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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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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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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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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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복음 (말씀의 전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3월 20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성주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본질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스승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제자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드러내 주는 일차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일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 자체이신 분 가까이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진리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 답도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자유’를 통해서 발현됩니다. 구속이나 검열 또는 규제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대하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전락하여 버립니다. 교육이 아닌 조련으로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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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늘 독서는 불가마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로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거부하며 ‘진리’를 선택한 그들은 불가마 안에서도 ‘자유롭게’ 걸어 다닙니다. 그러자 박해의 주범인 네부카드네자르조차 “신의 아들” 같은 존재가 불가마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이고, 이 자유는 ‘진리’에서만 싹트며, 진리는 그분의 ‘말씀’이기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때 진리이신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심지어 지옥의 불가마같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하신 말씀(요한 8,31)’이다.

그런데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등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들은 아마 과거 유행어처럼 무늬만 제자들이었나보다.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기적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적대자들을 몰아내 줄 메시아로 여겼던 것 같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분 말씀 안에 머무름이다(요한 8,32)’. 부모님의 유언을 기억하는 것처럼, 가훈을 써 붙여놓는 것처럼, 예수님 말씀을 외우고 그것이 마음속 한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게 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생활하시게 한다. 예수님은 그 유다인들이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셨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를 짓기 때문이다. 죄인은 죄의 노예다(요한 8,34).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하겠다는 선은 행하지 않고 안 하겠다는 악을 행한다(로마 7,19). 하느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 경찰차나 단속카메라가 보여 긴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나 의로운 사람들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들으면 거룩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하느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사람,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사람,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은 죄의 지배를 받을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곳에 유혹하는 자는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불교 선승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화두를 깨우치기 위해 평생 수련하고,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은 침묵 속에서 예수님 말씀을 하루 종일 되뇐다.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르고 그분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려는 노력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공통의 화두가 주어졌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사랑을 가족과 연인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인류 공동의 집 안에서 함께 사는 다른 피조물로 확장한다. 그들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로마 8,19).

 

믿음은 시련과 도전 속에서 단련되며 계속 성장해야 한다. 더 굳건해지고, 깊어지고, 순수해지는 게 그 성장이다. 다니엘 예언서의 그 세 청년은 이방 나라에서 그 종교와 문화를 죽음의 위협으로 강요받았을 때 임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다니 3,17-18).” 그들은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지만 천사가 그들과 함께 그 불 속에 있어서 그들은 안전했다. 또 죽음의 위협 속에서 에스테르 왕비는 이렇게 기도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 줄 이가 없습니다. …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 4,17(14).(25)).” 그리고 그의 원수는 끝장났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죽음이다. 하느님은 거기까지 내려오셨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뿐이다.

 

예수님,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장).”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이 제 앞에 있으니 저는 하느님 말씀 안에서 생활합니다.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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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의 죽음을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하도록 초대하는 사순 시기에 큰 도움을 줄 명저가 출간되었습니다. ‘남겨진 단 하나의 사랑’ ‘발타사르, 예수를 읽다’ ‘세계의 심장’ 등 불멸의 저서로 유명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가 지은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가톨릭 출판사)입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대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 사상은 제2차바티칸공의회에 크게 기여하였는데,

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표현으로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지만, 안타깝게도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하고 말았습니다.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우리 말로 번역하신 분은 존경하는 윤주현 베네딕토 신부님이십니다.

가르멜 수도자이신 윤신부님 역시 대단한 신학자이십니다.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지만, 다들 엄두도 못 내는 신학 서적들을 꾸준히 번역하고 출간하는데 진심인 신부님의 노력 앞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옮긴 이의 말에서 윤신부님은 아주 간략하고도 명쾌하게 죽음의 신비 속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각인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인생에 ‘영원’을 각인하려는 염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원’의 조각을 새기려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이러한 모든 노력을 수포로 돌아가게 합니다. 마치 냉엄한 사형 집행인처럼 말입니다. 영원을 갈망하지만 그 시작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비극적인 존재, 인간의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 해결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습니다.

성부에게서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위임받아 이 세상에 강생하시고, 친히 우리가 겪을 죽음의 무게를 짊어지심으로써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영원을 향한 희망의 아이콘으로 바꿔 주신 분,

그리스도야말로 결국 한 줌의 재로 영원히 사라질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향한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선사해 주신 분이자,

인류의 진정한 ‘구세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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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신부님께서는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 신앙인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해도, 죽음은 여전히 이승에서 우리의 존재를 최종적으로 마감하며 해체하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죽음에서 부정적인 측면보다 더 강한 긍정적인 의미를 봐야 하고 또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신비적으로 변화되어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죽음 속에서 부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충분히 맞설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긍정적인 실제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과 깊이 일치해 있어야 합니다.

럴 때 신앙인에게 죽음은 자신을 ‘결정적으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과 결합시키는 기쁨과 희망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해 깔끔하고도 명료하게 선을 그어주신 신부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분께서는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이미 당신 자신 안에 우리의 죽음을 간직한 채 수난하고 돌아가셨다. 무엇보다도 그분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존재가 간직한 고뇌와 무능함 그리고 당신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우리의 내면을 제대 삼아 당신 자신을 성부께 온전히 봉헌하셨다.”(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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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이 길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생명이시라는 말씀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길이시라는 것은,

당신께서 하늘과 땅 사이의 길이라는 것, 곧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를 이어 주시는 길이라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요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길이시라는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없으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흔히 얘기하는데 그 차이만큼 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벌어져서

하느님은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없고,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분이실 것입니다.

아무튼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써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가교요 통로가 되어 주신 고마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길이시라는 것은 이렇게 고맙고 가깝게 다가오는 것에 비해

진리시라는 것은 그리 가깝지 않고 그래서 그리 고맙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우리의 느낌에 가깝지 않고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진리의 주님은 진리의 말씀이라는 말처럼 말씀이신 주님이십니다.

말씀이신 주님은 하느님께서 한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처럼 그분으로 모든 것이 생겨났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지만 정작 그 말씀을 하신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지 알 수 없는 분이고, 그래서 멀리 계시는 분이고 신비이신 분이십니다.

아무튼 진리의 말씀이신 주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이 생기게 했기에

이때의 진리는 원리 곧 모든 생명의 원리요 생성의 원리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창조론을 주장하며 진화론을 받아들이더라도 그 진화론은 창조적 진화론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모든 것이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생겨났기에

자연 만물과 모든 일도 이 진리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고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진리는 이치 곧 자연의 이치요 작동의 이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이치에 따라 모든 것이 돌아가고 움직이면 일은 순리대로 잘 풀릴 것이고,

생명은 죽지 않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치를 따르지 않고 누가 제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때의 자유는 진리에 역행하고 순리를 따르지 않기에 일은 꼬이게 하고 생명을 죽게 하는 자유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따라

그리고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의 길을 가면 생명의 길도 갈 것이고,

진리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자유라야 그 자유가 생명의 자유요 참자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씀 참으로 알아듣기 쉽지 않지만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라면

그러기에 오히려 이 말씀 안에 오래 머무는 오늘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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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9,29)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

 

오늘 3월20일 다산 어른의 말씀도 좋습니다. 자유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눈물이 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도 생각이 납니다. 무책임한 자유가 아니라 반드시 책임이 따르는 자유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추구합니다. 자유로와 인간이고 자유로와 행복입니다. 자유가 있을 때 인격이지 자유가 없으면 인격도 없습니다. 과연 참으로 자유롭습니까?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자유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천지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사람은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복된 존재임을 알림이 자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참으로 바라시는 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인

그리스의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도 특이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평생 자유를 추구했지만 자유롭지 못한 작가였습니다.

우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여정이라 하고 날로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여정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자유를 추구하지만 세상것들에 중독되어 세상의 노예되어, 종되어 살아가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된다’ 라는 말마디는 저의 지론입니다.


광야인생 셋 중 하나 즉, 성인이 아니면 폐인, 또 괴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것들에 중독된 자들 얼마나 많은지요!

잘못된 자유의 헛된 추구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으로 괴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제 저는 얼마전 영국의 유명한 베네딕도회 출신의 바실리오 흄 추기경(1923-1999)에 대한 글을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어느 유다인 랍비의 흄 추기경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내가 흄 추기경을 생각할 때 나는 유다이즘의 초기 성인들의 말을 떠올린다.

그들은 묻는다 : “누가 영웅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드는 이다(One who turns strangers into friends).”

그것이 바로 흄 추기경의 위대한 은총이었다.

그는 그의 하느님의 사랑과 그의 인간에 대한 깊은 감정으로 사람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였다. 너희는 흄 추기경 그분과 함께 있는 동안, 너희들은 한없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그는 하나의 친구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그는 삶안에서, 죽음의 면전에서 지극히 고요하고 평온했다. 흄 추기경은 참으로 낯선이들을 친구들로 만든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만나는 낯선이들을 누구나 친구들로 만들었던 흄 추기경이야말로 참으로 매력적인 참 자유인입니다.

대하는 이들을 누구나 무장해제시켜 본연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참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참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역시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유 또한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자유 역시 부단히 배우고 익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사람이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자유를 누리는 능력도 사람마다 참 다양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참 자유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참 자유의 비결은 이 하나뿐이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서울대 교표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이란 말마디도, 하버드 대학교의 로고중 "진리(VERI TAS)" 란 말마디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저절로 자유가 아니라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의 제자로 사는 선택이 우선입니다. 바로 이때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이 진리가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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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에 대한 답도 진리의 자유 하나뿐임을 깨닫습니다. 혼자 격리된 자유가 아니라 더불어 주님안에 머물러 제자들로 살 때 비로소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떠나서는, 더불어의 공동체를 떠나서는, 참 자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유의 여정은 우리 각자 날로 진리이신 주님을 깨달아 알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리와 자유는 불간분의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진리없는 자유는 애당초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라 물으니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은 침묵뿐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함께 갑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칭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조자”라 불리길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 역시 참 자유인이었습니다. “진리에 몸바치는 것이 소원”이라 했던 불가의 고 성철 대선사 역시 익명의 크리스천이자 대 자유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이 참 자유를 분명히 깨닫게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교회에서 죄의 종으로 머문다는 것은 너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정녕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주님과 일치를 깊이해주는 미사은총이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진리자체이신 예수님을 떠나 자유의 추구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은 행위일뿐입니다.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함이 참 자유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스라엘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청년이 참 자유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자유로이 거니는 세 청년들 참 자유인의 상징입니다. 세 청년이 ‘이슬 머금은 바람 서늘한’ 불가마 속에서 한 일은 오늘 독서에서 생략됩니다만 단 하나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세 젊은이는 가마 속에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드리며 찬미하였다.’

 

새삼 불가마 같은 공동체 생활 중에도 온전한 자유인이 되게 하는데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은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떤 역경속에서도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 찬미에 전념할 때 온전한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기절초풍하여 그 사유를 묻는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입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셋이 아니더냐?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참으로 진리자체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온전한 자유인들의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귀신이 곡할 기적에 놀란 임금의 하느님 고백이 감동입니다.

 

“사르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내셨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천하무적의 진리의 용사로서 참 자유인의 삶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진리이신 당신 안에서 날로 자유로워지는 예닮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생명의 샘이 진정 당신께 있고, 우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36,10).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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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텀블러를 구입했습니다.

사실 몇 개의 텀블러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쇼핑몰에서 텀블러 가격이 터무니없이 싼 것입니다. 840원! 그것도 배송비 포함이었습니다.

주문하고 며칠 뒤에 텀블러를 받았습니다.

워낙 가격이 쌌지만, 텀블러의 질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허접하고 지저분했습니다.

물로 깨끗이 닦다가 글쎄 손을 베고 말았습니다.

텀블러의 입구가 제대로 마감되어 있지 않아서 날카로운 것입니다. 싸게 샀지만, 현재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혹시 입술을 베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게 쓸데없는 짐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매우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결코 지금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를 떠올렸을 때 결핍을 느끼지 못합니다. 많은 것이 없어서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그리워하지 않습니까?

욕망하는 것이 적을수록 더 풍요롭고, 더 자유로우며, 더 강력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이기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면 ‘나’ 스스로 하는 것이 줄어들게 됩니다.

온전히 나의 노력을 통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통해 ‘나’를 만들려다 보니 남과 비교하면서 부러운 이유만이 늘어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는 “더 강한 사람일수록 원하는 게 적다.”라는 말을 자기 외투에 새겨놓고 늘 다짐했다고 합니다. 원하는 게 적을수록 ‘나’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더 강한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든 모습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삶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늘 사랑하라고 하셨고, 당신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세상 것에 욕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서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통해서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더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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