치료에 충실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때 치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붙잡는 행위는 이 열성과 절실함의 표시이고,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병자들과 중국 지하교회 신자들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 당신 없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며 주님을 붙잡고 주님께 매달립니까?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받았다.'(OFM,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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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던 중, 주위 풍경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자동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차 바퀴가 헛돌 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장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는 들판에 있는 나이 많은 노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이 늙은 노새가 과연 그 무거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노새는 한 마리인데 왜 다른 이름을 불렀습니까?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러 개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웃으며 말했지요. '아니요.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 혼자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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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한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힘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지금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병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혼자서 오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병이 죄의 결과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복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함께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에 구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함께하고 있을까요?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까? 누구는 자기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함께하지 않는 곳에서 과연 진정한 믿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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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주님의 가정 공동체"

"중심/ 질서 /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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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알게 모르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원형이 가정 공동체입니다. 가정공동체가 건강해야 몸담고 있는 개인도 건강하고 나라도 건강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참 좋은 가정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참 좋은 주님의 가정 공동체-중심, 질서, 건강';입니다. 가정 공동체의 중심에 반드시, 필히 주님께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중심이 될 때 가정 공동체는 질서가 잡히고 가정의 형제자매들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와 복음 말씀은 주님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 가정 공동체의 형성 과정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서두 말씀은 도저히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혼돈 상태의 세상을 보여 줍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 이런 혼돈 상태에서 우리 삶의 중심이신 하느님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참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인류 가정 공동체의 품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질서있게 시작되는 창조의 이야기가 나흘 간에 걸쳐 전개됩니다. 하느님이 말씀하시자 그대로 순조롭게 진행됩니다. 혼돈의 상태에서 질서있게 창조될 때마다 후렴처럼 꼭 되풀이 되는 말씀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새삼 우리의 모든 행위의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 보시기 좋은가?' 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창세기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오직 하느님 한분만이 계시고, 그분은 전적으로 좋은 분이시며, 그분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시며, 그분이 창조하시고 행하시는 모든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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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으로 혼돈의 세상을 질서있는 창조의 과정을 통해 지구를 인간이 살 수 있는 참 좋은 보금 자리 가정의 품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질서있는 가정 공동체가 참으로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건강한 가정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온 세상이 하나의 가정 공동체입니다. 지구는 '하나의 집이자 가정'이요 모든 인류는 한 가족이 됩니다. 이런 깊고 넓은 하느님의 시야와 비전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집이자 가정인 교회나 수도원은 외롭고 가난한 이들은 물론 온 인류의 집이자 가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이런 시야의 모범입니다. '집(House)'은 있어도 '가정(Home)'은 없는 세상이라 합니다. 가정은 커녕 '가정도 집도 없는 사람homeless'도 참 많습니다. 가정이라 해도 1인가구가 30%에 육박하는 세상이니 가정이라 일컫기도 거북합니다. 또 함께 산다해도 불안하고 위태한 가정은 얼마나 많은지요. 결손 가정의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니 대부분 사람들이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참 좋은 가정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서는 가정 공동체의 중심에 주님이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치유와 더불어 질서가 잡힐 때 비로소 건강한 개인이요 가정 공동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말그대로 참 좋은 주님의 가정 공동체를 위해서는 주님 중심에 질서가 잡힌 건강한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중심-질서-건강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반대로 중심이 없으면 무질서의 혼돈에 저절로 심신心身도 병들어 건강을 잃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창조하시는 모습입니다. 참으로 혼돈 상태의 세상에 예수님이 중심이 되시어 질서있는 건강한 이들의 가정 공동체로 만들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흡사 복음의 장면이 예수님 중심으로 병든 인류가 새롭게 질서잡힌 건강한 가정공동체로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신바람 나는 장면인지 복음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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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대로 혼돈의 세상을 질서있는 인류가정공동체로 창조하시는 창세기의 하느님의 모습을 예수님을 통해 봅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인간현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온갖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지요. 특히 노년에는 병마病魔와의 싸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 지요.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희랍어 말마디'에소존토(esozonto)'란 뜻이 심오합니다. 육신의 치유이상으로 초대 교회에서는 온전한 영육의 전인적 구원체험을 뜻했습니다. 단지'좋아짐(Wellness)'만이 아닌 '온전해짐(Wholeness)'을 뜻했으니 다른 말로 하면 '가정으로의 귀환(Coming home)'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가정공동체로의 귀환에 온전한 치유의 구원임을 말해 줍니다. 하여 이 거룩한 미사가 그리도 고맙고 귀한 것입니다.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중심의 질서있는 건강한 가정 공동체로 건설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성혈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됨으로 주님의 한 가족이 되고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물받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수도원을 명실상부한 주님의 집이자 주님의 참 좋은 가정 공동체로 만들어 줍니다. 참 좋은 주님 중심의 가정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세상의 오아시스같은 참 넓은 품의 환대와 치유의 주님의 수도가정 공동체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 거주하는 수도형제들뿐 아니라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이 주님의 수도가정공동체에 속해 있다 봅니다. 수도원을 찾는 많은 분들은 고향집에 온 것 같이, 친정집에 온 것 같이 편안하다 고백합니다. 피정오는 분들 역시 주님의 한 가정공동체를 체험케 해주는 환대와 치유의 수도가정공동체입니다. 사막같은 세상에 이런 오아시스 같은 주님의 집이자 주님의 가정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의 기적인지요. 이런 수도원 같은 주님 중심의 환대와 치유의 공동체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지요. 바로 하늘나라 수도가정 공동체, 하느님이 세상에 주신 참 좋은 선물이자 수도원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끊임없이 우리 수도원을 세상에 활짝 열린 당신 중심의 환대와 치유의 하늘나라 오아시스 가정공동체로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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