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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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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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3월10일 주일미사

 

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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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제2독서

2024년 3월 10일 일요일 복음

가톨릭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장민준 가브리엘 신부님, 광주대교구 국내연학

 

 

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제1독서

[제1독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해방으로 주님의 분노와 자비가 드러난다.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36,14-16.19-23
그 무렵 14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고, 주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에서 성별하신 주님의 집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15 주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당신의 처소를 불쌍히 여기셨으므로, 당신의 사자들을 줄곧 그들에게 보내셨다. 16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19 그들은 하느님의 집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궁들을 모두 불에 태우고 값진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20 그리고 칼데아 임금은 칼을 피하여 살아남은 자들을 바빌론으로 유배시켜, 그와 그 자손들의 종이 되게 하였는데, 이는 페르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21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 22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 제 일 년이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그리하여 키루스는 온 나라에 어명을 내리고 칙서도 반포하였다. 23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는 이렇게 선포한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 나는 너희 가운데 그분 백성에 속한 이들에게는 누구나 주 그들의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빈다. 그들을 올라가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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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제2독서

제2독서

 

 

3월 10일 제2독서

[제2독서]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여러분은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2,4-10
형제 여러분, 4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5 잘못을 저질러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 여러분은 이렇게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6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 8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9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10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성화

 

 

 

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복음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4-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그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20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1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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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0일 사순 제4주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사순 제4주일에 강조되는 주제는 ‘기쁨’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입당송). 예수님의 수난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기쁜 순간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확인하였을 때가 아닐까 합니다. 하물며 내가 ‘하느님 사랑의 대상’ 임을 확인한다면 그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배신과 외면에도 변함없이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유배하던 유다인들을 해방하여 준 페르시아 임금의 칙령이 사실은 하느님의 조처였음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한결같고 성실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에도 잘 드러납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며 되풀이하던 이스라엘의 반역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시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려고 구리 뱀을 들어 올리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여기에서 관심을 끄는 내용은 “-해야 한다”라는 표현입니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배상하거나 속죄하는 것은 사랑할 때 나오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를 대신해서라도 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라는 표현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난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렇게 십자가는 사랑이 완성되는 자리가 됩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분을 ‘올려다보며’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렇게 날마다 ‘위’로부터 그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살게 하는 참다운 삶의 ‘기쁨’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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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은 이집트 노예생활을 탈출해서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이방 문화와 종교를 만났고 그것들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하느님은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 깨우쳐 주시려고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은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그들에게 이집트에 이어 다시 노예생활을 하게 됐다. 그들의 자존심이던 성전은 불에 타고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졌다. 궁과 집기들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다(2역대 36,19).

   그렇게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왜 이렇게 됐는지 성찰하고 반성했다. 자신들이 예언자들이 전하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았음을 고백하게 됐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 때처럼 또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그것도 노예생활을 하고 있던 그 강대국의 왕의 명령으로 귀향했고 그 이유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서였다. 우리처럼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항일투쟁을 한 것도 아니고, 그 나라가 망한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순전히 하느님의 호의로 그리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한 게 있다면 반성하고 잊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오염된 것을 정화하고, 그리고 도전과 유혹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그 안에 남아있던 것이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었다.

 

“이 땅은 밀린 안식년을 다 갚을 때까지 줄곧 황폐해진 채

안식년을 지내며 일흔 해를 채울 것이다(2역대 36,21).”

 

그들이 안식일 규정을 안 지켰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사람은 본래 하느님, 영원, 하늘나라처럼 영적인 세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금방 세속적인 것에게 몸과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세속적인 게 다 악한 건 아니지만 이 세상 것들은 모두 육체와 사랑하는 가족까지도 하늘나라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께 충실했던 나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거기에 산다.

   종교는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종교는 그럴 수 있어도 영성은 아니고, 그렇게 될 수 없다. 영성은 사는 이야기이다. 왜 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코로나 펜데믹을 겪으며 가장 기본적인 주일미사 참례 의무도 강제하기 어려워졌고, 성사에 대한 교우들의 생각도 달라진 것 같다. 한 마디로 종교 생활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차라리 박해받았으면 더 좋았을 거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이스라엘이 바빌론 유배 때 신앙을 되찾고 그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처럼, 지금이 그런 시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반성과 성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기도 아플 만큼 앓아야 낫고, 울 만큼 울어야 그리움의 괴로움도 덜해진다.

     70년일 필요는 없겠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심판과 벌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아니고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참 좋으신 하느님, 그분은 당신을 믿고 돌아오기만 하면 모두 당신 나라에 들게 하신다. 이를 두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8-10).”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사는 하늘나라의 시민이다. 많은 도전과 유혹 속에서 빛의 자녀답게 빛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임이 드러난다(요한 3,21).

예수님, 저는 끝까지 남아있을 겁니다. 제가 강해서가 아니라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호의를 베푸시는 주님을 두고 제가 다른 누구를 찾아가고 어디서 희망을 발견하겠습니까? 제가 바로 하느님 호의의 증거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신앙을 지켜주시고 하늘나라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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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될까?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까? 단죄하실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지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걸까? 단죄하러 오신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은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인가? 단죄하시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사전에 단죄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지옥이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사순 제4주일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구원을 바라시고,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사순 제4주일은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단죄와 지옥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가르칩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명 심판과 단죄와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아무리 바라셔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단죄받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교회도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자라는 믿음심판자라는 믿음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심판받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하느님을 모진 심판자로 믿었고, 그는 자기의 믿음 대로 심판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고 정말 아무것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진정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 믿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맡깁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굴이랄까 굴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어둡고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 굴을 통과해야 신세계가 열린다는 겁니다.

희망은 굴 저편에 그 굴을 먼저 통과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굴을 통과해 당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믿을만한 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치시고 오늘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 가르침도 믿지 못한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보다 어둠인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 경우 주님은 더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불신과 주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음이 우리의 비 구원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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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는 자녀에게 늘 최고의 선물을 주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녀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쏟아붓지만, 자녀가 사랑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서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왜 자녀는 그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일까요?

   어느 정신과 의사가 쓴 책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경제적 안정, 신체적 건강, 좋은 관계를 가진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녀에게 주는 선물이 부모 자신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충분히 공감 갑니다.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면 자녀가 부모의 노후를 걱정하느라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혼자 병원 다니고 자기 관리를 할 수 있는 신체적으로 건강한 상태이면 그만큼 부모 간호하는 데 드는 힘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부모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 자녀에게 의존하게 않게 되지요. 실제로 부모에게 자녀가 유일한 ‘베스트 프렌드’가 된다면, 자녀에게 부모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을 멈추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바리사이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느님 앞에 늘 거룩한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의 규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려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가 마침내 밤을 몰아내는 빛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진짜 사랑을 알 수 있었고 이로써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입으로만 말씀하시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그러나 먼저 주님을 만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우리 역시 실천해 나갈 때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며, 참 기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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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 제가 입은 제 색이 분홍색이죠.

장미색 제일을 입는다고 그래서 오늘을 '장미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긴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간에 마냥 참회와 보속과 절제만으로 침울해지지 말고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며 다시 힘을 내서 기쁘게 남은 기간을 보내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밝은 장미색 제의를 입습니다. 다가오는 부활의 기쁨을 이렇게 제의 색깔로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순 제4주일에 미사 전례문과 독서, 복음 말씀 또한 모두 기쁨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은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

 

"즐거워하여라" 하고 미사를 시작하기 때문에 이 장미 주일을 다른 말로 또 '즐거워하여라 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제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유배와 해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 결과 패망하여 바벨론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그대로 멸망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시어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제1독서는 하느님께 대한 불충으로 고난과 역경을 겪을지라도 결국에는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3장 14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복음서 안에 복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또 목자는 모든 성경 말씀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오늘 이 한 문장만 남는다면, 성경에서 이 한 문장만 남는다면 우리가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 아들을 통하여 구원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니코데모에게 들려주시면서 동시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올려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종사리에서 벗어나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께 불평,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셔서 그들을 벌하셨는데, 그제야 뉘우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찾아가 하느님께 자신들을 살려달라 기도해 주시라고 청합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서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두게 하셨고, 뱀에 물린 사람이 그 구리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을 앞둔 이가 나무 위에 구리 뱀을 보면 생명을 얻은 것처럼,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십자가를 한번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예수님의 죽음, 고통 아니면 희망, 저 십자가는 세상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장소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내어주시고, 예수님을 믿는 이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니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제의 독서에서 바오로사도는 하느님의 선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믿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은총으로 마련하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우리는 동시에 선행을 하도록 창조된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작품인 여러분, 사순 제4주일에 우리는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동시에 선행의 실천으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빛이신 그분을 따라 그 자신도 빛을 내어 다른 사람들을 비추어야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해 보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았다고 주일에 성당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내 할 몫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믿음을 실천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실천으로 드러내는 신앙인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 사순 시기는 기도와 단식과 자선을 실천하도록 우리에게 마련된 시기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사순 시기를 시작할 때 마음 먹었던 우리 각자의 각오를 되새깁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드러냄으로써 오늘 들은 복음의 기쁨을 주위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러한 한 주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아멘.

(장민준 가브리엘 신부님, 광주대교구 국내연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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