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오늘의묵상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반응형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17일 주일미사 - 제1독서

2024년 3월 17일 주일미사 - 제2독서

2024년 3월 17일 주일미사 -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오늘은 사순 제5주일로 성자께서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세우시고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순종하심을 묵상합시다. 우리는 온갖 시련을 겪으시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여, 하느님 나라에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반응형

 

 

사순 제5주일부터 성당의 십자가와 성화를 가립니다!

성당에 있는 모든 십자가와 성화 상들을 가림

 

사순 5주일부터 성당에 있는 모든 십자가와 성화 상들을 가리는 관습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한국 교구들에서는 이 관습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거행을 마칠 때까지 가려두게 됩니다. 성화 상들은 파스카 성야 예식을 시작할 때까지 가려두게 됩니다.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셋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합니다. 

 

십자가는 성금요일 주님 수난 예식 거행을 마칠 때까지 가려두게 됩니다

 

 

반응형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나는 새 계약을 맺고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1,31-34

31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32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34 그때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기 이웃에게,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주님을 알아라." 하고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모두 나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7-9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복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0-33

20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21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하고 청하였다.

22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드리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27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28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그러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서 있다가 이 소리를 들은 군중은 천둥이 울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사가 저분에게 말하였다." 하는 이들도 있었다.

3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그 소리는 내가 아니라 너희를 위하여 내린 것이다.

31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33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어떻게 죽임을 당하실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2024년 3월 17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일 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바랐을 소망을, 오늘 복음은 그리스 사람들의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동문서답 같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매우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뵙고 그분을 알고 싶다면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가는 참된 파스카를 이해하여야만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생명'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의 신비가 온전히 드러난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은 뒤 다시 열매를 맺듯, 십자가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파스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마지막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당신을 뵙게 하여 달라는 이방인들의 요청에, '땅에서 올려진 십자가'야말로 가장 정확히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장소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사랑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면, 그 자체로 억압이고 폭력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은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지요. 그러나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그 고통스러운 계획이 이제 시작되려고 합니다. 십자가야말로 죽음으로 사랑을 드러내는 완전한 사랑의 장소요 그 약속(계약)의 장소인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반응형

 

 

 

 

 

예수님의 복음 전파 활동은 그 당시 사회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던 것 같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우려할 만큼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모여들고 그분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보내서 그분에 대해 알아보게 했고(마르 3,22; 7,1), 앞선 문명을 가진 나라 그리스에서 사람들이 그분을 뵈러 찾아오기도 했다(요한 12,20-21). 당신을 뵈러 온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인사 대신 생뚱맞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3-25).”

 

  예수님의 말씀이 첫 만남에 무례한 것 같이 보이지만 그 말씀이 곧 그 그리스 사람들이 당신을 만나려는 이유였다.

예수님은 지금 나와 같은 한 사람이었는데 당신의 겉모습에서 뭐 특별한 게 있었겠나. 그분의 참모습, 그들이 찾는 진리는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고, 그리고 그 위에서 당신을 봉헌하신 모습에서 진정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온 세상에 증언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다. 그 사랑, 예수님의 그 선택과 순종은 우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외아들을 내놓은 아버지가 바로 우리 하느님이시다. 이 세상에는 없고 오직 하느님만 하시는 사랑이다.

 

  그전에는 예언자를 통해서 또는 글로 책으로 율법으로 당신 사랑을 전하셨는데 잘 전달되지 않았다.

사느라고 바빠서 설교를 못 듣고, 글을 모르니 읽을 수 없고, 너무 많고 복잡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과의 계약을 깨뜨린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계약을 파기할 수 없었다. 당신이 먼저 나서서 맺은 계약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파기되면 무엇보다도 당신의 사랑이 알려질 수 없었다. 사랑은 재채기처럼 감추래야 감출 수가 없다.

  하느님은 당신이, 당신의 사랑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하느님은 설교나 책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영원한 계약을 새겨 넣기로 하신 것 같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1-33).”

 

 누가 가르쳐줄 필요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사람들 마음 안에 새겨 넣으셨다.

그 법은 특별한 곳을 찾아가지 않아도 사는 그 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한데 고집은 정말 세다. 이런 존재를 움직이는 건 정말 어렵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바꾸기 시작하고 순종하게 만든다. 설령 바꾸거나 순종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보다 이 땅에 사신 성자 예수님이 사람의 이런 마음을 더 잘 아셨을 거다.

안 하려고 해도 하게 되고, 빠져나오고 싶어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죄인의 고통을 예수님은 아셨다.

그리고 사람은 선물에 약하고 희생에 마음을 내준다는 것도 아셨다.

나를 위해 헌신, 희생한 이들은 언제나 내 기억 속에 있고 내 마음 한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다 드러났다.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을 필요 없다. 시간 정력 낭비다.

진리를 찾는 그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밀알, 씨앗의 생리를 비유로 사랑을 말씀하셨다.

사랑은 진리를 찾는 철학과 하느님을 찾는 신학이 만나는 곳이다.

씨앗은 씨앗 그대로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을 버리고 대자연에게 자신을 맡기면 수십 배 열매와 또 씨앗을 낸다.

잘 알지만 그대로 따르기 쉽지 않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아니라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자신을 버리고 따라가는 십자가의 길은 진리의 길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으니, 하느님을 믿고 그 길을 따라간다.

예수님, 저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릅니다.

자주 넘어지지만, 주님은 저의 이런 딱한 처지를 아주 잘 아신다고 믿으니 일어나 다시 시작하고 또 시작합니다. 이렇게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게 승리라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의 수난과 고통을 지켜보시며 끝까지 믿으셨으니 자꾸 넘어지는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반응형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유다인들의 대축제이자 큰 명절이었던 과월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3년여 에 걸친 공적 활동을 마무리 지으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수난-죽음-영광의 때’가 이르렀음을 아신 예수님의 머릿속은 백 가지 생각이 교차되며, 무척이나 산란했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당신만을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끔찍하고 처절한 수난과 죽음의 독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그러나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단 한 발자국도 회피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또한 잘 알고 있으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심란했을까요?

 뿐만아니라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단과 당신의 사랑하는 양떼를 남겨두고 떠나셔야 한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이 앞섰을까요? 참으로 두렵고 찹찹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애써 부정적인 감정들을 떨치십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모든 상황들을 모두 아버지께 맡겨드리며, 일반 군중들을 위한 마지막 강연을 펼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제 지상에서의 과제를 120펴센트 완수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남아 있는 마지막 관문인 수난과 죽음의 길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남기시는 말씀의 핵심 키워드는 ‘밀알 하나’였습니다.

 

 내어놓음이나 희생, 변화나 쇄신, 결국 죽음을 거부하는 밀알은 언제까지나 그저 한 알 밀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아를 포기하고 길을 떠날 때,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성장과 변화, 열매와 발전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나 이단자들이 크게 강조하는 바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고통을 건너뛰는 행복입니다. 희생이나 헌신없는 성공입니다. 말도 안되는 기적의 연출입니다. 십자가 길 대신 꽃길 보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수난과 죽음은 필수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렵고 떨렸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을 용감하게 수용하십니다. 내적인 갈등이 커질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께 의탁하며, 언젠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드러날 아버지의 영광을 꿈꾸며, 얼마 남아있지 않은 당신의 여정을 힘차게 걸어가십니다. 제자인 우리들 역시, 스승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열심히 따라 걸어가야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배에 승선한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운명은 곧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우리도 두려움을 떨치고 그분께서 선택하신 수난과 죽음의 길, 그러나 영광의 길을 기꺼이 선택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반응형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얘기합니다.

그러니 오늘 사순 제5주일은 ‘영원한 구원/생명을 얻는 길’이 주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길은 요한복음에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 예수님이라는 길을 따라가면 진리의 길을 가고 생명의 길을 가게 되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저 김찬선을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제가 주님을 프란치스코나 성인들처럼 잘 따르는 사람이면 저를 따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되기에 저를 따라도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저를 따라오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을 잘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봐야 합니다.

어떤 것이 주님을 잘 따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떠나야 길입니다. 떠나지 않는 길이란 없습니다. 문제는 길 떠나는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황천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가기보다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서 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지켜야 한다고 하신 다음, 모든 걸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자 따르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을 따라야 하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있던 곳을 떠나야 하며,

죽음이라는 강도 건너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홍해가 있었습니다.

홍해는 죽음의 강이기도 하고 생명의 강이기도 합니다. 이집트의 목숨은 잃고 가나안의 목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싫습니다.

자기 부정이기 때문인데 그러나 자기 목숨을 미워함은 작은 자기는 부정하고 큰 자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소아(小我)는 죽고 진아(眞我)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형제회)

반응형

 

 

 

 

 

 

“들어라”만 중요한 말마디가 아니라,

“보라” 역시 참 중요한 말마디입니다. 잘 들어라 있는 두 귀요, 잘 보라 있는 두 눈입니다.

무엇을 봐야 합니까? 믿는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봐야 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모두가 눈여겨 잘 보라고 제대 뒤 중앙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입니다.

 

기후위기 시대에 생명 살림 운동에 전념하는 정성헌 선생의 귀띔 40가지중 맨먼저 나오는 충고가 “보고 싶은 사람이 돼라.”입니다. 과연 보고 싶은 분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은 있으십니까? 아마 제가 제일 많이 보는 분은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일 것입니다. 날마다 교황님 홈페이지를 볼 때 마다 예수님을 뵙듯 만나는 교황님 얼굴입니다.

또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참 좋아하는 장면이 셋입니다.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또 집무실문을 열었을 때 활짝 열려 한눈 가득 들어오는 하늘과 산 그리고 아름다운 수도원 전경에 마음도 환해지고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또 하나는 성전에서 공동전례기도시 한눈 가득 들어오는 늘 봐도 늘 새로운 형제들 얼굴입니다. 특히 지금도 자비의 집 숙소문을, 집무실 문을 활짝 열었을 때 전개되는 풍경과 더불어 생각나는 "당신이 그리울 때" 라는 시가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

-1998.11.22.

 

무려 26년전 1998년 여기서 썼던 시입니다. 물론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 얼굴, 예수님 얼굴입니다. 늘 곁에 있어도 늘 그립고 보고 싶은 주님 얼굴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시편 42장 앞부분 두 구절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시편42,2-3)

 

믿는 영혼들 누구나의 갈망이 이런 하느님의 얼굴을, 예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며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날 위기의 시대라 칭하며 혹자는 셋을 꼽습니다. “1.기후위기, 2.인공지능, 3.쓰레기”로 모두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합니다. 날로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되는 기후요, 곳곳에 넘처나는 쓰레기들이요, 날로 들어나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현재의 추세입니다.

 

스마트폰을 볼 것이 아니라, 특히 신자들은 하느님을 뵙듯, 예수님을 뵙듯, 눈을 들어 하늘을 자연을 무엇보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는 눈의 훈련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스마트폰을 볼수록 시력은 나빠질 것이고 예수님을 볼수록 시력은 좋아질 것입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내가 형성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예루살렘 축제때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 몇이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청합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

 

정말 영성생활에 참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전체를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는 것 역시 능력이요, 똑같은 눈이 아니라 영적 시력의 차이도 클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육안의 시력은 약해져도 영안(靈眼)의 시력은, 심안(心眼)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날로 깊어지는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찬미와 감사의 영안(靈眼)이요, 이런 눈으로 평생 깊이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할 예수님입니다. 분별의 지혜도 이런 눈에서 나옵니다.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이 예수님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평생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하는 예수님이요 날마다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으라고 매일미사가 있습니다.

첫째, 새계약의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이 참 고맙고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변함없이 당신 약속에 충실하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한 새계약의 약속이 마침내 예수님을 실현되었습니다. 새계약의 이 은혜로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계약을 맺겠다...내가 맺어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의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새계약은 예수님을 통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구원의 행복은 없습니다. 주님의 법은 우리 마음에 새겨지고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됨을 확인하는 새계약의 미사은총입니다.

둘째, 순종과 섬김의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값싼 구원은 없습니다. 값싼 새계약의 축복은 없습니다.

새계약이 실현되기까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뇌와 시련과 고난, 죽음과 부활의 일련의 과정을 깊이 들여다 봐야 합니다.

순종과 섬김으로 요약되는 히브리서의 예수님의 평생 삶의 묘사가 큰 깨우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새삼 우리의 현세 삶은 고난을 겪음으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상의 모든 고난을 순종을 배우는 계기로 삼을 때, 오히려 전화위복의 축복이요 주님을 닮아가는 영적성장과 성숙에 좋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어 요한복음은 우리 모두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배우도록 격려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완전히 죽어 무(無)로 없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내적변형을 이뤄주는 죽음입니다.

뿌리가 나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의 수확이니

그대로 새생명의 부활 축복으로 이어지는 죽음입니다.

죽음의 상징하는바 섬김의 사랑, 섬김의 비움입니다. 주님은 섬김과 추종을 명쾌하게 요약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과 추종이 하나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예수님을 따라 닮아가는 순종의 여정이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순종과 섬김의 롤모델인 예수님을 보고 배워 따라 닮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이 참 자랑스럽고 영광스럽습니다.

셋째,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영광스런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보고 배워 닮아가야 할 분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기쁨이 되고 끊임없이 샘솟는 내적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은 순종의 여정에 항구함으로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고백과 기도가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는다. 이제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주님은 부활 영광의 승리로 끝나는 죽음임을 예고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단히 당신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으로 이끄시어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보고 배워 닮아가는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반응형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인은 칸트가 청혼해 주길 원했지만, 칸트는 데이트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칸트에게,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칸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도서관에 가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야 하는 이유 354개, 결혼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350개를 찾았습니다. 이제 결정했습니다.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4개 더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결혼하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구 후에 청혼하러 여자의 집에 갔을 때,

그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결혼의 장단점을 생각하는 동안 3년이나 흐른 것입니다.

심사숙고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미루기만 하는 것은 큰 후회를 남길 뿐입니다. 특히 사랑이 그렇습니다.

사랑은 먼 훗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겠다. 사랑하겠다.” 라며 뒤로 미루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 사랑한다.” 라며 지금 당장 말하고 또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사랑은 미뤄지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지금 사랑해야 함을 주님께 배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계약을 맺으시려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으며,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릴 순간이 다가왔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겪는 하나의 사건이 아닌, 이 세상의 삶을 모두 거는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구원을 위한 사랑 때문에 또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는 사랑을 위해 지금 당장 결심하시고 이행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듯이, 당신 사랑으로 많은 열매가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주님의 사랑이 모든 구원이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해야 할까요?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지금 곧바로 실천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미루는 사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나도 실천하겠다는 이기적인 사랑도 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듯이, 어떤 조건도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랑만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따를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