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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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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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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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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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3월 23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를 살리신 뒤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까지 개입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다 지도층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임금’(다윗 가문의 메시아)으로 인정하면, 로마인들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할까 보아 우려를 표합니다. 결국 대사제 카야파가 이 모든 논쟁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에는 희생될 존재의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희생양이 될 존재가 모든 혼란과 불안을 끝내 줄 결정적 동기가 되어 주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이 불의한 결정도 당신 섭리에 활용하십니다. 대사제의 입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임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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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대사제의 제안에 따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두려움’은 질투와 경쟁심에서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사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은 민중의 작은 움직임도 하나같이 ‘반역’으로 선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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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죽은 친구 라자로를 살려내셨다. 라자로 이외에도 야이로 회장당의 어린 딸(마르 5,41-42)과 어느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루카 7,14-15)도 되살려내셨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이야기를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료해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고 죽은 이를 되살려내셨다. 이는 당신이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의 사람이고, 그분과 함께 그분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지였다.

 

치유의 기적은 그렇다고 해도 죽어 무덤에 묻힌 이를 되살려내는 일은 하느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지도자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그분을 메시아 새로운 임금으로(요한 6,15) 추대하게 되면 로마제국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나마 누리고 있던 종교적 자유와 자치권마저 빼앗길 걸 걱정했다. 신앙과 민족의 안전을 지키려는 그들의 이런 걱정과 우려는 매우 합리적이고 또 지도자들의 책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걱정, 그것이 합리적이고 정의롭게 보였는데도, 그것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죽이는 결정에 이르게 했다. 예수님은 살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안전이 구원의 대가라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모든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그때 지도자들이 니코데모의 말처럼(요한 7,50-51) 예수님을 직접 만나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믿었다면 정말 그들이 우려했던 일들이 벌어졌을까? 지금도 정치적 정적을 교묘하게 살해하는 걸 보면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모를 일이다. 여하튼 그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기로, 민족의 안전을 위해서 한 사람을 죽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하느님의 계획대로 됐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해 돌아가시고 그것으로 다른 모든 이들을 당신께 모아들이시는 하느님의 꿈이 이루어지게 됐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다면 단 하나,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않고 그분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잃어야 산다는 말씀은 자포자기가 아니고 자살은 더욱더 아니다. 그것은 희망을 버리는 것이니 희망할 수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선택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안전 욕구를 버리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믿었던 것을 모두 버리고, 그리고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문화와 관습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비복음적인 일들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마치 죽음과 같다. 실제로 순교자들은 범법자로 모진 고문과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렇게 처형된 예수님은 구세주 하느님임이 밝혀졌고, 순교자들은 우리의 모범이 됐다. 그분들은 믿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버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으셨고, 순교자들은 복음의 가치가 생명보다 문화보다 소중하다고 국가법 위에 있다고 증언했다. 믿음은 참으로 큰 도전이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 오늘도 믿음의 은총을 청합니다.

저의 약점과 죄스러움에도 주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참 생명을 얻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신념과 열심히 마련한 계획들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게 도와주소서. 아멘.(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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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입니까?

사순시기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성주간이 목전입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이런저런 보속이나 결심을 계획했었는데, 결과가 만족하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말과 생각만 앞섰지, 구체적인 실행 측면에서 너무 부끄러운 분들, 지나치게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성주간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만회할 수 있는 일주일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그 죽음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그럴듯하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결과물이 아쉬운 분들, 성주간 동안 딱 한 가지만이라도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교회가 강조하는 세 가지 측면, 기도와 단식과 자선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와 단식은 그 자체로 끝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와 단식의 결과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제는 더이상 세상에 안계시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가슴에 살아 숨 쉬고 계시는 분, 민주화 운동의 대부이신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1939~2003)이십니다. 총칼이 난무하던 군부독재자 시절, 모두가 숨죽이고 엎드려 지내던 혹독했던 유신 시절, 공개석상에서 긴급 조치 9호 철폐, 유신정권 종식을 크게 외치셨습니다. 5공 시절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고위층의 치밀한 각본에 의해 은폐 조작된 것임을 만천하에 외쳐 6월 항쟁의 단초를 마련한 분도 김승훈 신부님이셨습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시대, 겁에 질린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던 시대, 김승훈 신부님께서는 용기를 내셨습니다. 그로 인한 체포와 투옥, 고문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민주화의 희생양을 자처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신부님께서 짧은 생애를 마감하시고 나서야 밝혀진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살아생전 신부님께서는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부님의 장례 미사가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신부님으로부터 이런 저런 물질적인 도움, 정신적인 도움,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는 사람들의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평소 신부님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늘 없었습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 수배 대상자 학생들, 가난한 노동자들이 찾아와서 손을 벌리니 돈이 남아 나지가 않았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남의 빚보증 서준 서류만 잔뜩이고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군부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을 하는데 가장 큰 도전은 재정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로 회의를 하다 보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분이 김승훈 신부님이었답니다.

 

도움은 물질적인 도움에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던 당시 수많은 단체에서 신부님의 이름을 요청할 때 기꺼이 서명해주셨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셨습니다. 노동자들이 모임이나 집회 장소를 못 구할 때는 기꺼이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던 성당을 사용하도록 기꺼이 내어주곤 하셨습니다.

 

신부님의 미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군부독재 시절 신부님 곁에는 언제 어디서나 당신을 사찰하는 정보과 형사가 따라붙었는데, 신부님께서는 그들까지 살뜰히 챙기셨습니다. 정말이지 품이 넉넉한 큰 어른이셨습니다.

손톱만한 작은 나눔이나 희생도 뻥튀기처럼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너무나 부끄럽게 만드시는 김승훈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처럼 소리소문없는 자선과 희생,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봉헌이요 단식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에 관여하시는데, 교회가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의 손발은 누가 대신할 것인가? 교회가 사회 문제, 그중에서도 가장 무력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중세 교회와 다를 바 없다.”(-김승훈, 주님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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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하느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이참에 우리의 모임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

등산 모임,

연구 모임,

동창 모임 등.

 

이런 모임은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그 목적이 서로 간의 친목 도모나 동호회 활동이나 같은 관심사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며 싫으면 그냥 흩어지는 그런 모임입니다.

 

상인들의 모임, 의사들의 모임, 노동자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서로 간의 필요 충족과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모입니다. 당연히 필요 없어지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집니다. 제법 고상한 목적의 모임도 있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와 같이 인류애의 실현을 위한 모임입니다.

어제 저희 <여기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은 어떤 모임일까 생각해봤는데 저희 모임도 이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공익 모임이지만 앞의 다른 모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인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 사랑을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적이 아주 고상하고 매우 신앙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 협동조합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활동 단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도 있지만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이 기본 의미입니다. 가족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가족이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또 어떤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모이지 않고, 순전히 부모를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도 하느님 자녀들이 하느님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나고, 교회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사람이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고, 그것은 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각 안에서 사람은 가깝고 하느님은 멉니다. 인간 사랑은 가깝고 하느님 사랑은 멀기만 합니다.

이렇게 먼 하느님 사랑을 가깝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이유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려고 하시니 자기 사람들을 뺏어간다고 생각한 세상 권력자들이 주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으로 모였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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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나는 누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는다.

회개하라, 살리라.”(에제18,31ㄱ.32)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많이들 아프고 병든 모습들입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고 제대로 된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매우 적습니다. 정말 길을 잃고, 희망을 잃고, 빛을 잃고 방황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상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너무나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특히 지도자들은 기도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해야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가 따릅니다. 사순시기 막바지입니다. 역시 답은 단 하나,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몫의 일을 하며 제대로 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새벽 새롭게 눈에 띈 말마디들이 고마웠습니다.

1.서울 이경상 주교의 문장이 확정되었고 사목표어가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Vivere In Corde Jesu)”,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사목표어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예수님 성심으로 살고 싶음은 믿는 이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2."세상과 벽을 쌓는다면 갇혀있는 나와 마주할 뿐이다. 그러니 사람이 지겹다면 오히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라. 하루 아침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먼 곳으로 떠나면 무지렁이로 끝날 뿐이다."-다산

 

3.교황청 설교가 칸타라메사 추기경의 다섯 번째 사순강론 성서 말씀도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고 청중 맨앞 한복판에 경청하는 교황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누구든 죽더라도 살 것이고, 살아서 믿는 누구든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음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웅변하는 강론이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은총이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닌 하느님 섭리의 결과요, 신의 한수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곤 도대체 해명될 수 없는 공동체 삶의 신비입니다.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선물같은 존재요 우리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 그리고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면서 수도공동체 삶을 “렉시오디비나”했을 때의 깨달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4.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

 

넷으로 요약되는 하느님 섭리의 깨달음이요, 지금도 이런 깨달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은총의 섭리안에서 진행된 수도원 역사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금요강론의 주제도 “하느님의 섭리”였고 그 내용을 일부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당신만이 아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모든 것을 완성해 나가십니다. 그분이 지으신 것은 잠시도 그분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우리가 그분의 영원한 계획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17,28)

 

하느님은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좋고 나쁜 모든 일 안에, 심지어 고통스러운 일들과 무의미해 보이는 우연 속에도 존재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이라는 삐뚤빼뚤한 선 위에서도 반듯하게 쓰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우리 모두 인간의 존엄한 품위를 잃지 않고 반듯하게 사시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이런 모범적 섭리의 인물이 오늘 복음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침묵중에 말씀하시지 않지만 대사제인 카야파가 우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섭리를 밝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입니다. 이래서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니 이 또한 하느님 섭리안에서 진행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시니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착잡했겠는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구원 섭리를 굳게 믿으며 묵묵히 흔들림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어 당신 몸의 성전을 통해 영원히 우리 삶의 일치의 중심이 될 것임을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밝혀주고 있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구원 섭리의 원대한 꿈의 실현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파스카 예수님을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안에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대로 우리 모두 이 거룩한 성전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이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안에 이뤄지는 일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허락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참 좋은 협력자가 되기 위해 하루하루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참으로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리라.”(예레31,10ㄹ).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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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11테러를 모두 잘 아실 것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2,996명이 사망하고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슬람 테러 단체에 의해 납치된 4대의 비행기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워싱턴의 국방부 펜타곤 청사, 그리고 백악관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첫 번째 비행기는 제1세계무역센터를, 두 번째 비행기는 제2세계무역센터를, 세 번째 비행기는 국방부 펜타곤 청사를 무너뜨렸습니다.

이 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은 납치범들이 하라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그 결과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납치범들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 결과 이 비행기는 유일하게 테러범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원 목표였던 워싱턴 D.C가 아닌 펜실베이니아 주 근처 광산 벌판에 추락하고 맙니다. 이 안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죽었지만, 도시 안에서의 충돌을 막아 많은 목숨을 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으로 많은 목숨을 살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또 직접 당신의 십자가로 보여 주셨던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주님께서 알아서 해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일 따름인데, 도구의 역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들의 걱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표징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 점령자 로마인들이 쳐들어와서 민족들을 짓밟을 것이라는 걱정입니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안위만을 걱정하면서 백성 모두를 진정으로 살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으로 이끌 예수님을 없앨 생각만 합니다. 로마가 싫어할 것이라며 미리 앞서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십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피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희생만이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습니다. 특히 사랑의 삶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으면서 보여 주신 것으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쉽고 편한 것만 선택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주님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변화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묵상하면서, 내일부터 시작하는 성주간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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