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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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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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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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 월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1일 월요일 복음

매일미사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윤홍민 안드레아 신부님,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CPBC미사中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최우식 프란치스코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미사中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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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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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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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1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슬픔 가운데 하나는 자녀의 죽음입니다. 그러한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누군가 말하여 준다면 이보다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과 독서는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새로운 생명의 창조가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하여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중병에 걸린 아들 때문에 상심한 어느 왕실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믿음’을 강조하고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표징과 기적’을 믿는 우리의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관리는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납니다. 아들을 고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나는 모습은 참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줍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로 받아들이겠다는 절대적 순명의 자세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의 순간을 건너게 하는 것은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말씀이 살아 있고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실재’ 임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곧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 임을 믿는 것, 그것이 부활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를 모범적으로 보여 준 왕실 관리는 구원을 체험하였고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존엄한 믿음이 존엄한 구원을 가져온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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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철이 다가오는지 정치인들의 이런저런 약속을 듣는다.

그들의 말이 공적인 약속인지, 빈말인지 모르겠지만 약속대로 된다면 정말 좋겠다. 그의 말을 믿지 않으면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런 경험들 때문일까, 하느님의 약속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는 것 같다.

 

  하느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하느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겨울 다음에 봄이 오고, 죽은 것 같은 나뭇가지에서 새잎이 나오는 것처럼 때가 차면 하느님 뜻은 이루어진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믿지 않아도 하느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하신다. 나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하느님 말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느님 말씀은 존재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하느님 말씀을 믿은 사람은 변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그 왕실 관리는 몹쓸 병에 걸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했다.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만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들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아버지 바람처럼 예수님도 그 아이가 낫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의 바람이 곧 그분 말씀이고 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 말씀을 하신 그 시간에 그 아이의 열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아버지가 믿어서 이루어진 일이다. 해가 뜨고 지고 봄이 오고 새싹이 나오는 것은 내가 믿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하지만 나와 다른 이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바라지 않고 믿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믿지 않거나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이가 없으면 하느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는 것 같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치료되고, 사람을 알아가고,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그 시간이 길어져서 조급해지고 불안해져 일을 그르치는 것 같다. 시간이 필요 없는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은 조마조마 아등바등 조급하게 안달하는 우리를 안쓰러워하실 것 같다.

   믿고 기다리면 그렇게 되고, 지금 그렇게 되어가는 중인데 말이다. 유배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하느님 말씀을 전했다. 하느님이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작정하셨으니 그대로 된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이 없는 곳에서 희망을 말한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받고 구원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해주신다고 믿으니 하느님은 그렇게 하신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됐다. 그러니 늘 기쁘고 감사한다.

 

예수님, 제게 주신 이 믿음의 선물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합니다. 천 년이 하루 같은 분과 함께 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주님이 여기까지 내려오셨으니 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시간표에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어머니께 도움을 청하오니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심을 믿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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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사순 특강을 다니면서,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목자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덕목이 너그러움이요 관대함이요 포용력입니다!

다들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가 위기 상황이다, 위험을 알리는 비상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다고 걱정합니다만, 저는 마냥 비관적으로만 봐서는 안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유는? 아직도 소리소문없이 착한 목자로서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사목자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본당 활성화를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신부님들이 계십니다.

  교우들이 내 집처럼 편안함을 느끼고, 수시로 찾고 싶은 본당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신부님, 교우들의 영성 생활 증진을 위해 큰 투자를 아끼지 않는 신부님들을 뵈면서 아직 우리 교회에 희망이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착한 목자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에게 있어 당신 고향 갈릴래아, 그리고 나자렛은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였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당신에 성장하신 고향이었기에 다른 그 어떤 고장보다 마음이 쓰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신경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며 개무시했습니다.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아무리 고향이라 할지라도 당신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고향이라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모와 배척에도 불구하고 다시 고향을 찾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상심이 컸던 왕실 관리에게 큰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배신과 배척, 홀대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착한 목자 예수님께서는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불벼락을 내리지 않습니다. 큰마음으로 용서하시고, 그들에게 또다시 큰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목자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참으로 다양한 유형이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 호의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발목을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노골적으로 반대의 깃발을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사목자들에게 필요한 덕목이 너그러움이요 관대함이요 포용력입니다.

 나와 전혀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넉넉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잘 맞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려 나아갈 수 있는 큰 마음,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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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불어넣어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선포한 이 복음은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려는 사랑을 보여주고, 또 그 사랑이 믿음 안에서 완성되는 것을 안내합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의 힘, 그리고 믿음이 완성해 가는 이 기적의 여정 전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과 오늘 복음을 이 믿음의 힘을 주제로 묵상하고자 몇 가지 요점으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 복음을 떠올려보겠습니다. 오늘 주인공은 아버지와 아들이죠. 아들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여기서 좀 특별한 점이 있죠 여러분들이 기억해 보시면 다른 치유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손을 대거나, 아니면 사람이 예수님의 소매를 이렇게 만지거나, 달리 다콤 같은 말씀하시거나 이렇게 뭔가 보이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우리가 치유가 이루어지겠거니 쫓아갈 수 있죠.

 

 그러나 오늘 복음은 보이는 게 없습니다. 아픈 아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는 그저 예수님을 만나서 말씀을 청하고 치유를 청하고, 예수님은 그저 "가거라. 내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말씀만 해주시죠.

이 아버지는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다시 한 번 청했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아야 믿는다 하지만 이 왕실 관리인 아버지는 "저는 제가 보지 못해도 말씀을 믿고 가겠습니다." 라고 다시 한 번 청하고 아들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우리 요점의 교훈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삽니까? 우리가 기도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향해 나아갑니까? 매일 아침 우리가 하루를 열고 길을 떠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별 새로울 것도 없는 혹은 불행한 사람들의 경우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것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버지의 모습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희망'을 청합니다. 아들이 낳게 해달라고 어떤 '증거도 없이' 길을 떠나야 합니다. 하룻길을 더 갔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청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하나 주는 것도 아니고, 묵주를 하나 주는 것도 아니고,

"가거라 너의 아들은 낳을 것이다."라고 하신 이 말만 믿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이 아버지는 예수님을 보았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힘에 의지하고, 믿음으로 청했을 뿐입니다.

 우리도 이런 일상으로 초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를 살려주실 것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라는 깊은 신뢰 안에서 지내보시길 여러분께 초대합니다.

 

두 번째는 오늘 믿음이 갖고 있는 또 다른 힘입니다.

믿음은 퍼져나갑니다. 믿음은 '행위 안에서 실천'으로 나아갑니다. 여러분 오늘 구원은 아이에게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이 아버지에게도 새로운 믿음의 눈을 열게 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했죠. 구원은 아버지에게도 아이에게도 다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왕실 관리의 종들을 보십시오. 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 기적이 이루어졌다는 그 증거는 이 왕실 관리의 종들의 소식에서 나타났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아버지와 아이의 치유를 허락하고, 또 구원의 협력자인 '익명의 종'들을 참여시킵니다.

그래서 믿음은 점점 퍼져나가게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어주셔서 보이지 않는 치유의 힘과 사랑을 보게 해 줍니다. 또한 우리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이 왕실 관리의 종처럼 믿음은 점점 퍼져나가서 마침내 그와 그의 집안이 모두 믿게 되었다라고 마무리되죠. 이렇게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을 포기하거나 지성이나 과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여주신 기적을 신뢰하고, 또 우리가 응답하는 행위입니다. 오늘도 미사에 함께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또 우리가 응답하게 해달라고 은총을 청해보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이 수난의 여정은 아버지가 아들을 살리셨듯이 결국 마지막에 성자를 되살리실 성부 하느님의 큰 사랑을 암시하고 있음을 깊이 신뢰하며 미사를 함께 봉헌하겠습니다. 아멘. (윤홍민 안드레아 신부님,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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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을 보면 즉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어가는 자기 아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가달라고 왕실 관리가 조르지만 주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로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라고 복음은 기술합니다.

 

  그래서 집에 갔더니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자기 아들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케 되고,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주님 말씀을 믿고 떠났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기적을 확인하고 믿게 되었다는 말을 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믿은 것’과 ‘두 번째 믿게 된 것’ 사이에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많이 생각지 않아도 첫 번째 믿음은 일단 믿기로 한 것이고 두 번째 믿음은 그 믿음이 완성되고 완전해진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기로 하는 믿음, 이 믿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도박으로 치면 믿는 쪽으로 패를 건 겁니다.

그냥 가라는 주님 말씀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앞에 두고 믿는 쪽으로 의지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 그 결과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믿지 않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 믿음을 싹부터 잘라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토록 믿기로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그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고 믿음의 싹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이 믿음의 싹이 중요하고, 이 믿음의 싹은 자기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는 것으로 완전해지고 더 확장됩니다. 나무로 치면 믿음의 작은 싹이 나무로 자라고, 한 나무로 그치지 않고 군락을 이루게 된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에서 의지적 믿음과 체험적 믿음의 관계를 볼 수 있고, 의지적 믿음의 그 작은 싹이 이후 체험들을 통해 나무로 성장하고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이 큰 나무로 자란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 아닐까 묵상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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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를 빕니다. 전에 어떤 분이 다른 종교를 믿었었는데 천주교인을 만나서 기적을 체험하고,

하느님께서 더 힘이 세시구나 하고 느끼고는 천주교로 개종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고, 이렇게 힘이 세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참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지속적인 쇄신이 필요합니다. 수도회에서 초기 양성이 끝나고 영속 양성이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어제 사순 제4주일 1독서인 역대기 하권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지도 사제와 백성이 이방인들의 온갖 엮겨온 짓을 따라 주님을 크게 배신하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신들이 있고 우상숭배도 하였고 미신도 행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배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는 바빌론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공동체의 시온 재건을 위한 분투와 좌절을 그리고 있는 이사야서 56장에서 66장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새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해 줍니다. 사순 4주간부터 5주간에 요한복음이 봉독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유다 문화와 종교에 친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인 것이라고 합니다. 즉,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특히 예루살렘에서 행한 예수님의 활동을 강조하며 유다의 큰 축제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활은 유다 지방으로 사마리아의 한 거울로 가셨다가 갈릴리아에서 전개됩니다. 갈릴레아는 이방인의 땅이요, 가난한 이들의 땅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고 치유하고 설교하고 가르치셨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갈릴리아 카나에서 한 왕실 관리를 만나시고, 예수님께서 죽어가는 아들에게 같이 내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그에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신 한 말씀으로 그의 죽어가는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왕실 관리는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살려주신 사건을 계기로 그와 온 집안이 믿게 됩니다.

 

  이방인들의 어떤 신들보다도 더 힘이 세신 유다인들의 하느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살려주셨으니, 그의 온 집안이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에서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는 필립보에게

"당신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다는 말을 믿을 것이며 믿지 못하겠거든 당신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두 제자의 한 분인 필립보 사도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하였다는 말씀은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 안에 계시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게 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우리가 믿지 못하겠거든, 당신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쇄신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고 예로니모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의 말씀을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가톨릭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에 요한복음을 집필한 목적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하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는 은총의 사순 시기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최우식 프란치스코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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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년 엘리너 H.포터가 집필한 고전 소설 ‘폴리아나’(Pollyanna)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으로 꼭 등장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 영화로도 나왔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삽니다. 그러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나간다는 아주 훈훈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폴리아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다행한 일 찾기’ 때문입니다. 저택 같은 집에서 아주 좁고 퀴퀴한 다락방에 살게 되었지만, 전망이 좋아서 그림 같은 경치만 봐도 정신 수양이 되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또 방에 거울이 없지만, 주근깨 난 얼굴을 안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행한 일 찾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모임에서 한 신부가 방귀를 시원하게 뀌었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자 한 신부가 “야~ 그러다 똥 싸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당사자 신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똥 싸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마음에서 행복이 가까워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폴리아나처럼 ‘다행한 일 찾기’ 놀이를 해 보면 어떨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주님을 체험하는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매 순간 느끼는 방법이 있으니 참 다행이 아닙니까?

  왕실 관리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이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거절의 뜻을 비치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왕실 관리이니 재산이 많이 있고 또 권력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을 전해주십니다. 만약 재산과 권력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화를 냈을 것입니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갈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고 떠나갑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에만 매여있었다면, 그는 다행한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행한 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매여있는 것이 혹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 정말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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