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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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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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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베드로를 택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로 고대 로마에서 2월 22일은 가족 가운데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떠난 이를 기억하는 관습에 따라 4세기 무렵부터는 이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참배했습니다. 이것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6월 29일이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를 함께 기념하는 새로운 축일로 정해지면서, 2월 22일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축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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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인 원로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5,1-4

사랑하는 여러분,

1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원로들에게 같은 원로로서,

또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2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3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4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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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성 베드로 성좌

 

2024년 2월 22일 매일미사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말씀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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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2일 목요일 매일미사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오늘의 묵상

교회는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와, 무엇이든 묶고 푸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 뒤 베드로의 계승자들은 하느님 백성 전체에 대한 특별한 봉사직을 수행합니다. 가톨릭 공동체 안에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의 역할은 이미 2세기부터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와 리옹의 이레네오 같은 교부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베드로 교좌의 수위권은 온전히 보존된다. 사랑의 모든 공동체를 다스리는 베드로 교좌는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고 또 동시에 개별 요소들이 일치에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독한다”(교회 헌장 13항).

베드로 사도좌는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 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도록 만들어진 직무가 아니라, 그 안에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일치의 표지이자 목자의 구실을 하는 베드로좌는 당신 교회를 하나로 모아 구원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느님의 목자적 사랑을 보여 주는 특전적 표지입니다. 하느님 백성 전체를 돌보아야 하는 교황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전망을 제시하고, 하느님의 백성이 그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고 독려하여야 하는 교황의 직무가 한 인간이 맡기에 얼마나 크고 버거운 것인지 묵상하게 됩니다. 세상의 풍파와 도전에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굳건한 반석의 구실을 하는 교황께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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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제가 처음 양성책임을 맡을 때 겨우 서른이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더 먹은 형제들도 가르쳐야 했습니다.

당연히 양성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할 때 양성을 하다 보면 할 수 있게 된다고 여러분이 조언하였고 재속프란치스코회에서 양성을 처음 하게 된 분들도 양성하면서 양성자로 자신이 차츰 양성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도 실제로 하다 보니 할 수 있었고 차츰 양성자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더 큰 힘이 된 조언은 역시 신앙적인 조언으로서 소임을 주신 주님께서 할 수 있는 힘도 주실 거라는 조언이었습니다. 사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요.

권력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를 이용하여 자기 사욕을 차리다 잘못되곤 하잖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좌는 이런 것과 달라야 합니다.

사도좌는 인간이 쟁취한 자리가 아님은 물론 인간이 마련해준 자리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겁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 교회의 으뜸 자리를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지혜를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좌 곧 교황의 자리에 앉는 사람은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서간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주님의 양 떼를 돌보는 자리에 앉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할 사람으로서 그에게 주님께 대한 순명과 사랑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양 떼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 떼를 맡기시면서 당신 양 떼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베드로에게 물으시지 않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당신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것 같고 우리 같으면 주님의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물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묻지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있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해야 주님의 양들에 대한 사랑도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의 자세 없이 책임자의 자리를 맡고 인간적인 사랑만으로 양들을 사랑하면 자주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 사랑은 금세 고갈될 것이고 그 사랑에는 욕심이나 기대라는 불순물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양들을 사랑해야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고, 우리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처럼 순수하고, 무엇보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이 되어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 2월 22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OFM,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묵상글)

 

 

 

 

오늘은 성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12사도 가운데 첫째로 삼으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고난을 주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개신교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가톨릭 교회가 말하는 교황의 권위나 수위권, 무류성 등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마치 세상의 권력처럼 이해를 하면서 교황은 그런 고난을 마치 그 세속의 권력자들처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과 그 이외에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여러 요청들을 통해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교회에 부여되는 권위의 본질을 우리는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고, 그 자체로 너의 가장 큰 행복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며, 그 좋은 것들 중에서 궁극의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입니다. 교회의 규모나 교세 신자들의 숫자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의 만남과 일치, 그것만이 교황과 교회가 가지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존재 이유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시는데,

첫 번째는 교회 설립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 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때 베드로의 믿음은 그렇게 굳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도 예수님 가시는 길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고, 또 수난의 시간이 두려워서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반석 삼아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것을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다. 이는 교황과 교회의 힘이 인간적인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스스로의 약함을 고백함으로써 얻어집니다.

  베드로 스스로 나는 약할 때 강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함께해 주시고, 그것을 저승의 세력도 꺾지 못하는 강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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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수님의 두 번째 약속은 하늘나라 열쇠의 약속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내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내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는 하늘나라에서 메고 풀어야 할 것을 땅에서 결정하는 권한을 베드로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메고 무엇을 풀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당부의 말씀, 내 양 떼를 잘 돌보아라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매고 푸는 모든 일들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법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양떼를 돌보는 사랑의 행위여야 합니다.

교황과 교회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주님의 목자로서, 때론 매고 때로는 풀면서 양 떼를 주님의 양우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와 교황이 실천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사도자의 고난과 여기에서 이어지는 교황의 모든 고난들은 지상의 권력이 아니라 그들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실천해야 할 사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난은 영적으로는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1서에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하나하나는 모두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권위 있는 주님의 교회로서 하느님과 믿음으로 하나 되고, 그 믿음 안에서 기뻐하면서 매일의 보속을 통해서 약함을 고백하고, 그 고백 안에서 강해지면서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고 봉사하며 그 봉사 안에서 보람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참다운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이 사순 시기에 성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면서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참다운 교회상과 신앙인의 삶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2월 22일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미사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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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초춘(初春)에 내린 흰 눈이 온누리를 덮었습니다.

나무마다 설화(雪花)의 눈꽃들 만발한 초봄입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우리 모두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순결한 영혼, 순결한 마음, 순결한 사랑으로 살라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내려 주신 사순시기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다음 오늘 감사송(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과도 잘 어울립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도들이요 오늘날의 주교들, 사제들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직무가 섬김의 목자직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위와 권한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본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베드로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흔들리지 않는 교회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오늘 축일의 유래를 간략히 살펴봅니다. 로마시대에는 죽은 이의 기일에 무덤에 모여 추도하는 관습이 있었고, 2월 22일 오늘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 사도 무덤을 참배하고 추모했으며 바로 오늘 축일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이어 바오로 4세(재위 1555-1559) 교황이 6-7세기때 갈리아 지방에서 유래된 1월 18일을 로마전례력에 수용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정했으며, 1960년 성 요한 23세(재위 1958-1963) 교황이 이 사도좌 축일을 2월 22일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근거가 되는 교부들의 어록도 참 풍부합니다.

  • “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성 대 레오 교황)
  • “베드로는 반석을 뜻하는 말인데, 반석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라는 이름 안에 교회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 "이 바위는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위라고 표현하신 뒤,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곧 반석 위에 세우시어 굳건함과 힘을 지니게 하십니다.”(오리게네스)
  • “사도들은 유일한 초석 예수님 안에 있는 초석들입니다. 설사 사도들이 없다 해도 예수님만은 마땅히 초석으로 불리시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교회의 초석들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프리마시우스)
  •  “‘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마태 16,18)’고 말하지만, 모든 사도 위에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말씀도 있습니다(마태 18,18). 그들 모두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교회의 힘도 그들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둘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 것은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머리가 지명된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이 모든 교부들의 말씀은 오늘 복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신앙의 모범인 베드로를 본받아 예수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압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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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고백함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전권을 위임받을 정도로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베드로를 신뢰했는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석이라 극찬을 받던 베드로가 순식간 사탄의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의 확인을 받아낸 일화(요한 21,15-19)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지로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세 번 오고 간 문답입니다.

베드로가 이 체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베드로가 순교에 이르기까지 항구 할 수 있었던 믿음도 이런 체험의 은혜일 것입니다. 새삼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깊어지는 믿음의 여정이요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면모는 믿음 약한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바로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사도이자 목자인 베드로의 고백에는 참목자 예수님을 닮은 목자의 사랑이 녹아있음을 봅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목자뿐 아니라 양 떼 신자들이 으뜸 목자 예수님께 보고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하나로 녹아 있는 참 목자 예수님을 닮은 아름답고 거룩한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의 평생 배움의 학인(學人)들인 우리를 격려합니다. 세월과 함께 쌓여 드러나는 ‘공부의 주름’, ‘연륜의 나이테’이길 소망합니다.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 -다산

“시 삼백 편을 외워도, 사방이 사신으로 나가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공자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목자 예수님을 닮아 주님과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합니다. 또 하나의 베드로 반석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황송스럽고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마태 16,18). 아멘.

(2024년 2월 22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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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목자가 되는 것은 좋은 부모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거룩한 도전이다.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진 것처럼 자녀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들에게 끝까지 내어주어야 하는 게 부모의 몫이라면, 착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4-15).”

 

머지않은 미래에 인공지능 AI가 대체할 직업군들이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 반대로 대체하기 어렵고 불가능할 거라고 예측되는 직업군들도 있다. 그 안에는 순수한 창작 작업을 하거나 아주 정교한 기술을 요구하는 직업들과 더불어 성직자가 들어 있다. 성직자가 더 이상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들의 일은 컴퓨터나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이 일하신다. 성직자에게는 예수님처럼 완전히 자유로운 창의성, 마지막 한 방울까지 충실 그리고 기꺼운 책임이 요구된다.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셨을 때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마태 16,14). 모두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성경을 알고 신심이 조금만 있으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했다. 이에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라고 하셨다. 그 대답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고백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그게 행복이라고 알려주셨다.

 

아무리 똑똑해도 AI는 기계다. 기계는 하느님을 알 수 없다. 다른 피조물들은 모르면서 창조주를 아는 것 같다. 사람도 그들처럼 천부적으로 창조주를 알지만(로마 1,20) 보통 잊고 지내거나 애써 모른 체한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믿는다. 당신의 양들과 당신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위해(요한 10,16) 매일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 참 좋은 하느님을 알고 있는 힘을 다해 그분을 믿고 따른다. 내 믿음이 한낱 이론이라면 내 인생과 목숨을 걸지 않고 더 좋은 이론이 나오면 그걸 따를 거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를 알아주시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사랑하신다. 내 믿음,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컴퓨터, 인간의 세속적 셈법으로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다.

 

예수님, 주님은 저의 착한 목자이십니다. 교우들은 제가 아니라 주님 소유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목소리와 주님 백성들을 통해서 하시는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불쌍한 이 죄인과 늘 함께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프란치스코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소서. 아멘.

(2024년 2월 22일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구속주회 한국지부)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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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후배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하나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이 사진 안에는 아주 멋진 몸(상반신)을 드러낸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후배 신부였습니다. 보디 프로필 사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진,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 편집한 거야?”라고 묻자,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진 한 장을 남기기 위해 식단 조절을 하면서 몇 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했고 또 하루도 빠짐없이 헬스 트레이닝을 열심히 받았다면서 너무 힘든 시간이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 후배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 있었습니다. 이 힘든 것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진은 깜짝 놀랄 정도로 멋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전의 통통한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많이 마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살이 빠져서 그런지 얼굴에는 주름이 많이 보였고, 그래서 실제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습니다. 물론 본인의 만족도가 커서 괜찮다고는 하겠지만, 이 사진 한 장을 위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일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중요한 것일까요? 그보다 스스로 느끼는 멋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에게 보이는 삶은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보이는 삶은 계속된 만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멋진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여건들을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는 예수님 질문에,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하지요.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점이 너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정답 하나 말했다고 해서,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보시고 크게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멋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며, 이 세상을 만족하며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2024년 2월 22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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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반석, 성 베드로

성 베드로 사도좌에 대하여

매년 2월 22일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택하여 교회의 으뜸으로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 주시며 사도 중 으뜸으로 세우십니다. 예수님이 지어준 베드로라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으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마태 16,1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역대 교황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로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후계자와 교황 프란치스코

베드로와 그 후계자인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행사할 때, 교황의 권위는 하느님 백성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친교와 일치에서 시작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계제도를 교회 구조는 위아래가 바뀐 '역피라미드 형태'임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는데요. 교회의 구조는 수직적인 신분 구조로 잘못 이해한다면 교회의 공동합의성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요소가 강조됩니다. 주교단의 ‘단체성’과 교회의 ‘공동합의성’입니다. 이 두 개념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론과 교회 규범에서 자주 등장했고,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통치와 교회 쇄신에 있어서 키워드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노드적 교회는 ‘듣는 교회’로 위아래가 바뀐 역피라미드 구조로 성직은 봉사의 직분임을 강조한바 있다

 

  단체성 (collegiality)

단체성collegiality로 '단장을 머리로 하는 주교단', '교계적 친교 안에서 일치된 주교단' 그리고 그 속에서 행사되는 주교단의 '합의체적 행위, 권한' 등에서 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단장은 교황으로 교회의 머리로서 주교단의 신학적, 법적 성격 등 관련해 교회의 통치의 최종 권한을 지닙니다. 이 단체성에 대해 교황에게 있는 중앙집권적 통치와 행사의 과정에서 지역교회에 대한 좀 더 열린 자세와 분권화와 관련해 다양한 논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 중심의 중앙집권적 교회 통치에서 열린 교회로써 분권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요청이 광범위하게 제기되어 온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께서는 사도좌에 대하여 봉사의 직분임을 강조하며 “시노드적(synodal)인 교회는 ‘듣는 교회’이므로 하느님의 백성에게, 최종적으로는 친교와 일치의 최고 보증자로 교황에 대해 '역피라미드형 구조'로 하느님 백성에게 귀 기울일 것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실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두 차례의 가정 주제 시노드에 앞서 광범위한 풀뿌리 설문조사를 통해 세계 가정들의 현실을 들여다보는데 주력했습니다. 가정 관련 주교시노드를  2014년부터 두 번에 걸쳐 열면서 교회의 존재 양식을 드러내는 표지로서의 공동합의성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공동합의성 (synodality)

공동합의성에 대한 논의는 항상 '단체성'과 맥을 함께합니다. 공동합의성은 (synodalitas : 시노달리타스) '시노드 (synod)'에서 나온 단어로 교회의 구성적 속성을 말합니다. ‘시노드’는 그리스어 전치사 '쉰'(~와 함께)과 명사 '호도스'(길)가 합성된 것이기에,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을 가리킵니다. 교회에서 '시노드'를 통해 공동체의 합의를 이뤄 당면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은 중요한 전통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일곱 봉사자를 뽑는 과정(사도 6,1-7), 그리고 이방인들도 세례를 받도록 결정한 것(사도 10,44-48)이 그 예입니다. 2014년 12월 1일 교황청 신앙교리성 국제신학위원회 회의는 '공동합의성'을 현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쟁점 세 가지 중 하나로 꼽았는데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박준양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주교시노드 제도가 마련되면서 이 주제가 급부상하게 되었다며 공동합의성은 시노드 자체를 넘어서 모든 교회 구성원들의 삶에 적용되는 교회적 삶의 방식이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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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느님 백성이 여러 민족과 국가로 이뤄졌고,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는 점에서 '고유성과 다양성'이 그 백성의 중요하고 포기할 수 없는 임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제시한 복음 선포라는 점에서 '보편성', 하느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지체라는 점에서 '단일성' 강조해 왔습니다. 특히 제3세계 주교들은 주교 임명, 교황청 문헌 작성, 전례문 번역 등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폭넓은 자율성을 요구해 왔고 많은 추기경들이 이에 동의했습니다.

주교단의 단체성을 더 폭넓게 구현함으로써 교회는 더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고 이탈리아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은 1999년 주교시노드 유럽 특별총회에서 전하기도 했으며, 2005년 콘클라베 전 추기경 회의에서는 포르투갈 호세 사라비아 마르틴 추기경이 단체성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단체성 구현과 공동합의성에 대한 관심을 전망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기념하며 (E.필로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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