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월7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24년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월7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2024년 연중 제5주간 수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4.
반응형

2024년 2월 7일 수요일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매일미사 묵상 & 프란치스코 교황 메세지

 

 

2월7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반응형

제1독서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았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0,1-10

무렵
1
스바 여왕이 주님의 이름 덕분에 유명해진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까다로운 문제로 그를 시험해 보려고 찾아왔다.
2
여왕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향료와 엄청나게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싣고 예루살렘에 왔다. 여왕은 솔로몬에게 와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모두 물어보았다.
3
솔로몬은 여왕의 물음에 다 대답하였다. 그가 몰라서 여왕에게 답변하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4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모든 지혜를 지켜보고 그가 지은 집을 보았다.

5

또 식탁에 오르는 음식과 신하들이 앉은 모습, 시종들이 시중드는 모습과 그들의 복장, 헌작 시종들, 그리고 주님의 집에서 드리는 번제물을 보고 넋을 잃었다.

6

여왕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내가 임금님의 업적과 지혜에 관하여 내 나라에서 들은 소문은 과연 사실이군요.

7

내가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 직접 보니, 내가 들은 이야기는 사실의 절반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지혜와 영화는 내가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8

임금님의 부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언제나 임금님 앞에 서서 임금님의 지혜를 듣는 이 신하들이야말로 행복합니다.

9

주 임금님의 하느님께서 임금님이 마음에 드시어 임금님을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려놓으셨으니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임금님을 왕으로 세워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게 하셨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여왕은 금 백이십 탤런트와 아주 많은 향료와 보석을 임금에게 주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 임금에게 준 것만큼 많은 향료는 다시 들어온 적이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2월7일 매일미사
어리석은 부자 관련하여 하단에 올려드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재산과 '인색함'에 대한 말씀 꼭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반응형

 

복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4-23

14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15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16) 17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19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20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21) 22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반응형

 

 

 

오늘의묵상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반응형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 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질적인 영역보다 영적인 영역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정결을 결정하는 기준이 장소나 사물이나 음식과 같이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있었고, 이러한 부정한 것들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는 데 집착하였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 있지 않고, 그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이 말씀을 조금 더 확장해서 묵상하여 보면, 죄에 대한 책임이 어 디에 있는지도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죄로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책임은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반응형

 

외적인 조건이나 상황이나 문 화가 나를 죄짓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죄를 짓는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주변 여건과 상황이 우리를 직접 물들이거나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택권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밖에서 우리를 유혹할 수는 있지만, 죄가 시작되는 곳은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하는 우 리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었을 때, 밖의 세상 또는 다른 사람을 탓하기보다 그것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였고 무엇을 선택하였는지, 자신의 내면을 들여 다 보아야 합니다. 야고보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야고 1,14)라고 말하였듯이 외부의 유혹은 우리 내부의 욕망과 함께일 때 그 힘을 발휘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반응형

 

 

 

 

지난달 24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열린 일반알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죄에 해당하는 돈에 대한 집착을 '인색한 마음'으로 설명하면서 악덕과 미덕에 대한 교리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인색한 마음은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과 약간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준다고 전하셨는데요.

tps://www.youtube.com/watch?v=6CNUpTTXzWct=2035s

바티칸뉴스

 

(안녕하세요, 필로테아입니다. 최근에 교황님께서 전하신 '인색한 마음'에 대한 교리의 내용이 오늘 복음 묵상하며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바티칸뉴스에 나온 내용을 직접 번역하여 정리해 올립니다.)

"마음의 병인 '인색한 마음'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인간을 관대함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돈에 대한 집착의 한 형태인 "인색함"(avarizia)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인색한 마음은 통장 잔고와 관련 없이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만 한정된 죄가 아니라 모두와 관계가 있는 악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색하다는 것은 지갑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사막의 교부들은 인색함이라는 사악한 악덕이 수도승들까지 어떻게 사로잡았는지 분석했습니다. 규모가 있는 유산을 포기하고 독방에 들어가 고독한 삶을 택한 수도승들마저 떻게 가치 없는 물건에 조차 집착하고 인색한 마음에 빠졌는지 알아보면서 수도승들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며 그것들을 서로 빌려주거나 아낌없이 나눠주지도 않았다는 것을 분석했습니다. 사소한 물건과 일에 대한 집착은 그들의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그러한 물건들은 곧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상처럼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난감을 꽉 쥐고 "이건 내 물건야! 내 거라고!"라는 말을 반복한 아이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는 현실과의 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장강박과 같은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응형

 

인색함을 내쫓는 성찰 방법

이 병을 고치기 위해 사막의 수도승들은 과감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죽음 묵상법'을 제안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아무리 많은 부를 축적한다 하더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모든 재산을 관에 넣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 부를 함께 가져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색한 마음이라는 사악한 악덕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드러납니다.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물과 맺는 소유의 유대는 겉으로만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땅은 사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땅 위에 머무르고 있지만 이방인일 뿐이고 거류민입니다 (레위 25,23 참조).

 

반응형

 

우리는 간단한 성찰을 통해 인색함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근본적인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려는 시도입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잡는 순간 우리의 손가락을 통해 미끄러져 나가는 모래 알갱이들처럼 안전을 추구합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떠올려 보십시오.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둔 그는 수확한 곡식을 모아둘 곳간을 더 크게 지을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그 부자는 모든 것을 계산하고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부를 획득한 후, 더 큰 부를 위해 금고를 만들고 모든 것을 계산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변수인 죽음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라고 말합니다.

반응형

어떤 경우 도둑이 우리를 위해 그런 수고를 덜어줍니다. 복음에는 여러 번 도둑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비난받을 만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훈을 얻게 해 줍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반응형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한 수도승이 잠들어 있는 동안 독방에 보관하고 있던 여러 물건들을 훔친 도둑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에서 깬 수도승은 이 사건에서 전혀 놀라지 않고 도둑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도둑을 찾게 되었 때, 그는 훔친 물건을 돌려받는 대신 독방에 남아있던 물건들을 더 건네주며 "당신이 이 물건도 가져가는 것을 잊으셨군요!"라고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산의 소유주가 될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되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결국 재산과 돈이 우리를 소유할 것입니다. 어떤 부자들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고, 쉴 시간조차 없습니다. 재산을 축적하게 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항상 긴장 속에 예민하게 됩니다. 많이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합니다.

 

 

반응형

 

재산 자체가 아닌 소유할 책임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

그들은 재산과 부 자체가 죄가 아닌, 재산을 소유할 책임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을 망각합니다. 하느님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는 만물의 주님이지만,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과 같이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 코린 8,9). (하느님은 부자이시지만,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고, 그 가난으로 우리를 부자로 만들셨습니다.) 인색한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은 그것이 축복의 원천이 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불행의 막다른 길로 빠져들 수 있습니다.

반응형

인색한 사람의 삶은 추악합니다. 저는 다른 교구에서 만난 한 형제의 에피소드를 기억합니다. 그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병환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고, 형제들이 돌아가며 어머니를 돌보았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저녁 요거트를 하나씩 드셨는데, 매일 먹는 요거트가 아까워서 그는 어머니에게 아침에 요거트를 절반만 주고, 저녁에 나머지 절반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색함입니다. 이것을 재물에 대한 집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지않아 이 형제가 사망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조롱 섞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네요.", "그가 모든 재산을 가져가고 싶어서 관뚜껑이 닫히지 않는다고 해요." 이렇게 인색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됩니다. 마지막날에 우리는 우리의 육신과 영혼을 주님께 드리고,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세상에 남겨놓게 됩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너그러워야 합니다. 모든 이에게 너그러워야 하고,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반응형

 

 

 

 

어리석었음을 깨달은 기쁨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당신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참에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에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지적 능력으로 아는 것이 있고, 진리나 진실처럼 지혜로 깨달아 아는 것이 있는데 제 생각에 깨닫는다는 말은 <깨다>와 <알다>가 합친 말입니다. 그러니까 1+1=2라는 것은 지적 능력만 있으면 되지 깨달아 알 것까지 없지만, 진리나 진실은 반드시 지혜로운 자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말의 참과 거짓은 지혜로운 자만 깨달아 알 수 있는데 거짓이 깨져야 참이 드러나듯 거짓을 참인 줄 알던 어리석음이 깨져야 지혜가 열리고 참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은 항상 자기가 어리석었고 바보였음을 깨닫고, 그래서 거짓을 참인 줄 잘못 알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마치 알이 깨지듯 거짓을 참인 줄 알던 자신이 크게 깨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처음부터 참만 알고 거짓은 아예 알지 못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보통의 우리는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고,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어리석음과 잘못된 앎이 있었기에 깨달음이란 새로운 앎도 나에게 있고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기뻐해야 합니까? 그러나 깨달음의 기쁨을 위해 앞서 슬픈 것이 솔로몬처럼 기쁘다가 나중에 슬퍼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반응형

 

다시 말해서 우리처럼 젊어서는 어리석어 돈 많은 것이 행복인 줄 알다가 돈도 잃고 건강도 잃는 아픔과 슬픔을 겪게 되지만 그 덕에 늙어서 참 행복의 지혜를 깨달아 기쁘게 되는 것이 낫습니다. 내일 독서에서 보게 되듯이 솔로몬처럼 젊어서는 지혜롭게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아 칭송받고 행복하다가 늘그막에 지혜의 눈이 멀어 슬프게 되는 것은 참 슬프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손이 깨끗한 것보다, 마음이 깨끗한 것이 더 낫다는 진리를 깨달으라고, 그래서 마음이 깨끗한 진실한 사람이 되고, 진실한 생활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제 주일에 글을 올릴 수 없을 경우, 이메일로 글을 보내드리겠다고, 그러니 원하시는 분은 이메일을 알려 달라고 했더니 아주 많은 분이 이메일을 알려 오셔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카톡으로 보내달라고도 하시고, 어떤 분은 매일 보내달라고도 하시는데 저는 카톡을 할 줄 모르고, 매일 보내드리는 것은 너무 큰 수고가 필요하기에 불가능합니다. 이점을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님)

 

 

반응형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에서의 흥미로운 조사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동차가 신호에 걸릴 때, 외국인 노동자가 서 있는 차의 앞 유리를 재빨리 닦습니다. 그때 운전자는 그들에게 동전 몇 닢을 건네곤 합니다. 그렇다면 동전이 가장 많이 걷히는 도시는 잘 사는 도시 밀라노인지 아니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나폴리인가라는 비교 실험을 한 것입니다. 어디일까요? 당연히 부유한 도시인 밀라노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도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나폴리였다고 합니다.

새 성전을 지은 신부님께서는 본당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많은 봉헌을 해서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봉헌금을 살펴보니 돈 많은 사람의 봉헌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의 봉헌들이 모여서 이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해서, 또 여유가 없어서 봉헌하지 못한다는 것은 핑계였습니다.

 

반응형



예전에 만났던 한 자매님도 기억납니다.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였는데 어떤 자매님께서 저를 찾아와서 신학생을 위해 써달라면서 후원금을 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이분은 생활 보호 대상자였습니다. 신학생들을 후원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득했지만, 여유가 없어서 기도로만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입니다. 꽤 많이 받은 합의금으로 살림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실 것이 무엇인지를 기도한 뒤에 성소자를 위해 써달라며 모두 가지고 와서 봉헌하셨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멋진 모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유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반응형



깨끗한 마음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자기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그 마음의 상태에 따라 사람을 깨끗하게도 하고 더럽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준수만을 생각합니다. 율법을 잘 지킴으로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자기들이 하느님께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맞았을까요? 그들의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이 위선자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마음은 전혀 보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올바르게 보이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죄로 가득한 마음 역시 받아주십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위선의 마음은 절대로 받아주시지 않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반응형

 

 

 

 

사람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히는 것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바로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음식은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자명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사람에게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밖의 것들이 아니라 사람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밖에서 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언젠가의 재미난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집무실을 찾은 형제가 멋쩍은 표정으로 미안해하는 것이었습니다. 화장실인 줄 알고 집무실을 노크했다는 것입니다. 화장실과 집무실의 갈림길에서 화장실이 아닌 집무실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의 깨달음입니다. '아, 면담고백성사가 수시로 진행되는 집무실은 영적 화장실이구나. 아래의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이 아니라 위의 입으로 배설하는 영적 화장실이구나. 아래로 배설하는 화장실과 위로 배설하는 영적 화장실인 집무실이구나.'생각하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필요한 두 개의 육적, 영적 화장실입니다. 아래로 나온 것들은 화장실에 이어 정화조로 가서 깨끗이 정리되듯 위의 입에서 배설된 나쁜 생각과 말과 행동들도 영적 화장실과 정화조 같은 고백소에서 깨끗이 정리되고 하여 마음도 사람도 깨끗해집니다.

 

 

반응형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육적, 영적 화장실이 없어 아무 데나 위로, 아래로 배설해 버린다면 사람이든 환경이든 오염되어 더럽혀질 것입니다. 특히 입에서 배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이나 말과 행동들은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분위기도 더럽힙니다. 그러니 부정적 나쁜 생각이나 말과 행동은 아무 데서가 아닌 고백소나 기도소인 성전에서 배설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땅이 좋아 명당이 아니라 착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 묻힌 곳은 모두가 명당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성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머무는 곳이 성지란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사람이, 마음이 깨끗하고 거룩하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음식이 아니라 탐식의 마음이 사람을 더럽힙니다. 하여 불교의 오관계가 있고 우리의 식사 전기도와 기도가 있습니다. 탐식의 마음을 정화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식사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수도교부 성 에바그리우스의 여덟 가지 악덕 중 첫자리에 오는 탐식입니다. 탐식貪食은 탐애(貪愛)의 간음으로 이어 탐욕貪慾의 욕심으로 이어집니다. 불교의 식사 전 기도와 같은 오관계는 식사 전 잠시 되새겨도 유익할 것입니다.

1.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2. 내 덕행으로 받기 부끄럽네

3.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4.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며

5. 진리를 실천하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이런 기도가 탐식의 마음을 정화하여 깨끗한 마음으로 식사하게 합니다.
극도로 쇠약해진 스님에게 고기를 약으로 삼아 먹으라 권한 어느 분의 조언도 생각납니다. 그러니 마음의 정화가 우선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사랑이 답입니다.
죄가 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죄의 상처에 대한 최고의 처방약은 사랑뿐입니다. 하여 우리의 모든 사랑의 수행이 목표하는 바 마음의 순결입니다.
마음이 좋고 깨끗해야 생각도 말도 표정도 눈빛도 음성도 행동도 좋고 깨끗합니다. 모두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우리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 거룩한 성전에서 함께 끊임없이 평생 매일 바치는 사랑의 찬미와 감사의 공동 시편전례기도와 미사전례가 그리도 고맙고 유익한 것입니다.

 

 

반응형

 

마음의 순결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현실이기에 마음의 정화와 성화에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시편처럼 끊임없는 하느님 사랑의 찬미가 우리 영혼을, 마음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이에 더하여 매월 1회 고백성사의 은총이 또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합니다.

시편 37장 30-31절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자아내며, 그의 혀는 옳은 것을 말하느니라.

하느님의 법이 그의 마음에 있어, 그의 걸음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하느님의 법이,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의 계명이 즉 하느님이 우리 마음 안에 있어 순수한 마음에 순수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겸손과 온유, 지혜와 자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우리를 안팎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