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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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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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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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니네베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10

주님의 말씀이 1 요나에게 내렸다.

2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내가 너에게 이르는 말을 그 성읍에 외쳐라.”

3 요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니네베로 갔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나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

4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5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

6 이 소식이 니네베 임금에게 전해지자,

그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다.

7 그리고 그는 니네베에 이렇게 선포하였다.

“임금과 대신들의 칙령에 따라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든 양이든 아무것도 맛보지 마라.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라.

8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옷을 걸치고

하느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제 악한 길과 제 손에 놓인

폭행에서 돌아서야 한다.

9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을 돌리시고

그 타오르는 진노를 거두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

10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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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의 전례)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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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말씀은 요나 예언자의 표징과 예수님의 표징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요나의 표징이 무엇입니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요나의 표징을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기적적으로 구제받은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표징은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실 부활을 뜻합니다. 그러나 오늘 들은 루카 복음서는 요나의 표징을 단순히 “요나 예언자” 그 자체라고 합니다. 요나는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을 위하여 파견되었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오직 요나의 설교만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이 세대 사람들을 위한 하나뿐인 표징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표징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다른 표징을 요구하는데, 이는 이 세대가 믿음이 없음을 반영하며 그들이 '악한 세대'임을 드러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불신자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께 기적을 요구하지는 않는지 되돌아봅니다. 이미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주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고, 많은 말씀을 남겨 주셔서 성경과 전승으로 내려오는 데도 우리는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더 깊이 회개하고자, 그리고 주님께서 계신지 온전히 믿고자 어떤 놀라운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셔야 할 의무가 없으시고, 이미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유일한 표징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갑니다. 놀라운 표징을 바라는 사람은 정작 놀라운 일이 일어나더라도 회개하지 않을 것입니다(루카 16,31 참조). (가톨릭대 성신교정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을 품는 일상의 표징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어떤 갈망과 기대를 품고 움직이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모여든 군중을 향하여 악한 세대(11,29)라고 하셨을까? 이방인들인 남방의 여왕이나(1 열왕 10,1-13; 2 역대 9,1-12) 니네베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선포를 경청했다. 예수님 시대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은 이미 많은 치유와 해방을 체험했기에 더 이상 표징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바리사이들과(마르 8,11) 사두가이들이(마태 16,1) 메시아인지 확인하려고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께서 표징을 보여줄지라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줄 힘을 정치적 메시아를 원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11,30)라고 말씀하신다.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을 위한 표징이었다. 주님의 눈을 피해 달아나다 물에 빠져 죽게 된 선원들을 구하려고 한 그의 헌신, 기적적인 구출, 이교인에 대한 선교 결과인 신비스럽게 회개한 사람들, 주님께서 니네베 사람에게 베푸신 용서 등이다. 예언자 요나의 인격과 사건의 주요한 면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된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바치고 부활하시며 그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퍼져 나갈 것인데 이 모든 신비는 요나의 인격과 사명 속에 상징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요나가 큰 바다 괴물의 뱃속에서 삼 주야를 지냈듯이 사람의 아들도 땅속에서 삼 주야를 보낼 것이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삶 자체가 우리 세대에 필요한 유일한 “표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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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 시대의 유다의 불신을 강조하기 위해 두 가지 실례를 드신다. 첫 번째는, 남쪽나라 스바의 여왕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솔로몬이 지혜로운 하느님의 말을 하는 것을 듣고, 하느님의 성령이 솔로몬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여왕은 하느님의 말씀을 솔로몬을 통해 들으려고 위험천만한 여행을 감수했고, 모든 것을 동원하여 값진 선물을 장만했으며, 이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을 더할 수 없이 행복하게 생각했다. 두 번째는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올바른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예언자 요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진정으로 통회하며 회개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뛰어난 분임을 강조하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심판 때에 남쪽나라 여왕과 니네베의 이방인들의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참된 표징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부의 뜻에 순종하시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삶, 참 기쁨, 참 평화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을 만나고 느끼면 그 어떤 고통과 시련을 당한다 해도 ‘인생이 열리는 하늘의 표징’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얼굴에 웃음이 돌고, 삶이 어려워도 편안하며, 초라한 식탁에 앉아도 푸근하고 배부르며, 홀로 있어도 쓸쓸하지 않으며, 가진 것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이처럼 표징은 표징 자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사일 듯싶다. 당시 유대인들보다 훨씬 좋은 여건 속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어떤가? 기도, 성경공부, 성사생활, 각종 교육, 영성생활의 다양한 방편들 등. 이렇게 잘 갖추어진 여건 속에서 나는 예수님께 무엇을 바라는가? 나는 내가 원하고 내 마음에 드는 기적적인 표징을 찾고 있지는 않는가? 말씀의 경청, 기꺼이 자신을 내놓는 헌신과 희생, 관대함, 한없는 용서, 거룩한 친절, 기쁨과 평화를 품고 살아내는 일상의 표징을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지금 여기서부터!

(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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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여정(旅程)

무지(無知)에 대한 답은 회개(悔改)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서서히 걷히는 무지의 어둠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회개할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부패인생을 발효인생으로 바꾸는 것도 회개의 여정뿐입니다. 하루하루가 늘 새로운 선물일 수 있음은 회개를 통한 깨달음입니다. 영성생활의 기초가 회개입니다. 우선적인 순서도 메타노니아(회개), 코이노니아(친교), 디아코니아(봉사)입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열던 재의 수요일, 머리에 재를 얹을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사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사순시기의 삶을 요약합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그의 규칙서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성규 49,3-4).

눈만 열리면 곳곳에 회개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열고 어제가 “사회정의의 세계의 날”(World Day of Social Justice) 임을 알았습니다.

'소비문화(Cultur of waste)'를 개탄한 교황님의 한 말씀도 새롭게 와닿았습니다.

특별히, 교황은 끊임없이 기후변화에 의해 위협받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의 보호를, 이민자들과 피난민들의 보호와 환영을 호소하면서, ‘무관심의 지구화(the globalization of indifference)’를 경고하면서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 행동에 돌입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집은 여기다(Home is here)”, 시위자들의 팻말의 말마디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정의의 열매로 표현되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마침 오래전 자작 고백 시가 반가워 인용합니다. 18년 전 2006년 제 나이 58세 이때쯤 쓴 “나 창밖을 볼 때마다”라는 장시입니다. 이 시또한 제게는 시공을 초월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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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년전 집무실 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이니 새삼 ‘정주의 축복’을 깨닫습니다. 지금부터 18년 후라면? 아마도 살아있기 힘들 것입니다. 새삼 회개하라 주어지는, 연장되는 선물 같은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절박한 깨달음입니다. 회개의 여정은 동시에 깨달음의 여정이요 깨달음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비롭고 지혜로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온통 회개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요나의 회개의 선포에 즉각적인 거국적, 거족적 회개로 응답하는 니네베 사람들, 시공을 초월 전 인류가 자비로운 하느님의 눈에는 회개의 대상, 구원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묘사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악한 길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회개요, 이때 하느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시어 우리를 당신 품 안에 맞아들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악입니다. 무지에 눈먼 악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시공을 초월, 무지한 중생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이방의 니네베 사람들처럼,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솔로몬을 찾았던 이방의 남방 여왕처럼 신속하게 주님을 찾아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솔로몬 보다 더 큰, 지혜로운 현자가,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가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표징들의 표징인 빛나는 회개의 표징,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 자비의 표징, 지혜의 표징인 예수님을 못 보고 표징을 찾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무지에 눈먼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보다 더 좋은, 은혜로운 회개의 표징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를 통한 주님의 빛이 무지의 어둠을 밝힙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순시기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 18,29).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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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개

 

사순절에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잘 와닿지 않지요?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회개하라고 하면 와닿을까요?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회개하라고 하면 와닿을까요?

니네베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그들은 대단치도 않은 하느님의 종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으니까요(루카 12,32). 임금님이 더 솔선수범 하였다니 더 부럽습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을 위해서 요나를 보내시고, 유대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듯이, 오늘날에도 회개의 표징이 될 누군가를 보내주셔야만 할 듯합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조차 못마땅하였습니다. 그런 악인들은 싸그리 죽어 마땅하다 여겼습니다. 또 자신이 가서 아무리 외쳐보았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자비는 요나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요나보다 더 큰 예수님이 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전하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다가왔고 마음을 고쳐 먹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대도 악이 넘쳐나는 그런 세대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자비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또 다른 요나가 되고 또 다른 예수가 되어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구원의 하느님 나라 잔치에 모두가 초대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슬픈 소식, 절망스러운 나쁜 소식을 전하지 말고, 희망과 자비의 기쁜 소식을 열심히 전파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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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결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고 악인의 패망을 바라지 않으며, 오직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고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를 언제나 바라시니까요.

오늘 그 어떤 죄인도, 그 어떤 악인도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게 될 거라는 기쁜 소식을 우리의 생각과 말로 전할 수 있는 복된 날 만드시길 축원합니다.

니네베는 환락의 도시입니다. 그 누가 봐도 탄탄한 경제력과 능력을 지닌 그런 도시였고, 그래서 그런 도시가 패망할 거라고는 믿기 쉽지 않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니네베가 무너질 거라고 외쳐야 하지만, 니네베 사람들이 콧방귀나 뀔 거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모두가 그 말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심지어 임금까지 믿고 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남들이 황당하게 잘될 거라는 소리는 믿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소리에는 언제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누군가가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허황된 소리는 무시하고 회개하라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OFM)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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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잠재력을 가늠할 때 출발점에 집중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합니다. 즉, 타고난 재능에만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타고난 재능이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고 합니다. 단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지식을 익혔거나 부모에게 배웠던 이유가 더 클 뿐입니다. 출발점만을 보는 부모가 종종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는 얼마나 똑똑했는지 몰라요.”

출발점 자체가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멀리까지 가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출발점보다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했는지에 좀 더 초점을 맞춰야 했습니다. 신동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세상을 휩쓰는 모차르트 같은 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는 서서히 부상하는 대기만성형인 바흐 같은 이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지극히 정상이며, 또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도 더 많이 받습니다.

출발점에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조상님께 받은 유산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재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얼마나 먼 거리를 갈 수 있느냐를 생각하며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 모두가 하느님의 시간이라고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시간을 계속해서 탐내고 있습니다. 왕년의 내 모습이 아니라, 지금의 내 모습이 장래의 밝은 내 모습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출발점에만 연연했던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조상들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하지요. 조상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내세워서 선택된 민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제대로 믿지도 못하고, 자기의 회개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회개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심보로 꽉 막힌 이기적인 모습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들의 앞에서 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표징만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징밖에는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요나가 외쳤던 심판의 선포와 회개에 대한 호소에 니네베 사람들이 곧바로 믿고 회개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보다 크신 분이 이야기하는데도 믿지 않고, 또 회개하지도 않기 때문에 표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믿지 못했던 것은 자기들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조상들과의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발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얼마나 나아갈 수 있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을 믿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놀라운 표징도 볼 수 있습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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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산다'

 믿음이 기적을 만든다. 기적이 믿음을 낳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기적,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을 보고 싶은 바람만 일으킨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그 사람 안에서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어버린다. 구원을 체험하고 살기를 바란다면 마귀 들린 아이를 살려달라고 했던 그 아버지처럼 청해야 한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군중을 향해서 예수님은 매몰차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9)” 요나 예언자는 큰 도시 니네베로 가서 회개하라는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하느님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던 중에 그는 바다에 던져졌고 하느님은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키게 하셨다. 그는 그 속에서 회개했다.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요나 2,10).” 그러자 그 큰 물고기가 그를 육지에 다시 뱉어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하느님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됐다.

   요나가 도시 한가운데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고 외치자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다고 한다. 어떻게 이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전했기 때문일 거다. 거센 풍랑의 바다에 던져져서 살아남을 사람은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를 다시 살려내셨다. 니네베 사람들이 불쌍해서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하느님은 죄인이 율법에 따라 심판받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이 당신께 돌아와 살기를 바라신다. 거센 풍랑과 큰 물고기로 요나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시고, 외아들 예수님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기를 바라신다. 누가 죄인이고 누가 재판관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간청하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금도 여전히 일하신다고 믿는다. 있는 힘을 다하고, 믿음을 더해달라고 청하면서까지 믿는다. 내 기도와 믿음은 신기한 일을 만들거나 안 되는 일을 되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하느님이 살아계시고 일하시는 걸 보고 알게 한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그것을 신기한 우연이나 행운이라고 하고 믿음을 청하는 이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예수님, 제게는 신기한 일을 보여주지 마십시오. 제 믿음이 불순해지고 더 신기한 일을 바라게 될까 봐 걱정됩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제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이 늘 제 앞에 있으니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기적이 아니라 마지막 날까지 충실하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끝까지 아드님을 따라가기를 바랍니다.

제 믿음을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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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에 그리스도 원본에서 죄를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사용되는 말 중에 '하마르티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을 보면 그 본래의 의미는 표적을 놓치다는 뜻입니다.

곧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하느님, 예수님이라는 표적에서 '벗어나는 것', 그분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라는 표적, 그분께서 가르치신 사랑과 용서라는 표적에서 벗어나 다른 엉뚱한 데로 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그렇게 엉뚱한 곳으로 향하던 나의 존재를 다시 하느님께로 맞춰서 정조준하는 것, 하느님께로 나의 삶을 정조준해서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군중에게 요나 예언자와 니네베 사람들, 그리고 난방 여왕의 예를 드시면서 그들이 다른 표징은 받지 못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니네베 사람들과 남방 여왕은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방인들, 곧 애당초 하느님이라는 분은 그들의 관심 밖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요나라고 하는 어느 낯선 곳에서 온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어서 회개하고 솔로몬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어느 한 나라의 임금의 지혜를 배우고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반해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당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나와 솔로몬과는 비할 수 없는 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예수님께서는 꼬집으시면서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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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많이 복잡해지고 어려운 일들도 많이 있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예수님이라는 우리 삶의 표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히 보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옛날 하느님의 말씀도 자국어로 읽을 수 없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에 비해 지금 우리는 누구나 쉽게 우리말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또 기술이 발달해서 핸드폰(smart phone)으로도 보거나 또 심지어 인터넷과 다른 여러 수단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 성경에 대해 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나라에서 사는 덕에 하느님이 내 삶의 목표라는 것을 숨기거나 그것 때문에 박해를 받을 염려 없이 마음 편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시대 때 직접 그분을 뵈어서 그분을 받아들여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지금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복음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향해 우리의 삶을 늘 맞춰서 나아가야 할 책임이 더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또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때로는 정말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갖는 간절함과 열망을 이루어 미적지근한 신앙생활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이라는 우리 삶의 표적에서 벗어나 점점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다시 우리 마음에 간절함과 열망을 불 지필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다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이 받은 우리가 그것 때문에 나태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면서 우리의 신앙에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보다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몫까지 함께 해 나간다는 믿음 안에서 우리 신앙생활의 열망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사 하고 은총을 청하면서 이 사순 시기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이다한 스테파노 신부님 (OFS) 미사 강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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