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6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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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6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by 필로테아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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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6일 화요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6일 매일미사

 

바오로 미키 성인은 1564년 무렵 일본 오사카 근처에서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회 소속의 대학을 졸업한 뒤 수사가 된 그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바오로 미키 수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 때 25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뒤 나카사키로 압송되어, 1597년 2월 5일에 십자가 위에서 순교하였다. 1862년 그를 비롯한 동료 순교자들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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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니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간청을 들어주십시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8,22-23.27-30
그 무렵 22 솔로몬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보는 가운데
주님의 제단 앞에 서서, 하늘을 향하여 두 손을 펼치고 23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위로 하늘이나 아래로 땅 그 어디에도 당신 같은 하느님은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당신 앞에서 걷는 종들에게
당신은 계약을 지키시고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27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
28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 종의 기도와 간청을 돌아보시어,
오늘 당신 종이 당신 앞에서 드리는 이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29 그리하여 당신의 눈을 뜨시고 밤낮으로 이 집을, 곧 당신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이곳을 살피시어,
당신 종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30 또한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드리는 간청을 들어주십시오.
부디 당신께서는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어주십시오.
들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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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그때에 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2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3 본디 바리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은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
한 움큼의 물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으며,
4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이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은데,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이나 침상을 씻는 일들이다.
5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7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9 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느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린다.
10 모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를 욕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11 그런데 너희는 누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하고 말하면 된다고 한다.
12 그러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하게 한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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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묵상

제1독서에서 솔로몬은 자신이 지어 봉헌한 성전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 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성전이라는 물리적인 장소에 매이지 않는 분이심을 잘 알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면 성전에서 하느님과 만나게 되리라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교회 안에 하느님의 현존은 성전의 외적인 화려함과 장엄함이 아니라 그곳에서 드리는 참되고 진실한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내면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서는 종교 지도자들과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문제로 논쟁을 벌이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정결법을 근거로 손을 씻는 행위가 중요하 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정결법의 진정한 의미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밝히십니다(7.20-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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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결함은 손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과 나만이 아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결 정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을 가볍게 여기면서 외적인 행위에만 집중하는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하느님을 입술로 공경하지 말고 마음으로 섬기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꾸짖으십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내적 생활'이기에 우리가 단순 히 외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생활 을 하려면 계명이 담고 있는 정신을 잘 알아야 하며, 그 정신에 따라 마음을 다하여 이를 지켜야 합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이란 이처럼 내면의 가치를 어렵지 않게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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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많이 하는 짓들"

 

 예전에 제가 본당에 잠깐 있을 때 옆 교회 전도사가 저를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앞둔 분이었는데 기도할 때마다 그 여자분 생각이 나서 너무 괴로웠고, 그래서 일생 독신으로 사는 신부에게 무슨 비법이 있나 배우려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온 김에 하나는 따지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왜 천주교 신부는 그렇게 술을 많이 먹느냐? 성경에 술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제가 성경에 하느님께서 흥겨운 술을 주셨다고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도 먹보요 술꾼으로 비난받으실 정도로 드시지 않았느냐? 이렇게 반박했지요. 둘 다 아전인수인 셈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무엇입니까? 저기 논에 물 대는 것이 아닙니까? 물을 끌어다 자기 논에 대듯이 우리 인간은 권위 있는 말을 서로 끌어다 자기주장을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는 데 쓰지요. 술을 왜 안 먹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안 먹어야 하는 거지요. 술을 왜 먹어야 합니까? 사랑 때문에 먹어야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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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희 저녁 식당에 오셨습니다. 지금 저희 "여기 밥상" 식당이 공유식당을 시작하였습니다. 점심은 3000원짜리 식당을 그대로 하고 저녁은 이주민 일자리 창출 차원에서 이주민 자매가 제값을 받는 장사를 하고 그래서 술도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옆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시끄럽고 음식에 대한 불평도 막 늘어놓는 것입니다. 이처럼 개신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대 한국 사람들이 술을 먹고 많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아예 술을 못 먹게 하였는데 그것이 한국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손을 씻는 정결례도 이스라엘의 전통일 뿐입니다. 요즘 청결을 강조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저는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흙 가지고 놀지도 못하게 하고 돌아오면 꼭 손을 씻게 하는데 적당히 균들과 함께 살아야 싸워 면역력이 생길 텐데 너무 지나쳐 오히려 아이들의 면역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에 영성적 의미도 있지요. 씻어야 할 더러운 손은 먼지가 묻은 손이 아니라 뇌물을 받아먹은 손이요 피를 묻힌 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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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어긋나는 더러운 손은 놔두고, 제 건강을 챙기기 위해 손을 씻는 정결례는 오늘 복음의 사람들처럼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남을 해치는 뒷담화나 험담은 하지 말아야 할 짓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위로와 격려와 힘을 주는 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짓은 어떤 짓들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OFM,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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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바위 안에 천사가 갇혀 있음을 느끼고 그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말합니다. "나는 대리석 속에 갇힌 천사를 보았고, 그가 차가운 돌 속에서 풀려날 때까지 돌을 깎았다."

미켈란젤로의 천사 조각상

 

 미켈란젤로는 원석을 다듬어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었습니다. 그 누구도 원석만을 보고서는 "여기에 아름다운 다비드상이 있군.", "여기에 천사가 갇혀 있군."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기에 지금까지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원석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실제로 우리는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갑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자녀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고, 누군가의 사랑에 큰 힘을 얻어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례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더 좋은 사람이 되어 가게 만드는 사랑을 향해 '사랑의 미켈란젤로 효과'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천사를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천사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원석만을 바라보고서 '쓸데없는 돌이네.'라며 단정을 지어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 안에 천사가 있는데, 사랑을 통해 그 안의 천사를 꺼낼 수 있지만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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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제자들을 꾸짖고 있습니다. 분명 조상들의 전통에 맞지 않는 행동이고, 또 비판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두고 위선자라며 꾸짖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8)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결 예식이 합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서원을 채우고자 성전에 예물을 바치는 것이 의무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그저 사람의 전통일 따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오로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사랑으로 바라보고 사랑으로 판단한다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특별한 곳에서만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관심과 반응을 통해 사랑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웃의 몸과 성장을 응원하면서 이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진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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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가?

-관리인의 판단기준-

 

새벽 굿뉴스 게시판에 말마디가 첫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음과 부활은 그때 그곳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오늘 창세기 천지창조를 묵상하던 중 말마디를 다음처럼 바꿔봤습니다. "창조와 구원은 그때 그곳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주님은 오늘 지금 이곳에서 창조와 구원활동을 계속하십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가 이의 생생한 표지입니다. 관리인들인 우리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대적입니다.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제1독서 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이 참 장관입니다. 눈에 보이듯 실감나는 생생한 묘사입니다. 오늘은 닷샛날, 엿새날의 창조에 이어 이렛날의 안식일로 천지창조의 대단원이 막을 내립니다. 늘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공존공생의 생명들로 충만합니다. 참 다양합니다. 참 풍요롭습니다. 참 밝습니다. 참 자유롭고 평화롭고 자연스럽습니다. 창조가 끝난 후의 하느님 반응에는 처음으로 '참'이란 말이 붙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새날이 지났다."

하느님 보시니 참 좋은 천지창조 당시의 세상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보신다면 어떨까요? 하여 강론 제목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가?-관리인의 판단기준-"으로 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은가? 너무 타락하고 변질된 모습에 자연세상은 물론이고 인간세상에 실망투성이 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쓰레기 더미가 된 세상에 너무 낙심하여 등을 돌리고 눈을 감고 싶을 심정일 것입니다. 온 지구가 쓰레기장이 된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자연도 파괴되고 상처 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땅도 하늘도 물도 흙도 인간도 생물도 식물도 병들어 온전치가 않습니다. 수도원의 쓰레기만 하더라도 30년 전 초창기와 지금은 비교도 안됩니다. 너무 낭비와 소비가 일상화된 현실입니다. 13년 전 2006년 이때쯤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 흔적 없이 사는 게/잘 사는 거다/쓰레기 적게 내고 사는 게/잘 사는 거다

있는 듯 없는 듯/보일 듯 말 듯/사는 게/잘 사는 거다 나무처럼 사는 게 잘 사는 거다/무공해 나무처럼! -

이 모든 공해와 오염의 주범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사람들입니다. 주인인 하느님께 위탁받은 관리인으로서의 책임을 망각하거나 방기한 탓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오늘날 인간들의 모습 역시 환멸투성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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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의 절정인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며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축복받는 인간이요 만물을 다스리라는 관리권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위탁받은 위대한 인간들입니다. 하여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관리인인 인간이 하느님의 눈을, 하느님의 시야를 잃음으로 자초한 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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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간신문 한쪽은 폐기물 필리핀 불법수출 기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현재 전국에 불법, 방치 폐기물이 100만-200만 톤이라 하며 폐기물을 소각하는데 1t당 25만 원 정도가 소요되어 이의 처리도 문제라 합니다. 또 신문 문화면 한쪽은 "대중문화 '좀비 신드롬-소복귀신의 나라 한국에 낯선 좀비가 대중문화를 습격하고 있다." 제하의 기사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부산행', '킹덤' 한국 영화 역시 좀비물의 영화입니다. '좀비(Zombie)'라는 단어는 본래 카리브 섬나라 아이티의 부구교 무당들의 주술에서 유래된 말로 '산 사람의 살을 먹으며 돌아다니는 시체'를 뜻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타락상의 절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좀비현상입니다. 도대체 좀비물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에 사람들이 '하느님 중심'을 잃은 결과의 자연적 귀결입니다. 하느님 중심에 뿌리내리지 못해 정처 없이 떠다니는, 부유(浮游)하는 영혼들이 바로 귀신이자 좀비이자 괴물인 것입니다. 길다 싶지만 어느 선각자의 견해를 나눕니다.

"참으로 암울한 시대다. 우리는 지금 근대적 문명생활이라는 것을 향유하고, 높은 생활수준을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이 근대적 문명이 확대되면 될수록 문명은커녕 기초적인 생존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질지도 모를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너무도 역설적인 사태에 직면해 있다. 근대문명이 석탄과 석유, 천연가스등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시스템인 이상, 이러한 상황이 언젠가 도래할 것임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지금 인류사회는 인공지능이나 생명과학기술을 비롯한 소위 첨단 기술의 발달로 조만간 종래 우리가 '인간'이라고 호명해 왔던 존재들이 소멸할지 모르는 실로 기막힌 상황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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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내 죽은 뒤 세상이야 망하든 말든 알 게 뭐야."란 속담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지창조 본연의 인간 제자리를 찾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세상입니다. 인간도 자연 피조물의 하나입니다. 자연을 떠나 살 수 없는 인간입니다. 참으로 겸손히 비우고 비워 공존공생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외한 사람들의 변질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만이 하느님을 닮은 참 사람의 모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대치한 본말전도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주님이십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한 말씀이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는 물론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따른다.” 바로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경천(敬天), 경배(敬拜), 효경(孝敬), 경탄(敬歎), 경애(敬愛), 공경(恭敬), 경청(敬聽), 경외(敬畏), 경건(敬虔), 존경(尊敬) 등 하느님 향한 '경(敬)'의 마음을 잃어버린, 무례하고 불손하고 천박한 불경不敬의 시대가 오늘날 위기의 원인임을 깨닫습니다. 전례 참여 시 필수적인 자세가, 공부하는 사람의 기본자세가 '경敬의 자세'입니다. 아이들에게 맨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경외를 가르쳤고,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를 가르쳤고, 현대인들은 지식을 가르친다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경외의 놀라움에서 신앙은 시작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그대로 경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경천애인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유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경천애인의 삶을, 겸손하고 검박(儉朴)한 무공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와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시고 구원하시어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성 베네딕도 요셉수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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