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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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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묵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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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미사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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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3,1-9.15-17.19-30.33-62

그 무렵 1 바빌론에 요야킴이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2 그는 수산나라고 하는 힐키야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3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 4 한편 요야킴은 아주 부유한 사람으로서 넓은 정원이 그의 집에 맞붙어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늘 그를 찾아오곤 하였다. 5 그런데 그해에 어떤 두 원로가 백성 가운데에서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바로 그들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바빌론에서, 백성의 지도자로 여겨지는 재판관인 원로들에게서 죄악이 나왔다." 6 그들이 줄곧 요야킴의 집에 있었으므로, 소송거리가 있는 이들은 모두 그리로 그들을 찾아갔다. 7 한낮에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수산나는 남편의 정원에 들어가 거닐곤 하였다. 8 그렇게 그곳에 들어가 거니는 수산나를 매일 눈여겨본 그 두 원로는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게 되었다. 9 그들은 양심을 억누르고 하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린 채, 의로운 판결조차 생각하지 않았다.

   15 그들이 알맞은 날을 엿보고 있을 때, 수산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녀 둘만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날이 무더웠으므로 그곳에서 목욕을 하려고 하였다. 16 거기에는 숨어서 수산나를 엿보는 그 두 원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17 수산나는 하녀들에게, "내가 목욕을 하게 올리브기름과 물분을 가져오고 정원 문들을 닫아걸어라." 하고 말하였다.

19 하녀들이 나가자마자 두 원로는 일어나서 수산나에게 달려가 20 말하였다. "자, 정원 문들은 잠겼고 우리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소. 우리는 당신을 간절히 원하오. 그러니 우리 뜻을 받아들여 우리와 함께 잡시다. 21 그러지 않으면, 어떤 젊은이가 당신과 함께 있었고, 바로 그 때문에 당신이 하녀들을 내보냈다고 증언하겠소." 22 수산나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꼼짝 못 할 곤경에 빠졌소. 그렇게 하면 그것은 나에게 죽음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신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23 주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들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더 낫소." 24 그러고 나서 수산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 두 원로도 수산나를 향하여 소리를 지르더니, 25 그 가운데 하나가 달려가서 정원 문들을 열어젖혔다. 26 집에 있던 사람들이 정원에서 나는 고함 소리를 듣고, 옆문으로 뛰어들어 가 수산나에게 일어난 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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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원로들이 저희 쪽의 이야기를 하자 하인들은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수산나를 두고 누가 그와 같은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28 다음 날, 수산나의 남편 요야킴의 집으로 백성이 모여들 때, 그 두 원로는 수산나를 죽이겠다는 악한 생각을 가득 품고서 그리로 갔다. 29 그들이 백성 앞에서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요야킴의 아내, 힐키야의 딸 수산나를 데려오게 하시오.” 그러자 백성이 사람을 보냈다. 30 수산나는 부모와 자녀들과 모든 친척과 함께 나왔다.

  33 그러자 수산나 곁에 있던 이들과 그를 보는 이들이 모두 울었다. 34 그 두 원로는 일어나 백성 한가운데에서 수산나의 머리에 자기들의 손을 얹었다. 35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6 그 두 원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단둘이서 정원을 거닐고 있을 때, 이 여자가 여종 둘을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가더니, 정원 문들을 닫아걸고서는 여종들을 내보냈소. 37 그때에 숨어 있던 젊은이 하나가 이 여자에게 가더니 함께 누웠소. 38 정원 구석에 있던 우리는 그 죄악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들에게 달려갔소. 39 그리고 둘이서 정을 통하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그자가 우리보다 힘이 세어 붙잡을 수는 없었소. 그래서 그자는 문을 열고 달아나 버렸소. 40 그 대신 이 여자를 붙들고 그 젊은이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41 이 여자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지 않았소. 이것이 우리의 증언이오.” 그들이 백성의 원로이며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들을 믿고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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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3,41ㄹ-62

그 무렵 회중은 41 수산나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42 그때에 수산나가 크게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 43 또한 당신께서는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44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45 그리하여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 46 그러자 다니엘이 “나는 이 여인의 죽음에 책임이 없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47 온 백성이 그에게 돌아서서, “그대가 한 말은 무슨 소리요?” 하고 물었다. 48 다니엘은 그들 한가운데에 서서 말하였다.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여러분은 어찌 그토록 어리석습니까?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49 법정으로 돌아가십시오. 이자들은 수산나에 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습니다.” 50 온 백성은 서둘러 돌아갔다. 그러자 다른 원로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자,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로 지위를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설명해 보게.” 51 다니엘이 “저들을 서로 멀리 떼어 놓으십시오. 제가 신문을 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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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사람들이 그들을 따로 떼어 놓자, 다니엘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불러 말하였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 이제 지난날에 저지른 당신의 죄들이 드러났소. 53 주님께서 ‘죄 없는 이와 의로운 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당신은 죄 없는 이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들을 놓아주어 불의한 재판을 하였소. 54 자, 당신이 참으로 이 여인을 보았다면, 그 둘이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말해 보시오.” 그자가 “유향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5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은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하느님에게서 판결을 받아 왔소. 그리고 이제 당신을 둘로 베어 버릴 것이오.”

 56 다니엘은 그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고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자에게 말하였다. “유다가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인 당신, 아름다움이 당신을 호리고 음욕이 당신 마음을 비뚤어지게 하였소. 57 당신들은 이스라엘의 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소. 그 여자들은 겁에 질려 당신들과 관계한 것이오. 그러나 이 유다의 딸은 당신들의 죄악을 허용하지 않았소. 58 자 그러면, 관계하는 그들을 어느 나무 아래에서 붙잡았는지 나에게 말해 보시오.” 그자가 “떡갈나무 아래요.” 하고 대답하였다. 59 그러자 다니엘이 말하였다. “진정 당신도 자기 머리를 내놓고 거짓말을 하였소. 하느님의 천사가 이미 당신을 둘로 잘라 버리려고 칼을 든 채 기다리고 있소. 그렇게 해서 당신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이오.” 60 그러자 온 회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1 다니엘이 그 두 원로에게, 자기들이 거짓 증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저희 입으로 입증하게 하였으므로, 온 회중은 그들에게 들고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이 이웃을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 낸 그 방식대로 그들을 처리하였다. 62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에 무죄한 이가 피를 흘리지 않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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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복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3월 18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두 여인(수산나, 간음한 여자)과 그들을 함정에 몰아넣은 두 악한 존재들(두 원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여인들을 구한 두 의인(다니엘, 예수님)의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수산나는 죄가 없지만 욕망을 품은 두 원로의 덫에 걸리고, 간음한 여자는 현장에서 붙잡혀 죽을 위기에 놓입니다. 그러나 수산나가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자,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다니엘을 보내십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도 사람들에게 끌려 와 예수님 앞에 서게 되지만 오히려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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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치졸함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문장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지혜가 얼마나 경탄스러운지 잘 드러냅니다. 먼저 "돌을 던져라." 하는 말씀으로 율법을 존중하셨고, "죄 없는 자가 먼저"라는 전제로, 누군가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상처를 줄 수 없음을 복음적 연민으로 나타내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약자들에게는 가혹하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졸함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덫에 희생되는 나약한 이들의 절규는 하느님을 움직입니다. 약한 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는 권력자들이나 숨 막히는 잣대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율법 학자들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노래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회답송)."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줄곧 물어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뜸 들이다.

오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은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데 예수님께 그래도 될지 말지 답을 요구합니다. 평소대로라면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이지만 이 경우만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궁지에 몰아넣을 좋은 기회라고 의기양양하며 빨리 대답하라고 보챕니다.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쏠려있습니다.

이럴 때 보통의 우리는 빨리 답해야 한다는 대단한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들기 쉽고 조급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답하시지 않고 뜸을 들이십니다.

제가 식당 주방일을 하다 보면 뜸을 들이기 전에 손님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급한 마음에 김을 빼면 밥이 덜 되거나 제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급하더라도 마음은 급하게 먹지 말고 뜸 들여야 합니다.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고 뜸 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가 상황을 주도하는 법입니다.

 

사실 우리는 뜸 들이는 이 시간을 가지지 않아 지나고 나서 이렇게 답하면 되었을 것을!

이렇게 대처하면 좋았을 걸을! 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오늘 주님의 뜸 들이심도 이런 의미일까요?

자기 주도를 위한 시간 벌기!?

주님께서 뜸 들이신 의미는 분명 이것 이상이고, 우리의 뜸 들임도 이것 이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찾고 알기 위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실까?

이렇게 우리는 답을 재촉하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얼굴을 하느님께 향해 기도하는 것이 신앙인다울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서의 경우 소년 다니엘이 성령의 감도로 간음죄에 몰려 죽을 판인 수산나를 살판으로 바꿨는데 우리도 다니엘처럼 이렇게 성령으로 판을 바꾸는 겁니다.

이것은 스테파노가 죽게 되었을 때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얼굴을 하늘로 향하는 대신 땅에다 ‘하느님’ 이렇게 쓰고 계셨을 겁니다.

그랬는데 그 하느님께서 ‘살려라!’ 하고 답하셨을 것이고,

살리는 방법은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죄 없으면 돌로 치라 하면 될 거라고 알려주셨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이런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상황이 빨리 해결되길

조급해하지 말고

뜸 들이고

당황하지 말고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는데 급할 때 기도하고 급할수록 기도하라!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신 모범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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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한 8,12).

이는 세상이 어둡다는 뜻이다.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어 있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악행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분리되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만나는 그 여인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혔고 율법에 따르면 간음죄는 돌로 사형되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것도 율법 학자들과 엄격한 바리사이들에게 적발됐으니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던 그를 예수님이 구해주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에게는 생명의 빛이었다. 돌을 던지라고 하셨으니 율법을 지키셨고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없으니 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이 없었다. 구약의 수산나는 죄가 없는데 정욕에 눈이 먼 두 노인의 모함으로 죽을 뻔했지만, 하느님이 다니엘을 보내주셔서 그를 억울한 죽음에서 구해주셨고 그 두 노인은 합당한 벌을 받게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만난 그 여인은 죄가 있는데 살았고, 그를 고발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하느님께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말씀으로 예수님은 하느님은 생명의 주인이시고, 죄인이 죽는 게 아니라 당신께 돌아와 살기를 바라심을 알리셨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한 말 그대로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하느님께 등을 돌리면 죽는다. 죽음은 그 벌이 아니라 생명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간다고 역사가 보여주고 모든 사람이 그걸 바란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자신의 죄가 운 좋게 밝혀지지 않거나 변호사의 도움으로 감형되는 요행 말고는 희망이 없다. 하느님은 죄인이 돌아와 살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은 끝까지 기회를 주신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 죽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멀어져서 죽는다. 온전히 그리고 영원히 살아계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이 그 생명을 사람들 사이로 갖고 들어오셨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공짜로 받은 생명의 빛을 세상에 드러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루카 6,36).

내가 죄인인데 누구를 심판하고 단죄할 수 있겠나. 나도 불쌍하니 그도 불쌍히 여긴다.

예수님, 주님에게는 저를 영원히 살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한 말씀으로 그 여인과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을 살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해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게 해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모든 위험과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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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한 가련한 여인,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반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과연 뭘 쓰셨을까요?

많은 성경학자들과 교부들이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대체로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 악한 고발자들의 죄목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귀신도 모른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도 모른다는 것, 오직 예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적대자들에게 맞서지 않으십니다.

방어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가만히 계십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뭔가를 쓰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김 빼기 작전이었습니다.

뭔가 대판 싸워야 되는데, 자신들이 짠 작전이 팍팍 진척될 것인데,

예수님은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시며 완전히 그들을 무시해버립니다.

갑자기 김이 빠질 데로 다 빠져버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그 순간 엄청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위기관리능력이 참으로 뛰어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맥 빠지고 허탈해진 적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결정타 한방을 더 날리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 단둘만 남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 순간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주석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다.

우리를 대표하는‘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다.”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으로 인해 그 여인은 지금 눈보다 더 깨끗하게 변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자의 상태를 가리켜 교회 전승은 ‘순결한 창녀’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창녀, 이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향해, 또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계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 하나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아무리 부족해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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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주님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시편23,4)

오늘 시편 화답송이 그대로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 3월18일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과 날로 더욱 가까이 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막연한 그리움만 품으면서 정작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에 대한 마음이 식고 가라앉아 멀어질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다산)

 

“산 앵두나무 꽃이 펄럴펄럭 나부끼네. 그대 어찌 그립지 않겠소만, 그대 머무는 곳이 너무 머네.”

공자가 말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지, 진정 생각한다면 어찌 먼 것이 있겠는가?”  (논어)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하라, 언제나!” (Be with the least, always!)

어제 교황님을 방문했던 어느 일행들에게 주신 교황님의 짧은 권고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 진리이며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존재방식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은 가장 작은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언제나! 바로 오늘 말씀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어제 수도형제가 공동카톡방에 올린 수도원 대문 뒤쪽에서 발견했다는 유인물의 차마 입에 올리기 거북한 저주의 거친 문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먼저 되라. 천벌 받는다”

“못되 쳐먹은 새끼들아 천벌 받는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나 이 또한 사순시기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우리의 깊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마디로 알아 들었습니다.

“사람이 먼저 되라”, 수도자, 사제, 신자이전에 “사람이 됨”은 기본이겠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와 복음 말씀이 사람됨의 기본을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 13장은 다니엘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수산나를 구하는 무려 63절까지 계속되는 참으로 긴 장입니다. 개신교 공동번역에는 생략되고 가톨릭 공동번역에만 나오는 외경에 속하는 다니엘서입니다. 여기서는 수산나가 고립무원의 외로운 처지의 가장 작은 자가 됩니다.

 

 반면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보다는 루카복음에 더 어울리는 감동적인 내용으로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자가 고립무원의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혜성같이 등장한 주인공이 제1독서 다니엘과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이 두분은 참으로 사람됨의 모범을 보여 주면서 가장 작은 자들과 함께 하시는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니엘서에서 음욕에 빠져 수산나를 사지에 몰아넣은 사악한 두 원로를 응징하고 수산나를 구원하는 다니엘의 용기와 지혜로운 처신이 참 통쾌합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하느님은 다니엘을 통해 개입하신 것입니다.

사실 수산나의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된 것이지요.

 

사실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들 사악한 원로의 흉계에 빠졌을 때도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이들 손아귀에 걸려드는 편이 낫겠다하며 결연하게도 이들과의 타협을 거절합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속에서도 수산나는 눈물이 가득한 채 하늘을 우러러 보니 그대로 주님 향한 일편단심 사랑과 신뢰, 희망의 기도하는 눈길이요 이어지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께서는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십니다...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그순간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심으로 개입하심으로 두 원로는 가차없는 심판을 받았고, 수산나는 구원되어 살아나니 말그대로 구사일생, 천우신조입니다.

온 회중은 이구동성으로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인이 살아나는 과정도 참으로 극적입니다. 정말 제1독서의 사악한 원로들처럼 간음하다 사로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야 말로 정말 사악한 죄인들입니다. 예수님 빼놓고 정도의 차이일뿐 모두가 죄인들입니다. 이 여인과 함께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버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침착한 처신이 놀랍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을 촉구하는 적대자들에 아랑곳 없이 침묵중에 묵묵히 땅위에 무엇인가 쓰시며 주위 사람들 모두의 흥분을 진정시키며 밖으로 향하던 눈길을 자기 내면으로 향하게 합니다. 이어 다음 말씀으로 기상천외한 반전이 이뤄지니 진정 천상 지혜의 계시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새삼 자비의 깊은 샘에서 솟아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다니엘은 물론 예수님의 지혜는 그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많이 회자되는 말마디인지요!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시니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 지혜로운 처신이 놀랍습니다. 그동안 이 말씀을 들은 이들은 죄가 많은 나이 많은 이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과 여자만 남습니다.

 

모두를 자발적 회개로 이끌어 모두를 살리는 자비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지혜입니다. 이어지는 둘 사이의 대화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주님의 모습이 약여(躍如)합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도 단죄하지 않는데 누구 누구를 단죄합니까? 주님은 회개한 이들을 단죄하지 않고 그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오직 오늘 지금부터 새로운 시작의 삶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즉시 회개하여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함이 지혜이자 구원의 첩경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고 살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오늘 온 종일 되뇌고 싶은 화답송 시편 마직막 구절입니다.

 

“주님,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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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아들이 있는데 게임만 하면서 인생을 낭비합니다.

성인이니까 그냥 놔둬야 할까요?

아니면 게임을 못하게 일일이 따라다니며 잔소리해야 할까요?”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듭니다.

요즘에 취업하기 힘들다고 하니 그냥 꾹 참고 다녀야 할까요?

아니면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해야 할까요?”

 

이런 식의 흑백 논리를 말하면서 답을 이야기해 달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다양한 길이 있음에도 선택의 폭을 스스로 좁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이렇게 단순화하면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편안한 심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다시 더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세상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답이 많은 세상에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근시안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기준이 정확해야 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긴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의 기준을 정확하게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벗어나는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다면서,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지 묻습니다.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다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죽이라고 하면 이제까지 가르쳤던 사랑은 어디에 있냐면서 또 다른 트집을 잡았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떠나갑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억지를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간음했다고 하는데, 혼자 그 자리에 온다는 것 자체가 큰 억지이요. 여자 혼자서 간음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그들은 사랑 없는 닫힌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야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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