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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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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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2일 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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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2일 화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2일 화요일 복음

매일미사 김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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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두 구원을 받았네

(파스카 성야 세례 서약 갱신 후 따름 노래).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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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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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2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생명의 물’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사막 지역인 이스라엘 풍토에서 예로부터 물은 중요한 생명의 원천이었습니다. 에제키엘서 본문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로 주변 모든 것이 되살아남을 묘사합니다. 성전의 물이 “흘러들어 가면”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넘칩니다. 복음에서는 이 ‘생명의 물’이 곧 ‘예수 그리스도’ 임을 선언합니다. 벳자타 못 근처에 서른여덟 해 동안 병들어 있던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생명의 물이신 분께서 그에게로 흘러들어 가시어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는데 그는 대답 대신 원망 섞인 한탄을 늘어놓습니다. 물이 출렁거릴 때 아무도 자신을 데려가지 않아 이 지경으로 오래 있었다는 푸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불평을 타박하지 않으시고, 그가 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나을 수 있는 드넓은 전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생명의 물’은 ‘벳자타의 물’이 아니라, ‘당신 자신’ 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너도 낫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과 함께 생명의 물이신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곁으로 흘러들어 오십니다. 의미 없는 신세 한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물이 내 안에 흘러들어 오도록, 지나가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상징하는 ‘들것’을 들고 걸어가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 주변에서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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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살아 걸어 다니는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우리는 마음과 말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를 때가 많지만 하느님은 언제나 마음이 곧 말씀이고 행동이 곧 말씀이다. 예수님의 선택과 행동이 곧 하느님의 마음이고 그분의 뜻이었다. 예수님은 만난 모든 병자를 회복시켜 주셨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회복되고 온전해지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이들,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는 모두 온전하다.

   안식일 규정은 하느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음을 기억하게 한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라 완성되는 날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모두가 온전해지는 날이다. 그래서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료하신 것은 의사로서 치료행위를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안식일이 되신 것이다. 바로 그분이 안식일의 주인이고 우리의 안식일이다.

 

   오늘 복음은 38년 동안 병을 앓던 이가 성전에서 안식일에 예수님을 만나 회복된 이야기다. 성전 연못 물이 갑자기 출렁이면 천사들이 내려와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때 제일 먼저 그 물에 몸을 담그면 병이 낫는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병자도 그때를 기다렸지만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되어주시고, 안식일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고발당하셨다. 마치 병이 나은 그가 배은망덕하게 예수님을 고발한 것처럼 보이지만(요한 5,15-16),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병이 나았는데 어떻게 그분을 죄인이라고 고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고발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라고, 우리가 바라는 그 치유의 물이라고, 안식일의 주인이고 안식일 그 자체라고 알려준 것이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 말씀이 예수님 박해의 시작이 되었다. 이는 규정 위반이지만, 안식일의 목적이다. 이런 모순을 없애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계시는 분이다. 그분이 성전이고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치유의 물이고 안식일이다. 그러니 아프고 온전하지 못한 우리는 그분 안에 있어야 한다. 그분과 친해야 한다. 그런데 그분의 행동이 사람들에게는 파격적으로 보였지만 당신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가 그분과 친하다고 우리도 그럴 필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피조물 중 하나이고 죄인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율법을 착실하게 잘 지킨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태 19,16)” “(율법을 모두 잘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마태 19,20)” 그는 율법의 한계를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율법이라는 맑은 유리창을 통해 진리를 보지만 그 유리 벽 때문에 진리에 다가가지 못한다. 율법을 잘 지키는 이들이 느끼는 갈증이고 답답함이다. 언제 그 유리 벽을 부숴야 하는지 예수님이 알려주신다. 살아계신 예수님과 친하다는 것은 이런 것일 거다.

예수님, 주님 안에서 주님과 가깝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파격이 아니라 진리 안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더욱 친해지게 이끌어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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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시는 주님!

저 같은 경우 10년 가량 병치레를 했었는데, 그 기간이 얼마나 길고 끔찍하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연못 가에 누워있는 환자 장장 38년 세월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셨을 때, 스스로 일어나지조차 못해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뇌졸중이나 중풍이었겠죠. 점점 병이 깊어가면서 사지가 마비됨으로 인해 나중에는 한걸음 옮기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의료시설이나 치료약이 전무했던 당시에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것은 한 마디로 사형선고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모진 게 사람 목숨이라고, 점점 깊어가는 병을 바라보며 견디고 또 견디다보니 어언 서른여덟 해가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옆에 누워있던 다른 환자들은 다들 먼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도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명이 다하는 멀지 않은 어느 순간 세상 뜨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치료 효과가 좋기로 유명한 벳자타 연못가에 초점 없는 눈동자로 하루하루 세월을 죽여가며 그렇게 누워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목숨이 붙어있기는 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일어나라고, 걸어가라고 외치십니다.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무의미한 죽음의 삶에서 의미로 충만한 생명의 삶으로 건너오라고 외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어쩌면 천둥처럼, 그리고 감미로운 산들바람처럼 다가온 예수님의 말씀에 그의 경직되고 마비된 살과 뼈가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렸습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는 부드럽게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그 오랜 세월 의지처였던 들것을 자신의 두 손으로 번쩍 들고 자기 발로 걸어갔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희망이나 기약도 없이 누워있었던 세월이 38년이었습니다. 당시 유아 사망을 빼고 나면 대체로 50세 정도가 평균 수명이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니 그는 평생토록 들것 위에 누워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리를 툴툴 털고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옛날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처럼 점점 기력을 상실해가는 오늘 우리 교회, 점점 사지에 힘이 빠지고 마비증세가 두드러지는 오늘 우리 수도회의 모습, 그리고 비슷한 처지인 나 자신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기적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제 다 끝났어!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라고 낙담하는 우리에게 아직 거짓말처럼, 따뜻한 봄바람처럼 살며시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벳자타 연못가의 환자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굳센 신앙입니다. 그분께서 반드시 나를 치유시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는 강렬한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치유를 받고 단 하루라도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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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돌아가신 백안젤로 수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이 말씀이 생각난 것은 ‘성전이면 다 성전인가, 성전이 성전다워야지 성전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성전다운 성전’으로 잡아봤습니다.

성전다운 성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성전이지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도 성전이 아니고, 신자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볼 때 성전이란 생명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생명의 물이 없고 그래서 죽어가는 공동체란 말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아무런 관심이 서로 간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환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았는데도 주님처럼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고 성전 물에 데려가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는 곳, 이런 곳이 사랑이 없는 곳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이 없는 곳이란 관심은 없고 욕심만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상대는 내 욕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당연히 서로는 욕심의 희생자들이 될 것이고, 심지어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생명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설치겠지요?

세 번째는 관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사랑만큼 미움도 많을 것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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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만 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만 원을 주도록 저를 설득해 보실 분이 있나요?” 몇몇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지목하니 왜 자신이 만 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가 필요하고,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고, 내게 꽃을 사줄 생각이랍니다. 저는 “그러시리라 믿어요.”라고 말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또 다른 말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지 않습니다. 이제 다른 지원자가 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원자들이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 원이 필요한 이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만 원을 제게 주세요.”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랄 뿐인지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단순히 부탁하면 되는데,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사람을 구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일으키시어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유다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고 여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단죄하는 절대적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정작 주님께서 듣고 싶은 말을 피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또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위해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즉, 기도나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분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쉽던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탁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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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이 말씀 꼭 마음에 지니고 사시기 바랍니다.

 

 

3월12일자 다산 어른 말씀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 명진스님은 평화의 길 이사회에서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내 나이 75세면(1950년생),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노후 대책’이 아니라 ‘사후 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면서 “이후에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 수행에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노후대책이 아닌, 사후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말마디에 공감이 갑니다.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친” 예수님 일화는 요한복음에 일곱 표징중 세 번째에 속합니다. 어제는 두 번째 표징인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일화였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벳자타라 불리는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 모습이 흡사 세상의 축소판처럼 생각됩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로 가득했다 합니다. 벳자타 못 주변의 이 사람들은 그대로 꿈과 희망을, 빛과 길을 찾는 인간군상들을 상징합니다.

 

  서른 여덟 해나 앓던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병자의 치유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의 눈빛이 주님께 포착됐든듯 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 것을 들고 걸어갔다.  

 

주님을 만나 치유받음으로 운명의 질곡에서 탈출이자 해방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주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치유와 동시에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의 치유 은총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절대 죄를 짓지 말라하십니다. 그러나 그자는 예수님의 당부를 까맣게 잊고 예수님을 밀고함으로 배은망적덕의 죄를 짓습니다. 노년에 병마와 힘겨운 전쟁을 치루는, 이제 약을 먹으며 은총으로 사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 사랑할 시간, 회개할 시간을 생각하면 죄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진짜 생명의 못, 치유의 못은 벳자타 못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샘, 치유의 샘, 생명의 강, 치유의 강이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시가 은혜롭게도 이런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구상 시인의 '오늘' 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관통하는 생명의 강, 치유의 강, 구원의 강, 진리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성전의 샘에서 솟아나 세상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강이 상징하는 바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자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생명의 강인 주님 미사의 강가에 심어져 깊이 뿌리 내린 우리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으로 우리가 내놓는 주님의 신망애의 열매들은 이웃에게는 양식이 되고 약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에덴 낙원에서도 신기하게 물이 흐르고 무성한 나무들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생명수의 강은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살아있는 꿈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성전인(요한2,21)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옆구리에서는(요한19,34)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입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요한묵시22,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모시는 주님이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생명수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수의 강이 되어 세상을 살리며 흐르는 강같은 삶이 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은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계속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의 강, 생명수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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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가장 크게 충돌했던 부분이 바로 이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10계명에 따라서 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 '거룩함'을 위해서 수많은 세부 규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안식일에도 계속 일을 하고 마치 고의로 규정을 어기는 것,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그들이 곱게 보았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금지된 병자의 치유를 행하십니다. 복음 내용 중에도 바로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불편하게 보이는 일이었음에 분명합니다.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그 불만을 가졌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주간의 안식일은 하루뿐이고 일할 수 있는 날은 엿새나 되는데, 왜 굳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날의 일을 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일견 옳아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율법을 어기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현실을 바라보는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시각 차이'가 드러납니다.

그 차이는 유다인들이 율법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병자'를 보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안식일은 하루뿐이고 일할 수 있는 날은 엿새나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병자를 연못에 넣어주었던 사람이 지난 38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병자는 매번 물이 출렁일 때마다 물속에 들어가려고 먼저 몸을 움직였지만, 매번 다른 사람들 자신보다 조금 더 몸을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는 그런 일을 무려 38년 동안 겪고 있었습니다. 긴 시간 불의와 억울함 속에서 살아왔지만, 안식일이 아닌 날에도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루를 쉬셨던 이유는 엿새를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식일 규정은 하루를 쉬라는 의미인 동시에 엿새를 일하라는 의미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늘 그렇듯 듣기 좋은 말은 철썩같이 지키지만 일을 하라는 말은 잘 지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율법과 계명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은 인간 마음대로 율법을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과 거룩함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율법과 계명을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안식일 규정 또한 무의미한 휴식을 위한 규정이 아니라, 그 날을 거룩하게 보냄으로써 주간의 삶과 노동의 열매를 하느님께 바치도록 하기 위한 규정일 것입니다. 유다인들의 왜곡된 시각은 치유된 병자를 바라보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38년 동안 걷지 못하던 자가 멀쩡하게 서서 걸어다니고 있는데, 그를 보고 유다인들이 했던 첫 번째 생각은 왜 저자는 안식일에 들것을 들고 다니는가였습니다.

   돌처럼 굳어져버린 그들의 마음이 세상을 얼마나 어둡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뒤에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만나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건강'은 단순히 병의 치유를 통해서 얻어진 육신의 건강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율법과 계명을 바르게 지켜서 다시는 죄의 사슬에 묶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건강한 삶이고 치유된 삶이며 구원된 삶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회개와 보속의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 같은 치유의 은총이 주어지기를 간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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