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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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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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제1독서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9ㄷ-1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9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11 주님께서 늘 너를 이끌어 주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넋을 흡족하게 하시며 네 뼈마디를 튼튼하게 하시리라.

그러면 너는 물이 풍부한 정원처럼, 물이 끓이지 않는 샘터처럼 되리라.

12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13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14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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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복음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7ㄴ-32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27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28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29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30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3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32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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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오늘의 복음 묵상

아래를 클릭하시면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의 오늘의 묵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재의 수요일이 지나고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이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사순 제1주일이 시작됩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와 금식, 금욕

barrierfreelife.verycleanpro.com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구속주회 한국지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묵상글

 

2월 17일 하느님 안에서 살기

 

세리는 공적인 죄인이었고, 바리사이는 자칭 의인이었다. 세리는 따가운 눈초리와 죄의식으로 괴로웠고, 바리사이는 당당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거다. 그러나 정작 위험에 처해있던 이들은 세리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이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조차도 선하신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라고 하셨고, 세상에 죄 안 짓는 사람이 어디 있나?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낫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다고 한다.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자신이 늘 옳다고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의롭지는 못해도 잘못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다른 성향을 지닌 이들을 마치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비난하고 그들이 뭘 모른다고 한심스럽게 여기는 걸 거다. 또한 큰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TV에 나오면 분노하고 욕한다. 죄는 심판받아야 하지만 죄인은 용서받아야 한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성장하고 그런 처지에 놓이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그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한다. 하느님에게 죄인은 당신의 아픈 손가락이다. 그들을 용서하시지 않고서는 당신이 아프고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런 간절한 마음을 보여주셨다. 싫어하는 사람과는 함께 밥 먹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적인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그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그들을 용서하셨고 사랑하심을 알려주셔야 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걸 얼마나 바라시는지 잘 아셔서 그걸 잠시도 미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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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러니 잘난 체를 하지 말고 안다고 옳다고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 하지만 죄인이라고 주눅 들거나 우울해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바로 이런 나를 사랑하시는 줄 믿기 때문이다.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부도수표 같은 내 결심을 바보처럼 언제나 믿어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떠나서는 한시도 안전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하느님 생각만 할 수는 없다. 눈을 뜨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바쁜 생활 중에도 한두 번 하늘을 보며 하느님께 도움을 구한다. 그리고 무겁게 내리누르는 눈꺼풀을 버티며 허물로 누벼 놓은 하루에 용서를 구하고 꿈에서도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산다. 예수님,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하느님 생각만 하며 생활할 수는 없지만 하느님 생각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제멋대로 생각하고 세속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과 한 발 더 가까워지게 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을 보면 길을 잃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잊어버리지 않는 줄 압니다. 아멘. (이종훈 신부님 복음 묵상)

 

 

 

 

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사순시기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님 묵상글

 

재작년에 코 수술을 받았습니다. 콧속에 혹이 나서 냄새를 맡지 못했고 또 숨을 쉬기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수술 후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코안을 꽉 막고 있는 솜으로 인해 답답해서 어떻게 할지 모를 정도가 되었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통증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선택은 계속 누워만 있었습니다. 자다 깨다 만 반복 하며 하루 종일 누워 있었습니다. 저를 아는 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제일 싫어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곧바로 행동하는 것이 저였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입원해서 있는 이틀 동안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나이팅게일’은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차이를 ‘걷는 것’이라고 구분합니다. 환자는 걷지 못하고, 건강한 사람은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두 다리를 걷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도 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없다고, 또 돈이 없다면서 잠시라도 걸음을 멈추고 있다면 지금 아픈 것이라고 하십니다. 저도 경험해 보니 아프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픔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평소에 운동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지요. 그렇다면 정신의 건강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정적 감정을 몰아내고 긍정과 희망의 감정이 가득할 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하지만, 요즘 시대에는 정신의 건강을 위해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이 세상 안에서 욕심과 이기심이 만연하면서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걷지 못하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 포기와 좌절을 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의 메시지가 더 큰 힘이 됩니다. 걷지 못하고 자리에 멈춘 사람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분명히 밝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따르는 주님의 메시지는 모두 희망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올바로 따르는 이는 이 희망 안에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절망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아 걷지 못할 때, 얼른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하는 한 줄기 ‘빛’입니다.(조명연신부님 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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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7일 매일미사 성베네딕도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글

"나를 따라라"

-회개한 죄인罪人, 치유받은 병자病者-

 

죄인이자 병자인 우리들입니다. 무지의 어둠에서 기인한 죄요 병입니다. 바로 원죄가 상징하는바 무지입니다. 무지의 인간, 이것이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예수님 하나뿐입니다. 이런 무지의 사람인 우리를, 병자요 죄인인 우리를 회개에로 부르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의 내면을 꿰뚫어 통찰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눈’입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외 없이 살 길은 이 길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라라.’ 하십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아무리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도 따를 주님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지요.

“나를 따라라.” 예수님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의 출구出口'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세관에 앉아있던 ‘갈망渴望의 사람’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앉아있음-일어남-따름’이란 일련의 역동적 동작이 레위의 내적변화를 상징합니다. 마냥 앉아있지 말고 벌떡 일어나 주님을 따라 걸어야 삽니다. 무지에서 지혜로, 죽음에서 생명에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회개로, 병에서 치유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들이 평생 부르심의 내용들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용서받고 치유받게 된 레위입니다. 바로 레위는 주님을 찾는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말 그대로 회개에로 부르심이요, 치유에로의 부르심이요, '참 나'에로의 부르심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엑소더스 Exodus!’ 무지와 어둠,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우리를 이 무지와 어둠, 죽음의 세계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겠는지요. 부르는 분이 계시기에 응답이지 부르는 분이 없으면 응답도 없습니다.

  부르심이야말로 그대로 구원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우리들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나오는 "예수님은 나의 운명이자 사랑이다.'라는 고백입니다. 평생 살아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무지와 어둠, 죽음의 세계에서 죄인과 병자로 머물다가 자기도 주님도 모른 채 세상을 떠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나를 따라라.” 혼자서는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죄인인지도 병자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할 때 비로소 치유와 위로요, 내가 누구인지 깨달아 알게 됩니다. 기쁨과 평화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님이, 형제들이 없으면 결코 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주님과 형제들은 바로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예전 사막수도원과 같은 미국 뉴튼 수도원에 잠시 머물 때 체험이 생각납니다. 변화 없는 외적 삶에 어제와 오늘내일이 구분이 안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매일이 무미건조한 ‘일상의 늪’처럼 느껴졌습니다. 함께 기도할 때, 함께 식사할 때 비로소 서로를 확인하며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늪에서 구출해 내는 공동식사와 공동기도의 은총을 절감했습니다. 공동체와 끊어져 격리된 고립단절된 혼자의 외로운 삶이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인지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형제들이 바로 구원임을 고맙게 깨달았던 체험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이런 공동체의 고마움에 대한 체험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러니 ‘1인 가구’가 오늘날의 추세라지만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한지요.

 “나를 따라라.” 사랑의 목자牧者, 사랑의 의사醫師인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날마다 당신 공동체에 합류시키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해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핵심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병자들을 치유해 주시고 죄인들을 회개시키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세상에 병자 아닌 사람, 죄인 아닌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정도와 양상의 차이일 뿐 모두가 죄인이자 병자입니다. 죄와 병의 긴밀한 관계도 엿볼 수 있습니다. 죄에서 기인한 병이요 병에서 기인한 죄도 많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니 회개할 때 용서에 치유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회개한 죄인’, ‘치유받은 병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느낍니다. “너는 오래된 폐허를 재건하고, 대대로 버려졌던 기초를 세워 일으키리라. 너는 갈라진 성벽을 고쳐 쌓는 이, 사람이 살도록 거리를 복구하는 이라 일컬어지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공동체에 하시는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어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죄인, 치유받은 병자인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를 말씀하십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요, 새삼 이웃의 치유와 더불어 우리의 치유요, 이웃의 구원과 더불어 우리의 구원임을 깨닫게 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해 주리라.”(이사 58,9-10.14) 아멘 (이수철 신부님 복음묵상)

 

2024년 사순시기 )  회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스스로 회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하느님에 대한 이미지를 사람의 생각에 가두는 모습입니다. 기도의 양을 늘리고, 희생의 수를 헤아리고, 재물과 재능봉사를 더 많이 하는 것으로 회개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희생을 원하지 않고 자비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그분을 닮고 따르는 삶이 회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일은 관계 안에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와 선이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회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회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만심 때문일 때가 많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어떻게 돌보고 계시는지, 또 내가 어떻게 사랑받고 있는지를 아는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클수록 나도 뭔가를 내어주려는 마음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성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응답을 “돌려드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아버지에게서 무상으로 받은 것이기에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돌려드리는 방법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은 볼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의 필요성을 헤아려 그 필요성을 채우는 데 돌려드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한다는 것은 무상으로 내어주시는 사랑에 대해 무상으로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사랑받고 있는가를 아는 인식의 첫출발은 하느님의 무상성이며 무상성의 뿌리는 창조에 있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은 피조물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피조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빛과 물과 양식을 공급해 줍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들이 거기서 자양분을 얻어 살아갑니다. 생태계의 어느 한 부분만 없어져도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무분별한 자연 파괴가 자연재해로 이어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을 통해서 사랑받고 있음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창조는 일회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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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께서는 창조하는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피조물은 독립된 존재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독립된 존재는 없습니다. 생명의 연결 고리를 보면 서로를 내어주면서 공생하고 공존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 독점과 소유로 지배의 영역을 넓히면서 피조물과의 관계도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로 인하여 고통받고 있습니다. 내가 현재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나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어주시는 사랑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우리는 관계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선하심이 흐르게 함으로써 참여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창조에 참여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결단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여건이 좋아지면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건이 좋아지면 다른 생각을 합니다. 무엇이 해결되면 해보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병이 치유되면, 좀 더 성숙해지면, 네가 먼저 나를 사랑하면, 상처를 극복하고 나면, 네가 먼저 용서를 청하면, 네가 먼저 다가오면, 뭔가를 해보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금 행하는 일로 관계를 비춥니다. 하느님의 창조로 창조된 내가 관계 안에 자리 잡은 비극을 메우는 일과 단절된 관계의 회복으로 창조의 영역을 넓히는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고 지금 그렇게 행한다는 말입니다. 사순절이나 대림절에만 부활과 성탄을 준비하기 위하여 회개해야 하는 게 아니고 회개는 매일매일 일상의 관계 안에서 나를 내어주면서 성장하는 믿음의 중심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사랑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선의 흐름이 있는 데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회개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반사된 선으로 관계를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 그것은 반사된 선이며 기쁨으로 드러납니다. 회개의 열매는 기쁨이며 반사된 선으로 관계를 밝힙니다. 감사와 감동과 감격의 순간들이 기쁨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피조물과 너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이 얼굴과 온몸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OFM 작은 형제회 이기남 마리첼리노 수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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