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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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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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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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제1독서

너는 주 너희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26,16-19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6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17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곧 주님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시고, 너희는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분의 규정과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는 것이다.

18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곧 주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분 소유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며,

19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2월 24일 복음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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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4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의 묵상
최정훈 신부님

복음은 어제에 이어서 율법의 의로움을 넘어서시고 율법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줍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레위 19,18 참조) 계명은 이웃의 경계를 원수와 악인까지 넓혀서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도 당신께 해를 끼친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루카 23,34 참조). 하느님께서 악인과 선인,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를 똑같이 돌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원수와 악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들의 악행과 죄를 용인하고 불의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악을 멈추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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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다면, 악인들이 죄악을 저지르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자녀가 잘못하였을 때 부모는 따끔하게 혼내고, 잘못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 알려 주며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게 합니다. 이것이 정말 올바른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악인들을 회개로 이끌고, 그들이 저지른 죄를 일깨워 주고, 죄의 결과에 대해서는 함께 용서를 구하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에 맡겨 드리는 것이 악인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악행에 마음 아파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은 그들의 회개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그들의 죄를 멈추게 하는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릴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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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를 무척 씁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려고 도무지 애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아닌 사람을 가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저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써야 할까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온 것에 반기를 들 듯이.

무슨 얘기냐 하면 원수를 만들어 놓고 사랑하려고 애쓰지 말고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아예 아무 관계를 맺지도, 누구와도 엮이지 말자는 뜻은 물론 아니고 누가 원수의 짓을 해와도 원수를 만들지 않겠다는 그런 뜻에서 말입니다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원수 짓을 해와도 원수로 만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게 원수가 악한 짓을 해도,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이 악한 짓이어도 내게는 그것이 악이 아닌 그런 경지에 이르면 애초에 아무 원수가 없고,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니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경지가 오늘 하느님 사랑의 경지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경지 말입니다.

이는 마치 연기에 그을려도 그을음을 전혀 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어떤 악을 저질러도 그것이 그에게는 전혀 악이 되지 않는 경지입니다.

어렸을 때 수인선 협궤 기차를 타고 인천을 갔다 오다 보면 굴을 몇 개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굴을 지나고 나면 석탄 연기에 얼굴이 모두 검둥이처럼 되어 서로 킥킥대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머리를 좀 쓰는 친구들은 얼굴을 보자기로 감쌉니다.

그것처럼 누가 아무리 악의 비를 퍼부어도 우산을 큼지막하게 쓰면 그 비에 젖지 않겠지요?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노래를 보면 얼굴빛 차돌처럼 만든다는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런데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건 얼굴에 보자기를 써 그을음 타지 않는 것과 같고, 차돌처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원치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합니다.

그러나 모욕과 수모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만 모욕이고 수모이고, 모욕과 수모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만 악이기에 원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악이 되지도 않고 얼굴빛 변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만 프란치스코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곧 자기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 자기가 원하는 것은 없는 경지입니다.

전에 원수였어도 이제는 원수가 아닌 그런 경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 외에는 원하는 것도 없고 원치 않는 것도 없는 그런 경지를 당장 이룰 수는 없어도 감히 꿈꾸고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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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4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행복하여라, 그분의 법을 따르는 이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는 이들!”(시편 119.1-2)

 

교황청 홈페이지를 열으니 사순시기를 맞이하여 교황청에 근무하는 고위성직자들을 위한 칸탈메사 추기경의 사순 첫 강론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을 바탕한 강론이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누구든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누구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어에서 직역했습니다. 참 반갑고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첫눈에 “나는 생명의 빵이다” 말마디를 보는 순간 “나는 사랑이다”가 말마디가 연상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는 그대로 “예수님은 사랑이시다”로 바꿔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몇 해 전 연중피정 때 “사랑이 되기(Becoming Love)”라는 주제도 생각났습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존재론적 변화가 바로 우리의 평생공부요 평생과제입니다.

아직도 눈은 쌓였지만 곳곳에 녹아 흐르는 물이 완연한 봄이 시작됐음을 알립니다. 봄 되면 맨 먼저 마리아의 집 피정집 뜨락에 피어나는 영춘화(迎春花)를 어제 보니 참 반가웠습니다. 개나리보다 1-2주 빨리 피는 꽃으로 꽃말은 ‘희망’, ‘사랑하는 마음’으로 봄과도 잘 어울립니다. 겨울을 통과한 파스카의 꽃 영춘화입니다. 문득 오래전 써 놓았던 “예수님은 봄이다”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이수철 신부님 자작시1

 

시공을 초월하여 25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감있게 와닿는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입니다. 봄은 사랑입니다. 다시 사랑을 공부해야 할 봄입니다. 하느님은 자연을 통해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평생공부가 사랑이요 평생과제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완전한 사람입니다. 사랑공부에는 영원한 초보자라는 자각하에 다시 봄과 더불어 시작해야 할 사랑공부입니다.

우리의 연장되는 날들은 사랑하라 주어지는 선물의 시간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 사랑이지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아쉬움도 아마 사랑을 다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허무나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도 훈련입니다. 우보천리, 한걸음 한걸음 사랑을 선택하고 배워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19년 전 반가운 자작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이수철 신부님 시2

  그렇습니다. ‘오늘’입니다. 오늘 다시 시작하는 사랑공부, 사랑과제입니다. 제1독서 신명기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너희에게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것들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민족들 위에 높이 세우시어, 너희가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게 하시고,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예수님은 참 좋은 짝을 이룹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예수님의 멋진 강론이 오늘 복음입니다. 뭇사람들의 찬양과 명성과 영화를 받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구체적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명심하여 실천해야 할 평생과제가 평생공부가 완전한 사람이 되는 사랑공부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죽어야 끝나는 평생과제요 평생공부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닮아 완전한 사람이, 참사람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궁극의 목표입니다. 다산 어록의 한 말씀도 생각납니다.

“목적 없이 공부하면 지식을 많이 쌓는다 해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뿐이다.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고, 뜻이 없으면 학문을 성취할 수 없다.” 참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사랑공부요 평생 사랑을 배우는 여정에 충실할 때 사랑의 대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성적, 육체적 ‘에로스’ 사랑도 아니고, 친밀한 우정이나 배우자 간의 상호사랑의 ‘필리아’ 사랑도 아니고, 대가가 없을지라도 상대방의 유익을 깊이 배려하는 '아가페' 사랑입니다. 싫어도 미워도 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 하느님다운 사랑, 아가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주님의 오늘 멋진 복음 강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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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랑의 완전성은 이런 실천적 사랑의 완전성입니다. 참으로 상생의 공평무사한 보편적이자 구체적 사랑입니다. 결코 애매모호한 낭만적 추상적 사랑이 아닙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윈윈(win-win)”의 상생(相生)의 사랑입니다. 원수나 박해자를 미워하고 저주하다 보면 내가 먼저 다칩니다. 그러니 원수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사랑이요 박해자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약한 듯하나 참으로 적극적이고 강한 두려움 없는 용감한 사랑입니다.

사실 우리 눈에 원수요 박해자이지 그 나름의 깊은 사연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무지의 악에 눈이 가려 있을 수도 있고 나름대로 깊은 상처가 있을지 모르는 치유받아야 할 무지의 환자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무사(無私)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때 악은 무장해제되고 보복의 악순환의 유혹에서 벗어나 무지의 병도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런 아가페 순수한 사랑은 결코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또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끼리끼리의 유유상종의 배타적 닫힌 사랑이 아니라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햇빛 같은 사랑이요 모두에게 내리는 봄비 같은 사랑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인사하는 유유상종의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요 주님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한 자기 초월의 아가페 사랑을 통해 날로 사랑의 주님을 닮게 하십니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 19,8).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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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5

 “사람을 죽이지 마라.” 십계명 중 다섯째 계명이다. 하느님이 말씀하시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금령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이 사람을 실제로 죽이지 않음이 아니라 이웃과 형제자매를 미워하지 않음을 뜻한다고 풀이해주셨다(마태 5,22). 그러니까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이 계명을 지킨 게 아니라 이웃을 미워하지 않아야 이 계명을 지킨 것이다.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이것도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처럼 세상 모든 사람에게 매우 익숙하다. 오죽하면 죽으며 복수를 부탁하고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이 헤피엔딩이 되는 영화까지 만들어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헤피엔딩이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원수를 미워한다고 비난받지 않지만 미움을 가진 그 사람의 마음은 지옥이다. 살인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미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지옥에서 탈출하고 미움의 올가미에서 해방된다. 예수님도 미움의 고통이 무엇인지 아셨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미운 마음이 한 번도 생기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야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마태 5,48). 여기서 ‘완전’은 무결점이나 완벽이 아니라 온전 또는 완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모든 사람을 잘 대해주고 조금 부족한 이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품어주고 인내하는 멋진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다. 그런데도 그렇게 되어버리곤 한다. 이게 내 잘못이고 죄라고 판결하신다면 정말 억울하다. 그리고 지금 나를 미워하고 있는 누군가도 마찬가지로 억울할 거다. 그러니 우리 모두 피해자다. 하지만 왜 이렇게 됐는지 묻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이 뱀에게 ‘너는 왜 여자를 꼬여냈느냐?’라고 묻지 않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악의 근원을 캐내는 건 너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러는 사이 나는 또다시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이고 내 마음은 지옥이 될 거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한다고 그 사람이 좋아지기는 어렵겠지만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그에게 미소 짓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처럼 똑같이 대해주려고 노력한다. 이런 노력에 그가 등을 돌리면 더 큰 상처를 받겠지만 그 상처는 영광의 상처가 되고 하늘나라 내 보물창고에 고스란히 쌓일 거다. 이런 노력이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저절로 되는 거라면 예수님이 그렇게 힘주어 말씀하셨겠나. 예수님도 그러지 않으셨을까? 미움을 극복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거 말이다. 초등학교 때 꿰맨 눈가 흉터가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뜨거운 물에 덴 팔의 흉터도 없어졌다. 그런데 정강이 상처는 아직 조금 남아있다. 마음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 않을까? 사랑하면 더 빨리 사라져 더 자유로워질 거다.

 

예수님, 진정으로 용서해야 할 이웃은 없습니다. 단지 조금 더 깊고 넓게 이해하고 인내해야 할 이웃들이 있을 뿐입니다. 문득 그때 그 일과 그 사람이 떠오르고, 그를 만날 때 생기는 불편함, 싫음, 그리고 가슴이 벌렁대는 두려움을 잘 짊어지고 가게 함께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을 무한히 신뢰하신 어머니의 평화를 제게 나눠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묵상,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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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대표적인 영성가로 ‘토마스 머튼’을 뽑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관상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 쓰는 일에 회의를 느꼈고, 진정으로 기도하는 관상가로 살기 위해 수도원에 입회한 것입니다. 입회 후에 그에게 수도원 장상이 불러서 소임을 맡겼습니다. 어떤 일이었을까요? 바로 ‘글 쓰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만을 바라보는 관상가가 되고 싶은데, 다시 세속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글 쓰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면 이곳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까지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갈등 속에서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관상가가 되느냐, 작가라는 활동가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 후 자기가 싫어하는 일도 기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산다’라는 사실만 바라봐야 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며, 포기하려는 텅 빈 마음에 그 자리에 하느님을 초대합니다. 즉, 하느님과 한편이 되기에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싫어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또 싫어하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싫어하는 일과 사람 속에서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고,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바로 잊어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위해 산다’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박해자까지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원수를 대하게 되는 것,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모두 싫은 일이고 피하고 싶은 자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갑자기 그 사람이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 하느님을 위해 살려면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일과 사람은 계속해서 우리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싫다고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적대적인 마음으로 싸워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앞세워 사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 (빠다킹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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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희 신부님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사순 1주간 토요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사순시기의 첫 번째 주간을 마무리하면서 한 주간 동안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로 읽은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따라 걸으며 당신께서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고 당신의 말씀을 들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소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겠다고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독서의 이 약속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느님 아버지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는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와 박해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사람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편안함을 주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에서 더 나아가 내가 미워하고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들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완전한 사랑은 어떠한 차별도 구분도 한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가장 큰 모범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또 하느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실천에 옮기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인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별 없이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거나 또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나 아닌 다른 사람도 품고 살아감을 잊지 않기를 요청하십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희생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 실천의 모범과 구원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미사를 통해 우리도 주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들, 또 동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한규희 보나벤투라 신부님 미사강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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