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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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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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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16일 토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16일 토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16일 토요일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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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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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53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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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6일 매일미사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논란을 점진적 구조로 펼쳐 나갑니다. 전반부에서는 군중 사이, 후반부에서는 권력가들 사이의 논쟁이 나옵니다. 사회의 하층부부터 상층부까지 예수님에 대한 논란이 점차 고조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최고 권력층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위험한 인물로 여깁니다. 결국 '위험인물' 예수를 잡으려고 성전 경비병들까지 보내지만 그분을 체포하지는 못합니다. 경비병들조차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감탄하며 연행을 주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지도층은 ‘율법’을 근거로 그들을 비난합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신망받는 율법 학자였던 니코데모가 "우리 율법에는"이라는 전제를 달며, 율법에 근거하여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심판할 수 있다고 상기시켜 줍니다. 결국 이에 반박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수선한 불안과 부당한 적대감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논쟁과 격분과 폭력에 침묵하실 뿐입니다. 독서에 나오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처럼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리는 자세로 계십니다. 사람들은 논쟁하고 술렁이며 요동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한 침묵으로 마지막 때를 기다리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존엄, 전전긍긍하지 않는 태도로 아버지의 뜻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그 거리만큼 구원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요즘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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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아버지가

  병실에서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의사가 와서 그를 살피더니 사망했다고 판정하고 서류에 서명했다. 누워서 그 소리를 들은 할아버지가 울고 있는 부인의 손을 잡으며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알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나무라며 여기 이 서류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예수님은 당신이 구세주 메시아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수십 년 목수의 아들로 산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구세주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나.

예수님이 그걸 모르셨을 리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보지 말고 당신이 하는 일들, 당신이 있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믿으라고 하셨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

  감옥에 갇혀 불안해진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당신이 메시아가 맞느냐고 확인하려 했을 때도 이렇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4-6).”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돌아왔다.

그 이유는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기(요한 7,46)” 때문이다.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처럼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저주받은 이들(요한 7,49)’일뿐 아니라 아마 글도 읽을 줄 몰랐을 거다.

최고 의회 의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다 조사했다.

율법을 어기는 자가 메시아일 리가 없고, 예언서에 따르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돼 있으니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태어난 그가 메시아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치유 구마는 그의 특별한 신통력이거나 마귀의 힘을 빌려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판단했다(마태 12,24).

   그들은 책만 보고 판단했고, 율법을 모르는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 말씀을 가슴으로 들었다.

 예수님이 베틀레헴에서 탄생하셨음을 알았더라도 그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메시아가 외진 마구간에서 태어났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예수님은 책을 쓰지 않으셨다. 그분은 행동하셨다.

그분은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셨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셨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계신다. 그때는 한 사람으로 살아계셨고 지금은 영으로 살아계신다.

치유와 구마 그리고 가르침도 당신의 육체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계신 하느님의 영이 한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믿음이다. 그때는 하느님의 모습이 가려진 한 사람을 보고 믿어야 했다면, 지금은 사람의 모습까지 감춘 작은 빵을 보고 믿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으로 나를 구원하셨고, 바로 그분을 믿어 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

   우리의 믿음이 더 고귀하고 순수하다. 병이 낫지 않고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분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사람으로 나타나셔도 그분을 믿지 않을 거다. 믿는 대신 그분을 연구할 거다.

예수님, 저는 주님을 믿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줄 압니다. 때가 차면 믿음의 내용도 다 이해하게 될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영원한 생명을 주는 제 믿음을 보호하여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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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우리의 신앙은 혹시라도 진지한 성찰과 회심이 생략된 신앙,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값싼 신앙이 아닌지요?

인류 역사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숱한 사이비 교주들이나 거짓 목자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아직도 그 사악한 무리들은 약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피정 센터에서 사목하면서 피해자 부모님들을 가끔 만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세상 사랑스러운 딸이 거기 들어간 지 삼 년, 오 년, 십 년입니다. 어떻게서든 빼내 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백약이 무효입니다.

  사이비 교주로부터 자녀를 한번 구해보겠다고 별의별 방법을 다 강구해보지만, 보편적인 우리 머리 꼭대기에 있는 그들을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이리저리 자녀를 따라 전국을 헤매다 보니 가정은 폐가망신이요 풍비박산입니다. 사이비 교주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의 사악한 계약 앞에 선량한 백성들을 속수무책으로 넘어집니다.

간당간당한 재산을 다 털어 갖다 바칩니다. 혈연까지 결연히 끊어가며 사악한 무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생의 중차대한 결정 앞에 정확한 판단력이며 식별력입니다.

사실 종교라는 것,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우리네 인생에 종교는 큰 부분이요, 더 나아가서 삶의 전부입니다.

 어떤 종교를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랄까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과 이성이 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진지한 성찰과 회심이 생략된 신앙,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배제된 값싼 신앙, 고통과 십자가는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현세적 성공과 축복만을 청하는 싸구려 신앙, 우리가 목숨 걸고 반대해야 할 웃기는 신앙입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바로 보는 관점에 있어서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바라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할 메시아, 구세주 하느님으로 바라봤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누군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 거짓 예언자들이나 사이비 교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완전 다른 존재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즉각적으로 알아보기 위한 식별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 신앙을 성찰해봅니다.

자신의 동굴 안에 깊숙이 갇힌 나머지, 세상의 고통이나 슬픔, 눈물이나 아픔에는 단1의 측은지심도 없는 것은 아닌지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라는 열매는 하나도 없이

그저 말로만, 결심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닌지 깊이 묵상해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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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여러 부류가 설왕설래하는 얘기입니다.

일반 군중은 예수님이 메시아 또는 예언자일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오라고 보냈던 성전 경비병들은 왜 붙잡아 오지 않았느냐고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질책하자 예수께서 대단한 분이라고 합니다.

니코데모가 본인의 말을 듣고 한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라는 율법을 들어

신중론을 펴자 무지막지한 말로 그 말을 막아버립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이것을 보면서 저는 ‘결정과 단정’을 오늘 강론 주제로 잡았습니다.

결정(決定)단정(斷定),

지도자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단정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부연하면 단정이란 끊을 단(斷), 정할 정(定)이니 다른 사람의 의견은 죄다 끊어버리고 혼자서 그러니까 독단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금 우리 교회가 많이 노력하는 시노달리따스와 정반대지요.

시노달리따스는 함께 여정을 간다는 뜻의 Synod에서 나온 말로 함께 결정하는 방식과 그런 정신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사실 뭔가를 결정할 때 제일 쉬운 방식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입니다. 단체의 최고 지도자가 혼자 결정하면 다른 사람은 그저 따르는 방식입니다. 제일 쉬운 방식이지만 이것은 제일 나쁜 방식이지요.

민주주의적으로도 나쁜 방식이지만 신앙적으로도 나쁜 방식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사람이 독점하는 방식이고, 다른 사람에겐 하느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식이니 말입니다.

그다음 쉬운 방식이 다수결 의결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독단적인 결정 방식보다 한결 민주적이긴 하지만 제일 좋은 방식은 아니고 제일 완전한 방식도 아닙니다. 제일 좋고 완전한 방식이 바로 시노달리따스입니다.

 

  밑에서부터 공동으로 합의를 이루어낼 때까지 서로 설득하고 계속 논의하는 방식이니 제일 완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근자에 시노달리따스를 많이 얘기하고 있는데,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지지부진한 상태이지만, 우리 교회가 초대 교회의 예루살렘 사도 회의부터 십수 차례 공의회까지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 집단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일 완전한 만큼 제일 어려운 방식이기에 우리 역사에서 이러하지 못한 적이 실제로 있었고, 우리 단체들 가운데서 이러하지 못한 곳도 많지요.

이런 면에서 제가 제일 마음 아픈 것은 저희 프란치스칸 공동체들 가운데도 이런 곳이 상당히 있다는 것입니다.

 

시노달리따스 정신을 제일 잘 살아야 할 사람들이 프란치스칸인데 말입니다.

사실 프란치스칸 공동체는 Fraternitas 곧 형제적 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 책임자가 있지만 그는 장상이 아니라 봉사자요 수호자이고, 모든 형제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모든 형제와 함께 식별하고 결정하는 존재이지 결코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단정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을,

결정은 하되 단정은 하지 말아야 함을,

오늘 복음의 수석 사제들에게서 배우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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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코코 샤넬(CHANEL)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쪽 분야에 거의 문외한이라 할 수 있는 저도 샤넬 복장이 현대 여성복의 시초였다는 것, 그리고 샤넬 복장을 착용한 여성이 스타일과 분위기 등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샤넬 넘버 5 향수를 뿌려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샤넬의 패션과 향수는 전 세계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창시자 코코 샤넬은 고령에도 활동적이고 부지런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결국 자리에 눕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력은 떨어지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힘들어했습니다.

 

1971년 1월의 어느 주일, 그녀는 리치호텔의 스위트룸에서 곱게 차려입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그녀 곁에는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이런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아! 당신이 날 죽이고 있어요.”,  “당신은 날 죽이려 하시는군요!”

 

 그리고 87세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살포시 눈을 감으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국 사람은 죽는구나.”

 

코코 샤넬의 말대로 우리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아파서는 안 되고, 자기는 늙어서는 안 되고, 자기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프고 늙고 죽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걸어가야 할 과정인데도, 이를 인정하지 못해서 하느님께 불평불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연한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기 뜻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느끼는 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은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바리사이들이 니코데모에게 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암시하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태생이 아니라 베들레헴 태생이며, 그 집안은 다윗 임금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경 말씀대로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그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리가 그분 뜻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만을 내세워서 진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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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생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주겠다.”(에제36,26)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 믿는 이들의 평생 화두입니다.

분명한 것은 믿는 이들에게는 끊임없이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날마다, 새롭게!” 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에서 제1독서에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에서의 예수님의 고립무원의 처지를 느낍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은연중 감지됩니다. 두분다 하느님께 대한 강철같은 신뢰와 사랑을 지닌분들입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시편7,2-3).

 

그대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의 처지에 대한 묘사같고 이런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하느님만이 예레미야에게 유일한 구원의 출구임을 깨닫습니다. 아마 복음의 예수님도 매사 예레미야처럼 하느님께 희망과 신뢰를 두고 하루하루 절박한 마음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반응을 통해 예수님의 처지가 은연중 짐작되며 주변인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감지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전혀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으며 예수님을 만난 이들의 소감들만 전할 뿐입니다. 추측컨대 하느님과 깊은 결속관계의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저분은 메시아시다.”

 

예수님은 만난 이들에 대한 반응에 대해 격렬한 반대 의견이 이어지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쉽게 범접할 수 있는 예수님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성전 경비병들의 생생한 목격담에 역시 바리사이들의 격렬한 반대 의견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중에서 니코데모와 같은 깨어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미 예전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던 분이기에 예수님을 아는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위해 변론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역시 이에 대한 동료 바리사이들의 반응은 얼마나 완고한지요! 무지의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이 철벽같습니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새삼 예수님과의 참 만남이, 예수님을 참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살아 있는 참 만남이 없으니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감춰져 있습니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 침묵중에 주변에 활짝 열려 있을 주님을 만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분들의 체험을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의 모든 남녀들이 해야할 일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은 복음의 깃발이며, 예수님 마음 안에 있는 이들이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내에서 소유는 나눠져야 한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순수한 그리스도교이다!”

“내가 은퇴한다면, 나는 전직 교황이 아니라 전직 로마의 주교로 불리길 원한다. 고백사제가 되고 병자들과 친교를 가질 것이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런 고백도 가능합니다.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전직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부도덕적이고 무원칙적 사람들에 의해 이념적이고 정치적 목적으로 도구화됨으로,

10년 동안 우리 둘은 얼마나 많이 상처를 받았는지...”’

이런 고통들을 수용하고 견뎌낼 수 있었음도 예수님과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일치 체험에서 가능했음을 봅니다.

 

우리의 예수님과의 관계가 시냇물 깊이라면 두분 교황님의 예수님과의 관계는 태평양 바다 깊이일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와의 만남을 고대하십니다. 당신을 만나, 당신을 알고, 당신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어제 교황청 설교가 추기경의 4번째 사순강론도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자로의 부활은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의 원인이 되었다. 그분은 시간의 끝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된 부활인 것이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활한 주님을 만나, 주님을 알고, 또 주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제 매주 2회 수도원 쓰레기를 말끔히 정리하면서 섬김의 직무에 충실한 원장 수사를 통해서도, 어느 형제와의 유쾌한 문자 메시지를 통한 만남에서도 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대화 나눔을 일부 공개합니다.

 

    “신부님, 항상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성덕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랑스런 아버님 모심을 축하드립니다!

형제님은 아버님만 보고 배워도 성인이 될 것입니다!

그 89연세에 영육이 건강하시니 축복입니다!

형제님도 아버님 건강 타고 나셔서 영육으로 건강할 것이니 감사하며

은총의 사순시기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 기쁜 소식

아버지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아버지께 신부님 말씀 전해드렸더니 환하게 웃으시네요.

아버지 환하게 웃으시니 저도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신심깊고 다정한 부자(父子)분을 통해서도 참 좋으신 예수님을 만난 듯 어제는 많이 유쾌했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파스카의 봄같은 분입니다. 예전에 나눴던 “예수는 봄이다” 시를 다시 나눕니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싹 돋아난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1999.3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봄같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처럼, 봄처럼, 살게 합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참 자주 많이 나눴던,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주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저의 답변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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