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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사순 제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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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사순 제3주간 토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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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가톨릭미사 3월9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9일 토요일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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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토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9일 토요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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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 작은 형제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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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제1독서

3월 9일 매일미사 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6

1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2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3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4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5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6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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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복음

3월 9일 매일미사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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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9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3월 9일 매일미사 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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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오늘 독서의 마지막 선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복음에서도 비슷한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바리사이와 세리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이 둘의 대비를 본질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는 그들의 기도가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였습니다. 우리말로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라고 옮긴 그리스 말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바리사이는 서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프로스 헤아우톤’) 이렇게 기도하였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에이스 톤 우라논’)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바리사이의 기도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면 세리의 기도는 ‘하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하여 그분의 현존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참된 기도이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하느님 없이 진행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결국 하느님의 최종 판단은 세리가 ‘의롭다’는 것으로 선언됩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 없이 자기 행위만 과시한 바리사이의 기도는 그 응답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히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소통한 세리는 ‘의롭게 됨’이라는 기도의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나의 삶과 성장에만 관심을 두는 태도는, 그것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품위 있는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저 신앙으로 포장된 경건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구태의연한 경건주의를 넘어서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소통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통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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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뼛속까지 죄인이다. 지극히 정교하게 만들어진 이 살과 뼈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이것을 움직이는 이 영혼이 죄인이다. 그렇다고 구원받을 수 없는 악마의 자식이라는 뜻은 아니다. 말과 행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 속에 나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 죄스러움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 악순환은 죽어야 끝난다.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한 줌의 먼지가 돼서야 비로소 죄의 올가미에서 풀려난다.

    사람에게는 성찰하고 반성하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사람이 다른 피조물보다 뛰어난 이유이다. 다른 동물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반복 학습을 통해 발전하지만, 사람은 잠시 멈추고 자신에게서 한발 물러나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바쁘고 반복적인 일상에 함몰되고, 심하면 다른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의 노예가 된다.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비참함을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뼛속까지 죄인이고 혼자 힘으로는 죄의 올가미를 벗지 못하는 이 불쌍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자신의 비참을 아는 만큼 하느님의 사랑을 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나를 사랑하시고 이런 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낫고,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다. 그러니까 남을 비난하고 타협을 패배라고 여기고 소리치며 싸우는 거 같다. 폭력은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하는데, 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신이 내적으로 불안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 비어 있는 내 속을 누가 볼까 두렵고, 한 줌의 먼지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성전에 간 바리사이는 눈은 하늘을 봤지만 마음은 자신을 향해서 자기는 의롭다고 말했고, 같이 있던 세리는 눈은 땅을 향했지만 마음은 하늘을 향해서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루카 18,13). 그 바리사이는 혼잣말을 말했고, 그 세리는 기도했다. 예수님은 그 세리가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신다. 그는 비참한 자신을 봤고 하느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꾸 실패하지만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스러움을 극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잘 다루는 법을 터득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끝까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의 이름에 희망을 걸고 있으니 저는 이 순례를 잘 마칠 수 있습니다.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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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주님께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 호세아서는 “자”로 시작하는데 오늘 저는 이 “자”라는 말이 왠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자' 라는 말은

“자, 이제 조용히 하고 ---합시다.”처럼 지금까지 하던 것을 멈추거나 떠들고 있던 것을 멈추고 “자!” 라고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그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돌아가자.''알도록 힘쓰자.'입니다.

주님께 돌아가자는 것과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 주님께 돌아가자!” 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주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는 것인데, 누가 저에게 이런 말을 하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주님 앞에 줄곧 있었다거나 지금은 주님 앞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다시 “자, 진정 주님께 돌아가자.”라고 얘기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다고 있지만 제가 참으로 주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리사이를 생각해봅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서 있고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 올바로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세리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자기의 의로움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다른 인간들 앞에서나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는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곧 세리 앞에 있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 있다 하더라도 자랑할 수 있는 인간 정도로 하느님을 생각한 겁니다. 진정 그리고 오롯이 하느님 앞에 있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고, 자기의 의로움을 보고 자랑할 수 없고 자기 죄 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진정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의 세리이고, “자, 돌아가자!”라고 하는 것도 이제 진정 하느님 앞에 세리처럼 서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 주님을 알도록 애쓰자.”라는 말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뇌물을 좋아하고, 우리의 마음보다 십일조를 좋아하고, 겸손한 마음보다 희생제물과 번제물을 더 좋아하는 분으로 안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몰라도 너무도 모르는 것이고, 잘못 알고 있어도 너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결핍이 있는 인간처럼 알고 있고, 그 결핍을 채우려고 욕심을 부리는 인간처럼 하느님을 알고 있으며, 그 결핍을 인간을 통해서 채우려는 존재쯤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호세아서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it is love that I desire, not sacrifice, and knowledge of God rather than burnt offerings.”

 

자, 우리도 이제 확실히 압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겸손과 사랑임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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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람의 내면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 앞에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눠졌습니다. 속시원한 사이다 같은 거침없는 언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세리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파격적인 모습에 많는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칠 정도로 앞서가는 예수님의 모습에 전통주의자들, 보수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 바리사이들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귀에 거슬렸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리와 창녀, 죄인들은 하느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하느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살던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 인간도 아닌 인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족속들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 들어온 세리가 기둥 뒤에 숨어서 기도하는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실 세리나 창녀들은 하느님과 율법을 떠나 살았기에 교회 공동체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눈에 띌까봐 창피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서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다들 예수님 가까이 다가온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잘 먹혀들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딱딱하고 고리타분하던 당시 사제들의 설교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당대 율법학자들의 강의와는 차원이 달랐는데,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따뜻하고 감미로웠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들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 있던 군중들은 깊은 감동으로 큰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기쁨과 희망의 에너지였습니다.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와 새 생활로 안내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눈앞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일시적으로나마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면서 마침내 하느님과 담을 쌓고 지내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까지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하류 인생들이 줄지어 당신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본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합니다.

 

   저 같았으면 엄청 두려웠을 것입니다. 다들 한 가닥씩 하던 사람들입니다. 얼굴도 험악합니다. 굵은 팔뚝 여기저기에는 문신들이 가득합니다. 입만 열면 갖은 욕설이 난무합니다. 저 같았으면 서둘러 자리를 끝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저처럼 겉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의 내면을 바라보십니다. 그들의 상처 투성이 뿐인 과거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나름 한번 새출발해보겠다고,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발버둥 쳤던 지난날을 바라보십니다.

그간 세상 사람들로부터 갖은 멸시와 따가운 눈초리를 바라보십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들을 눈여겨 보십니다. 그러고 나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이지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정도입니다.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반갑게 인사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십니다. 그들과 함께 회식을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과 온전히 하나 되신 것,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예수님께서 드디어 한 말씀 던지시는데,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세리와 죄인들 더 감동시킵니다.

저 같았으면 이랬을 것입니다.

 “자네들 이제 그런 짓 그만하고 새 출발해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무라지도 않습니다.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저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열어 보이십니다.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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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잘 사는 것일까?”

   항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잘 살기 위해 늘 나 자신을 다그치곤 했습니다. 잠을 줄여서 열심히 기도하고, 또 시간을 쪼개 쓰면서 열심히 하느님을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족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은 정말로 열심히 산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 스스로 그렇지 않음에 텅 빈 마음의 상태를 느낄 때가 참 많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를 ‘영적 쾌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다그쳐서 영적인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물질적 쾌락을 따르려는 이유인 것처럼,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 역시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영적 체험만 할 수 없습니다. 이때 오히려 영적 교만에 쌓이기 쉽게 됩니다.

 

  성당 안에 머무르는 것을 너무 좋아해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면 어떨까요? 성당 사람들은 정말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는 영적 쾌락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잘못되었다면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영적 쾌락을 넘어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면서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판단이 생기는 순간, 영적 교만이 자리를 잡은 것이고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바리사이와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자신의 공로와 미덕을 하느님께 자랑하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면서 이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말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 쾌락에 빠져 있으며, 이를 넘어 영적 교만의 상태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지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상태, 이 순간에 비로소 모든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쾌락에서만 벗어나면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영적 쾌락에서도 벗어날 수 있어야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람만이 의롭게 되어 하느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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