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3일 토요일 복음묵상(매일미사) 및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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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3일 토요일 복음묵상(매일미사) 및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

by 필로테아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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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2024년 2월

 

(직접 번역한 2월 2일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의 말씀입니다. 불펌을 금합니다)

주님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동안 예언자들은 주님의 오심을 예언하였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라고 선포합니다(말라키 3장 1절) 시메온과 한나는 이 간절한 기도의 상징이자 현존하는 모습입니다. 성전에 주님이 오실 때, 그들은 성령으로 비추어져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아이를 알아봅니다. 그들은 그분이 오심을 평생 그를 기다려 왔습니다. 루카복음의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루카 2장 25절)”에서 시메온을, 한나에 대해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장 37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도를 인내하는 시메온과 한나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영원한 불꽃처럼 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이는 들었지만 마음은 젊습니다. 그들의 눈이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기대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눈이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때에 주십니다.”(시편 145장 15절)의 시편처럼 그들은 지치지 않고 희망으로 하느님께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항상 기대와 희망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여정 속에서 그들은 고난과 실망을 겪었지만 패배하기 위해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희망을 받는데서 ‘은퇴’를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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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마리아가 품고온 어린아이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찾고 갈망하던 민족의 메시아가 온 것을 알고, 때가 왔음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기대하며 깨어 있음으로써, 그가 온 새로움 속에서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실망과 체념 속에 희망을 가두지 마라”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매일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시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인생과 시간의 끝에서 그분께서 오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스스로 깨어있음을 권하시고, 경계함과 기다림을 계속하라고 권하십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우리의 영혼이 졸기" 내버려 두고, 마음이 잠들게 놓아버리고, 영혼을 마비시키고, 실망과 체념의 어두운 곳 구석에 희망 가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선물을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이 있나요? 늘 찾아오는 하느님을 잊을 정도로 때로는 우리 자신과 사물에, 일상의 강렬한 리듬에 너무 휘말리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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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조차도 '할 일이 많다'는 명목으로 일상에서 주님을 찾는 일을 소홀히하고 주님을 매일 찾는 것을 방치하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때로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 대해 성공의 가능성을 계산합니다. 이는 기쁨과 겸손으로 부여받은 작은 씨앗을 기르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곳까지 그 씨를 뿌리되, 하느님의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이지 않나요? 우리는 기다림, 즉 기다릴 능력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한 것인데, 그중에서도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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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가 말씀하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만드는 것 두 가지>

1.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만드는 첫 번째 장애물은 ‘내면의 삶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지침과 피곤함이 놀라움보다 우세해져, 습관적인 것들이 열정을 대신하게 되면서, 우리가 영적인 여정에서 인내심을 상실할 때, 부정적인 경험, 갈등 또는 겉으로 보기에 지연되는 것 같은 삶의 열매들이 우리를 짜증스럽고 씁쓸한 삶을 사는 사람들로 변화 시킬 때 발생하는 것입니다. (삶의) 쓰라림에 대해 반추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가정에서나 그렇지 않은 어느 공동체나 가정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식초를 담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새콤한'(신선 한 건 내지는 달콤한 것으로 해석됩니다)것을 찾으며 사람들이 씁쓸함을 통해 물을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이럴 때는 잃어버린 은혜를 되찾고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깊은 내면의 생활로 돌아가서, 기쁨과 겸손의 마음을 찾고, 침묵과 감사의 영혼을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허망하게 싸우는 분투와 중보의 구체적인 기도로 되찾을 수 있으며, 무릎 꿇는 경배와 의지의 역작으로 성령과 함께해 온 힘을 기울이는 작품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 그 첫 신앙에서의 사랑과 놀라움, 기다림으로 회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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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만드는 장애물은 ‘세속적인 삶의 방식에 적응’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복음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세계는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찬양하며, 아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것에 몰입 되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비주의나 오락에서 삶의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하면서 세속적인 걱정과 불안에 희망의 성전을 내놓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우리 삶에 침묵이 상실되어 추방된 듯합니다.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침묵은 쉽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건강한 의미의 수동적 태도로, 자신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고 용기, 활동에 압도되지 않는 용기,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움직임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정신(세상의 영)이 우리의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생활, 개인적인 여정에 들어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적인 삶과 사도적인 사명은 기다림의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기도와 일상의 충실함 속에 성숙되고 기다린 다는 것은 능률이나 효율성의 신화로부터, 성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특정하려는 함정에서 우리는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때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항상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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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비주의자이자 철학자인 시몬 베유(Simone Adolphine Weil)는 저서 <신을 기다리며>(밀라노 1991, 196쪽)를 통해 우리는 밤중에 신랑의 도착을 기다리는 신부이며, "미래의 아내의 역할은 기다리는 것이다... 하느님만을 원망하고 나머지를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는 정신을 기도 속에서 기르고 영적 기다림으로 "성령의 수동성"에 대해 배워봅시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새로움에 우리 자신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처럼, 우리도 이 아이(기다림을 아이로 비유하신 것 같습니다)를 들어 올려 새로움과 놀라움의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주님을 환영함으로써 과거는 미래로 다시 펼쳐지고, 우리 안의 옛것들은 주님이 깨우는 새로운 것을 향해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신앙적인 삶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옛 것들의 힘"에 맞서 이를 거스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 안의 늙은이가 새로운 아이, 새로운 방식을 환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 우리의 오래된 삶에서 새로운 삶을 환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 하느님의 새로움은 자신에게 아이로 나타나며, 우리는 모든 습관, 두려움, 의혹(의심), 시기질투(부러움), 걱정 - 우리는 시기질투를 생각해 보십시오! - 걱정은 이 시기질투라는 아이와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아이를 껴안고, 그 아이를 환영하고, 그 아이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줄 것인가요? 이 새로움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길 환영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차랄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을 결합하려고 시도하면서 하느님의 새로움에 가능한 자신이 오래된 방식에 덜 방해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택할 것인가요?" (C.M. 마르티니, 아주 개인적인 것. 기도에 대한 명상, 밀라노 2009년, 32-33쪽/M. MARTINI, Something So Personal. Meditions on Prayer, 밀라노 2009, 32-33) 형제자매 여러분, 이 질문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이고, 공동체와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해야 하며, 우리는 성령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시메온과 안나처럼, 우리도 안절부절못한 가운데 성령에 감동받도록 기도합시다. 그들처럼 우리도 내면의 생활을 지키고 복음에 순응하며 산다면, 우리는 삶의 빛과 희망이 되는 예수님을 품을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성하 말씀_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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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3,4-13

그 무렵 솔로몬은 4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 위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

5 이 기브온에서 주님께서는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인 제 아버지 다윗에게 큰 자애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신 앞에서 진실하고 의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그토록 큰 자애를 내리시어, 오늘 이렇게 그의 왕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7 그런데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8 당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있습니다.

9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10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주님 보시기에 좋았다.

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12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13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 동안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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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듣는 마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 열왕기는 솔로몬의 청원 기도로서 듣는 마음과 분별 능력을 주십사고 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주십사고 청할까 생각해 봅니다. 나도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해야 할까? 분별의 능력을 청하는 것은 안 좋지 않을까? 그리고 듣는 마음보다 사랑을 주십사고 청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우선 불교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분별심이나 분별지를 안 좋은 것으로 얘기하지요. 이 분별심과 분별지에서 악이 발생하고 불행이 시작된다고 얘기하지요. 지어낸 얘기겠지만 인도에 어떤 사람이 갔을 때 한 식당에 들어갔더니 종업원이 바닥을 닦던 걸레로 식탁을 닦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걸레로 식탁을 닦느냐고 따지니 그 종업원은 아직도 당신은 구별하느냐고 오히려 어리석다고 하더랍니다. 유달리 더러운 것과 깨끗한 구별하는 사람, 그래서 결벽증이 있다고 할 정도로 조금의 더러움도 못 견디는 사람은 불행하지요. 그리고 다 좋은 사람이 행복하지 이것은 좋고 그래서 저것은 싫은 사람은 불행합니다. 그러니 이런 선악 분별심은 청할 것이 못 되고, 솔로몬이 청하는 선악 분별심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도 잘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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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선악은 하느님의 선과 악입니다. 자기중심의 선악 곧 내가 좋아하는 선과 내가 싫어하는 악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선과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주십사고 청하는 선악 분별력은 바로 하느님의 선과 악을 분별하고, 나의 선과 악이나 세상의 선과 악과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마약은 주십사고 청하고 약은 쓰니 싫다고 하잖습니까? 솔로몬은 또한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이것 참 훌륭한 자세입니다. 우리는 흔히 들으려고는 하지 않고 들으라고 하고, 통치자들은 더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데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달라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마음이지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귀가 너무 얇아서 하느님의 음성은 듣지 않고, 그저 인간의 이런저런 소리를 분별없이 듣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유혹하는 소리와 달콤한 소리에 하느님의 선악 분별력을 잃게 되고 백성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 반대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사람들의 소리를 가려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잘 믿는 사람 그리고 기도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소리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줄도 알고, 기도 안에서 사람들의 소리를 분별할 줄도 아는 사람이겠지요. 아무튼 듣는 마음을 달라는 솔로몬의 청원에서 위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들으려는 겸손과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는 사랑을 느끼며 이런 솔로몬에게서 배우는 오늘 저입니다.(OFM,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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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뉴욕 세계무역 센터 빌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비행기 테러로 자그마치 2,996명의 사망자와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911 테러입니다. 이때 시민들은 많은 연기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빌딩 속을 나와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탈출하는 이들의 흐름을 거슬러서 오히려 무너지고 있는 빌딩을 향해 역주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경찰관, 소방관 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비록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똑같이 위험합니다. 그러나 한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죽음이 있는 곳으로 역주행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셨음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도 단순히 살기 위해 도망치는 삶이 아닌, 진정한 생명을 위해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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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하는 것이라면서 죄를 범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하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주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더 큰 가치를 따르는 삶, 그래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나약함으로 그런 용기를 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협조자가 필요합니다. 함께함으로 용기를 내어 주님께로 같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는 사람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을, 어쩌면 보통 사람보다도 더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과 함께하면서 가르치셨고 세상에 전교 활동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 혼자서도 충분히 모두 다 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도 제자들을 뽑으시고 함께하신 이유는 우리 역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함께하면서 세상의 흐름에 역행하면서, 생명을 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세상의 흐름에 역주행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요? 주님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사랑이었습니다.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의 주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가엾은 마음인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빠다킹신부님 / 조명연 마태오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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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균형과 조화, 기도와 일"

 

무엇보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 역할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평범한 일상이 제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는 일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까요? 어제 ‘베드로 파브로 성인’ 전기를 읽으며 16세기 종교개혁 전후의 유럽 현실이 참 끔찍했습니다. 종교재판에 의해 이단자로 확정된 이들의 종교재판에 의한 공개 고문과 처형 및 화형식이 너무나 잔인했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이를 마치 축제처럼 구경하며 술을 먹고 이 장면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충실했던 자들인데 이처럼 이단자들로 몰리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미친 사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신盲信, 광신狂信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요즘 국내에서 전개되는 일을 봐도 똑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분명 객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견해는 극과 극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균형 잡힌 정상적 사고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지 깨닫게 됩니다. 삶의 균형과 조화가 참으로 필요한 사회입니다. 권위에 대한 존중과 신뢰, 순명의 정신도 필요하고요. 하여 제가 자주 면담고백성사때 강조하는 것이 기도와 일의 균형입니다. ‘하늘과 산’ 그림이 있는 수도원 로고를 휴대폰에 붙여 주며 당부하곤 합니다. 아마 수도원을 다녀간 수천명이 휴대폰에 수도원 로고를 붙였을 것입니다. “하늘은 기도를, 산은 일을 상징합니다. 하늘에 기도하고 땅에서 일하는 인간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분도 수도회의 모토입니다. 기도와 일이 균형잡힌 생활을 하고 로고를 볼 때 마다 하느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이 둘이니 ‘하느님’과 ‘죽음’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전인적 균형잡힌 삶을 위한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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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일에 하나를 추가한다면 공부(독서)가 되겠습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공부할 때 온전한 균형 잡힌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예수님은 참 철저했습니다. 앞서 복음 선포 활동차 파견됐던 열두 사도가 오늘 복음에서는 귀환하여 예수님 중심으로 모입니다. 마치 활동후의 관상처럼 자연스런 삶의 리듬입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삶의 중심과 질서에 관상과 활동의 균형은 절대적입니다. 일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때로 휴식이 필요할 때 죄책감없이 '노no' 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중독에 빠진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일만이 아니라 도박, 술, 인터넷, 등 중독사회같습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중독으로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판 이단은 ‘활동주의activism’라는 토마스 머튼의 말도 생각납니다. 선교활동후 외딴곳에서 관상의 성찰과 휴식, 충전의 기회를 갖게 하는 예수님의 배려입니다. 예수님 역시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외딴 곳에서 아버지와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시 현대인들에게 ‘고독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라는 토마스 머튼의 말이 생각납니다. 하여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자작시의 다음 대목에 많은 이들이 공감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교회나 수도원은 물론이고 믿는 이들은 누구나 앞문의 활동과 뒷문의 관상이 균형잡힌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둘 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니 둘이자 하나인 것입니다. 바로 히브리서가 이를 입증합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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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의 ‘입술의 열매’와, 선행과 나눔, 일의 ‘삶의 열매’를 제물로 바칠 때 온전한 영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목적 리더십이 돋보입니다. 참으로 겸손히 예수님께 순종하는 제자들입니다. 히브리서 역시 사목적, 영적 지도자들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권합니다.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순종의 덕이 으뜸입니다. 겸손히 개방하여 순종할 때 배웁니다. 비단 지도자뿐 아니라 주변의 부정적인 분들 또한 반면교사反面教师로 삼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전 어느 도반의 “나는 그분을 보면서, ‘아,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반대로 살아야 하겠다.” 말 또한 잊히지 않습니다. 지혜롭게 반면교사로 삼은 것이지요. 눈만 열리면 모두가 삶의 스승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일의 리듬이 절대는 아닙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예외적 상황에 대한 분별의 지혜가 긴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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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곳에서 관상적 휴식을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도착했을 때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그들의 모습에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합니다. 말 그대로 목자의 사랑입니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저는 때로 다음처럼 말마디를 바꿔 노래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부러울 것 없어라, 두려울 것 없어라, 걱정할 것 없어라” 등입니다. 일단 관상적 휴식을 보류하시고 주변의 필요에 응하시는 착한 목자, 주님의 분별의 사랑과 지혜가 감동적입니다. 매일미사나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가 이상적입니다. 미사의 관상은 하루의 활동으로 확산되고 하루의 활동은 미사의 관상으로 수렴됩니다. 수렴과 확산의 리듬 중에 이뤄지는 ‘삶의 전례화’, 관상적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이 균형 잡힌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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