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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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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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일을 맞아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죄인들에게 외아드님을 아낌없이 내주신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외아드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외아드님의 모습으로 변하여, 영광의 빛을 누리도록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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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2024년 2월 25일 제1독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2,1-2.9ㄱ. 10-13.15-18

그 무렵 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9 그들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11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5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불러 16 말하였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17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18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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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제2독서

2024년 2월 25일 매일미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1ㄴ-34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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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5일 주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복음

2월24일 가족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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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10

그 무렵 2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3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6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7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8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10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2월 25일 주일미사 일요일 사순 제2주일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사악의 희생 제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사악을 바친 아브라함의 모습은 모든 이의 속죄를 위하여 번제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치신 하느님의 예표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따라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리게 됩니다. 당시 유다 민족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자신의 생명은 아들을 통하여 이어지고 지속됩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어서야 얻은 이사악은 그에게 있어서 새롭게 얻은 생명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생명이고, 자신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는 행위는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어려운 행위로써 자신의 생명을 멈추고 자신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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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친아드님”이자 “사랑하는 아들”을 속죄 제물로 내주셨고, 이는 당신 자신을 내주신 것과 같습니다. 아니, 서로가 서로에게 중심이 되고 다른 위격이 자신보다 더 중요해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할 때, 사실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자신은 아무 위험 없이 몰래 숨어 계시면서 대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모시는 무자비하시고 비겁하신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당신과 똑같은, 당신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과 함께 몸소 고통을 겪으시고 희생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당신 스스로 직접 희생하셨다는 것이 다른 종교의 신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입니다. 상처 하나 없이 하늘의 권세로 우리를 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상처투성이의 하느님이십니다. 교회도 아버지를 닮아 세상에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 길에서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창세 22,1-2). 아무리 시험이라고 해도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너무 가혹하다. 차라리 자신을 바치라고 하셨으면 따르기 훨씬 쉬웠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당시는 어린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나쁜 풍습이 있었다고 하니 자신을 부르신 하느님도 그런 포악한 다른 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을 거다. 게다가 후손들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이 이어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신의 생명도 이제 다 끝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그런 명령에 아브라함은 거부도 불평도 질문도 아무 말이 없다. 그의 무거운 침묵은 그의 혼란과 갈등 그리고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대변하는 것 같다. 어둠 그 자체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런 어둠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따른다. 이런 것이 믿음인 것 같다. 외아들까지 죽이는 봉헌이 아니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보통 믿으면 모든 게 환해질 거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사실은 그 반대다. 믿음은 캄캄하다. 남자의 도움 없는 잉태, 하느님이 죄인으로 사형되고, 또 그것을 통해 죄인이 용서받음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나. 죄인을 구하기 위해 외아들을 내어주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겠나.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없다. 단지 믿을 뿐이다. 외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줄 정도로 나를 사랑하고 내가 당신께 돌아오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라신다고 믿는다. 산에서 예수님이 새하얗게 변모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르 9,5).” 성경은 베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랬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게 그의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본심이었을지 모른다. 거친 세상살이를 뒤로하고, 삶의 모든 과정 생략하고 황홀경 속에 있고 싶은 바람이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이 마약이나 다른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세상사 저절로 되는 것은 죄밖에 없다.

  감기도 앓을 만큼 앓아야 낫는다. 과정 없는 결과는 사기밖에 없다. 결과는 과정 안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 비록 나쁜 이들의 농간으로 이런 믿음이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 안에서는 이 믿음은 절대 어긋나지 않는다. 외아들을 바침이 아브라함에게는 힘겨운 시험이었지만 하느님께는 사실이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믿음의 보증은 없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9,9).” 제자들은 현실로,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그들에게는 그들이 겪어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함구의 약속을 지켰다. 소문을 냈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고, 믿었어도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님을 보고는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떠나갔을 것이다. 그들도 그랬으니까. 구세주 예수님의 진짜 모습은 그 산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부활하신 뒤에야 비로소 드러났다. 그분의 제자인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간다. 구원에 이르는 길, 하늘나라에 가는 길은 그 길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아브라함 정도는 아니어도 살면서 우리도 여러 면에서 믿음의 시련을 겪는다. 양심이 단련된다. 성당 안에서만, 기도 안에서만 뜨거움으로는 모자라도 많이 모자란다.

  외아들까지 내어주시는 하느님을 단단히 믿고,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따른다.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는 교회의 가르침, 일부 성직자 수도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에도 지금 우리 하느님은 옛날 그 하느님 그대로라고 믿는다. 나의 믿음은 어긋나지 않는다.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로마 8,34).”

예수님, 제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큰 인내가 필요합니다(로마 8,24-25). 인내는 버티는 힘이 아니라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시작하는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만 있으면 저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아멘. (이종훈 마캉리오 신부님 묵상,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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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순 제2주일의 두 독서는 두 아버지의 아들 봉헌을 얘기합니다. 두 아버지가 외아들을 아끼지 않고 봉헌하였다고 얘기합니다.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제1독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봉헌한 얘기이고, 제2독서 로마서는 성부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봉헌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순 제2주일은 당신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신 하느님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의 아들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바치라는 것이 진정 사순 제2주일의 주제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복음의 다음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언제 흔들입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믿음이 언제 필요합니까? 박해나 극심한 시련의 때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시련의 때에 믿음이 제일 많이 흔들리고 크게 흔들리지만 이때가 믿음이 더 필요한 때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이 평안할 땐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은 믿음도 굳이 필요치 않습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에서도 믿음이 약한 사람을 돌밭에 뿌려진 씨에 비유하시며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제자들처럼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잃게 될지도 모를 때,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없을 때, 그때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지금 비록 시련당하지만, 이때 믿음이 더 필요하고 시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수난 예고 때는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 하며 수난과 죽음은 빼놓고 듣고, 막상 수난이 닥치고 주님께서 확 돌아가시고 나면 절망감 때문에 부활에 관한 말씀은 빼놓고 들을 수 있는데 바로 그 절망의 때에 부활의 말씀을 상기하고 영광을 내다보라는 거지요. 오늘 본기도는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따르라고 명하셨으니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희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기뻐하게 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말이 ‘영혼의 눈을 맑게 하시어’입니다. 육신의 눈은 지금 죽음을 목도하지만 영혼의 눈은 불신과 의심과 절망으로 흐려지지 않고, 맑은 눈으로 부활을 내다보며 ‘부활 관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믿음의 눈은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맑은 눈으로 부활 관상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 OFM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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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의 아름다움은 전례의 아름다움이며 전례의 아름다움은 성무일도와 미사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도 참 아름다웠습니다.

1절만 소개합니다.

“어느덧 세월 흘러 봄이 돌아와 사십일 재계시기 다가왔으니, 교회의 신비로운 전통에 따라, 마음을 가다듬어 재계 지키세”   2005년 봄, 그러니까 19년 전 써놨던 시 두 편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9년 동안 어머니를 비롯해 3분의 형님이 돌아갔고 많은 사랑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월 흘러도 오랜만에 읽어보니 새롭습니다. 하나는 ‘한강을 건널 때마다’입니다. 이 때는 수도원 매각 문제로 참 어지러웠던 때이고, 힘들 때 좋은 시들은 구원의 빛처럼 저를 밝혔고 위로했고 자유롭게 했습니다.

밖으로는 임 기다리는 산처럼, 안으로는 임을 향해 흐르는 강처럼, “산처럼, 강처럼”, 그대로 산 같은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 수도자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어제는 꼬박 일 년 기다렸다 찾아온, 맨 먼저 피어난 영춘화(迎春化), 파스카의 봄꽃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 여러 지인들에게 전송했습니다. 또 하나는 “봄이 되었다”라는 시입니다.

사순시기 전례시기와 너무 잘 들어맞는 요즘의 계절, 봄입니다. 강 같은, 봄 같은 파스카의 주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전번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신 주님에 이어, 오늘 사순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입니다. 그래서 강론 제목은 “변모의 여정-날마다 거룩한 주님을 닮아가는-”이라 정했습니다. 그대로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성화의 여정과도 통합니다. 저는 여기서 잠시 다산과 맹자의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삶의 여정에 귀한 깨우침을 줍니다.

“살아온 세월을 맹신하면 축적한 내공이 편견이 된다. 일가견을 이룬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 - 다산

“어른이란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 맹자

아이가 상징하는 바, ‘겸손하고 지혜로운, 그리고 순수한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에 앞선 복음 내용이 중요합니다. 바로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로,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라는 내용으로 제자들은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많이 위축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이 같은 마음으로 스승이자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시 반발하던 베드로가 주님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호된 질책을 받았던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선물이 주님의 변모사건이요 제자들의 주님의 변모 체험입니다. 저는 어제 성가연습을 하면서도 흡사 오늘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이요, 날마다 주님을 닮아 거룩히 변모되어 가는 우리들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서 세 가지 주님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제자들이 결정적 순간, 때가 되었을 때 주님을 만나는 신비체험을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그렇고,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그렇습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보면 두 분간의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깊은 지 감동합니다.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이사악을 죽이려 했을 때 주님은 다급한 마음에 아브라함을 두 번씩이나 부르시고 그를 만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세 제자들 역시 참으로 주님께 온전히 신뢰와 사랑을 바쳤던 분들임이 분명합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그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이건 차별이나 편애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다른 제자들도 받아들였을 것이니, 세 제자들의 주님 사랑이 참으로 진실하고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확신에 넘친 고백도 그의 주님 사랑을 입증합니다.

둘째, “체험하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사되는 주님의 체험, 신비체험입니다. 이런 체험은 쟁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만났던, 체험했던 복음의 세 제자는 물론이고 창세기의 아브라함, 로마서의 사도 바오로 진짜 신비가 입니다. 진정 내적 힘도 이런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체험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새하얗게 빛나는 옷에, 엘리야와 모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한 제자들의 충격은 너무나 컸을 것입니다.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예수님은 두 승천한 인물과 영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런 신비체험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순수한 마음은 이해가 되나 큰 착각입니다. 결코 독점하거나 집착할 수 없는 선물 같은 신비체험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이런 내적신비체험은 세 제자들의 십자가의 여정에 샘솟는 힘의 원천이 됐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감사송이 제자들의 주님 변모 신비 체험의 진실을 환히 밝혀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그 거룩한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어,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나이다.” 제1독서 창세기 후반부에서 보다시피 아브라함의 주님과의 은밀한 내적체험은, 그의 평생 여정에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들으니 출산율 저하로 장차 나라의 명운까지 위협받는 우리의 박복(薄福)한 현실이 안타깝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바오로의 주님과 만남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도의 확신에 넘치는 살아 있는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너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백절불굴의 파스카의 믿음의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셋째, “들어라!”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들음의 경청입니다. 경청하는 이가 겸손한 이요 경청하는 이가 순종하는 이요, 경청하는 이가 추종하는 이입니다. 제자직의 필수 조건이 경청입니다. “아브라함아!” 부르심에 즉시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는 아브라함은 깨어 있는 사람이자 잘 듣는 경청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청은 그대로 순종에 직결됨을 봅니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순종은 우리 당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도, 후손에도 축복의 통로가 됨을 봅니다. 신비체험에 집착하는 제자들은 물론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당부 말씀도 들어라, 경청입니다.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끝났지만 제자들은 물론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십자가의 여정은, 주님을 닮아가는 변모의 여정은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 은총은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의 변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침 성무일도 찬미가 둘째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 마시고 흥청대던 경망한 행동 늦은 잠 육신쾌락 절제하면서, 흩어진 우리 마음 바로잡으며 엄격히 우리 자신 다스려보세.”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성베네딕도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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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3 졸업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과연 ‘나’ 같은 사람이 신부님이 될 수 있을까? 신부가 되기 위해 모인 천사 같은 신학생들 사이에서 악마 같은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뭐, 이런 고민이었습니다.

  입학 후 친구들과 산책하다가 너무 놀라서 나무 뒤에 숨은 적이 있었습니다. 수단 입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4학년부터 수단을 입습니다. 당시 신학생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수단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의 눈에는 모두 신부님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숨어 있는데, 깜짝 놀랄 말을 들었습니다.

  ‘욕’이었습니다. 쌍 ‘ㅅ’ 들어가는 말을 서슴지 않고 수단 입은 신부님들(당시에는 수단 입고 있으면 다 신부님으로 생각했음)이 막 하는 것이 아닙니까? 천사만 사는 곳, 좋은 말만 하고 사랑이 넘쳐나는 곳이 이곳 신학교라고 생각했는데, 첫날에 환상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후에 깨달았습니다. 이곳은 천사가 사는 곳이 아니라, 천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사는 곳임을 말이지요. 이런 깨달음 이후에 신학교가 좋아졌습니다. ‘나’ 같이 악한 사람도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성당 다닌다는 사람 왜 이래?’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아마 이분들 역시 성당 안의 사람이 모두 천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잘 생각해 보면, 천사만 있는 곳에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만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 곧 이 세상 삶을 마쳐야만 갈 수 있으니까요. 우리 교회 안에는 천사가 아닌, 천사가 되려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차별 없이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것이며, 부족함을 나누면서 완벽함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교회를 좋아할 수 있습니다. 천사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니기에 나 같은 사람도 교회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모습을 제자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엘리야와 모세가 있는 곳, 그래서 이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했고 베드로가 나서서 여기서 지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이 천사만 사는 곳이 될 수는 없지만, 천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늘어나면서 가장 좋아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의 뜻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 신부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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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사순시기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을 생각하는 이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데, 세상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에 주방 자매님이 안 계셔서 수사님 한 분이랑 밖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고 왔는데,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이 동네가 마치 비 오는 밤에 불야성 같았습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 내용에 집중하고 또 사순 시기 분위기를 느끼려고 노력하는데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주간이 다가와야 이제 그제야 체감이 확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가끔 이렇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저도 이렇게 쉽지 않은데 세상 안에서 사는 여러분들은 더 어려울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주일에 성당에 오셔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성처를 모시고 하는 것들이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우리 신앙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난 주일 사순 일주일을 지내면서 올해가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800주년이라고 말씀을 드렸었죠.그 주제로 상처에서 새로운 삶으로라는 것이라고도 그렇게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어느 과학자의 말을 빌어서 갑각류를 또 예로 들면서 상처가 바로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도 이야기했었죠. 노아의 홍수로서 이 세상이 물로 상처를 입었었는데 하느님의 개입으로 그것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례의 예표였음을 신약을 통해서 깨달았었죠. 이것은 또한 새로 태어나 즉 상처와 수난 뒤에 부활하시는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상처로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시고 새로운 삶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었죠.

오늘은 구약에서 아브라함을 보게 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울 만큼 하느님을 굳게 신뢰한 인물이죠.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때까지 자기가 이룬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모지의 광야로 터를 옮깁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서 하신 약속, 즉 자기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또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고, 마침내 바라고 바라던 아들 이사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그 이사악을 주셨던 하느님께서 다시 그를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길을 나섭니다.

  오늘 독서 말씀도 그렇고 또 성경을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모리아산에 도착할 때까지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침묵으로 순종하면서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그 사흘 길을 걸으면서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런 감정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사악을 얻고 기뻐했던 만큼, 아니 그보다 '더' 슬프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모르기 때문에 더욱더 순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잔을 거두어 주십사고 거듭 청하면서 그 사흘 길을 걸어가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에 '너는 내 아들'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바로 오늘 1독서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영화에서는 굉장히 많은 말을 하는 인물로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그 이유를 너무나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을 하는데 자신이 죄를 지어서 하느님께서 그러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라에게서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사라가 청한 것이었지만 사라의 여종인 하가르에게서 이스마엘을 얻게 된 것이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저지른 죄였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자책을 하면서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죠. 눈물을 호소하면서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응답을 들을 수 없었던 아브라함은 계속 모리아 산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사흘 동안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어느덧 그 산에 도착해서 이사악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이사악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다른 방법이 정말 없는 것인지 하느님께 여쭤보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사실 아브라함은 그 뜬눈으로 지낸 매일 밤 길을 걷는 그 여정의 매 순간마다 하느님께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대답은 침묵뿐이었다고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사악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냐고 묻고, 아브라함은 너는 죄가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재단에 내가 사랑하는 하나뿐인 내 아들을 눕혀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에 이사악은 자신은 제물이 되기는 싫지만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하면서 자신을 아버지 아브라함 손에 내어 맡깁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은 부분을 계속해서 영화로 만든 것인데, 아브라함이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는 모습과 자신을 하느님의 뜻대로 제물로 바치는 그 이삭의 모습이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의 모습과 오버랩이 됩니다. 실제로 영화는 아브라함의 그 에피소드 후에 바로 2천년 후에 골고타 산의 십자가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2독서의 내용입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하느님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의 아드님은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에서는 그 영광의 모습을 사도들에게 미리 보여주십니다. 노아의 홍수가 세례의 예표였다면, 이사악의 번제물은 하느님께서 외아드님을 제물로 내어주심에 그 사랑의 예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는 것' 그것은 참으로 커다란 상처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가는 그 사흘길이 죽음과 같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아브라함이 도망가지 않고 그 가시밭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믿고 희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이라는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서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도로 가져가신다고 하더라도 '다시 돌려주실 수 있다는 믿음', 그를 30배, 60배, 100배로 돌려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이유 하나는 바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자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사랑과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수난당하실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에 거룩하게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도 바로 그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수난과 상처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데는 바로 그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필요한 또 다른 중요한 하나는 바로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희망이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이 사순시기 동안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지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고 또 희망 안에서 다시 일어서고 이웃과 가족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박명진 요셉 신부님 미사 강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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