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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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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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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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제1독서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7,3-9

그 무렵 3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4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5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에게서 임금들도 나올 것이다.

7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8 나는 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 곧 가나안 땅 전체를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주고,

그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

9 하느님께서 다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계약을 지켜야 한다.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이 대대로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사악
아브라함과 이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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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59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5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52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그러하였는데, 당신은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고 있소.

53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그런데 당신은 누구로 자처하는 것이오?”

5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영광스럽게 한다면 나의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너희가 ‘그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하는 바로 그분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 나도 너희와 같은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5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59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3월 21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성주간이 가까워지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계약’에 집중합니다. 독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이야기하고,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새로운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대대로 내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워, 너와 네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이 계약이 후손들에게도 유효할 것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약의 결과로 “많은 자손”과 “땅”이 약속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심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새 계약의 결과로 약속하십니다. 옛 계약이 많은 자손과 땅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면 새 계약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내용으로 갱신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은 곧장 유다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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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당신이 그분보다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소.” 이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라고 하시며 당신께서 아브라함보다 우위에 계시고, 이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보다 훨씬 중요하고 강력한 계약이 체결될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새로움’에 대한 불편함은 유다인들을 분노와 광기로 몰아갑니다. 돌을 들어 던지려고까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도발을 뒤로하신 채 성전을 빠져나가십니다. 끝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새 계약의 제물로 내놓으시지만, 이 새 계약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죽음은 독침처럼 강하고 두렵다. 모든 걸 멈추게 한다.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고 멀리 있던 이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앞에 와서 머리를 숙이게 한다. 죽음은 참 두렵고 강하다. 증명도 설명도 할 수 없지만 사람은 이 두려운 폭군 앞에 나아오지 않으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것 같다. 죽지 않으려고, 죽음을 잊으려고 애쓴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는다면 이 말씀에 귀가 솔깃하고 마음이 움직이겠지만 믿지 않는다면 헛소리다. 이스라엘 민족의 아브라함 공경은 거의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수준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그들은 예수님은 마귀가 들렸다고 하며 아브라함도 훌륭한 예언자들도 다 죽었는데 자신의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고 하니 아브라함보다 훌륭하다는 거냐고 도전했다.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하느님을 보면 다 죽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다(창세 17,3-4).

 

  예수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아셨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알고 또 보셨다. 아니 세상 창조 이전부터 그분과 함께 계셨다. 당신은 아셨지만, 사람들은 그걸 믿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당신의 진짜 신원을 계속 숨기셨고, 치유와 구마로 삶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한 이들에게도 이것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때가 차면 다 드러내놓고 말씀하시려고 그러셨던 것 같다. 때가 차자 당신에게 영원히 살게 하는 말씀이 있음을 숨기거나 비유로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다 밝히셨다. 아직 쌀쌀한데 노랗게 핀 수선화, 작년에 뿌리까지 다 파내 옮겨 심은 맥문동 그 자리에 또 그만큼 자란 맥문동, 그 생명력에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을 느낀다. 경외심이다. 대자연의 이 두려운 회복력과 생명력은 하느님이 생명의 주인이시라고 내게 증언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라고 초대하는 것 같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이 말씀의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다.’가 된다.

듣기에 어색하고 문법상 맞지 않지만 ‘나는 있다.’ 혹은 ‘나는 ~이다.’ 이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준 당신 이름이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그전에 이미 예수님은 당신이 ‘있는 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당신이 영원하신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유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 늘 현재란 알아듣기 정말 어려운 말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붙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란 망상이고 헛된 바람이 될 수밖에 없나 보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군중을 선동하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심판하고 한낱 인간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 죄를 씌워 사형시켰을 거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러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부활하셨다.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여기 이렇게 답답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영원한 세상에 계시는 주님 말씀을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 말씀 안에 머무르고, 그 말씀이 제 안에 머무르게 하고, 그 말씀을 지킵니다. 제 몸은 죽어야 할 운명이지만 제 인생의 주제는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 말씀을 간직하고 지키고 주님과 친해지면 저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삽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마음을 주님 말씀으로 채우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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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머리에 재를 얹으며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던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사순시기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다들 사순 판공 성사는 보셨나요?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적어도 두 번 고해성사를 보도록

강력히 초대하는 판공성사 문화는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만이 지닌 특별한 전통입니다.

천주교 박해가 심했던 시절, 사제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숨어지내던 교우들을 연 1~2회 정도 방문하여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런 전통이 정착된 것이 판공 성사입니다.

판공성사 때는 각 교우 앞으로 판공성사표가 배부되는데,

이는 교우들의 성사 생활 실태를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됩니다.

어떻게 성사를 강요할 수 있느냐며 불만을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법상 모든 교우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보게 되게 되어있는데, 따라서 판공성사만 빼먹지 않아도 고해성사와 관련된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족시키는 것이니, 참으로 바람직한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숙제나 의무로서의 판공성사가 아니라

기쁨과 축제로서의 판공성사가 되었으면 참 좋겠는데...그것이 참으로 여의치 않습니다.

아직도 많은 분들이 마치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해소 앞으로 나아갑니다. 매번 똑같은 죄를 짓고, 고백하고, 이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의구심을 품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고해성사의 참된 의미와 참맛을 알게 해주는 책, 고해성사에 대한 가치와 지평을 넓혀주는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고해성사의 일곱 가지 비밀’ (비니 플린 저, 전경훈 역, 성바오로)

저자의 고해성사에 대한 은혜롭고 감미로운 체험들과 가르침을 듣고 있노라니,

빨리 고해성사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태양은 누구에게나 햇살을 비추어 빛과 열을 전합니다. 이같이 하느님은 늘 사랑하시고, 누구에게나 빛과 열을 전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과 그분 사랑에서 우리 자신을 갈라놓을 때에도 하느님은 달라지지 않으십니다. 달라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란 바로 그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나를 동굴 속으로 데려갑니다. 고해성사는 나를 동굴 밖으로 꺼내줍니다.”

 

“사제는 단지 사죄(赦罪)를 선언하기 위해 고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영적 안내자, 스승, 교육자의 역할을 맡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풀려나고, 치유되고, 회복되고, 용서받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해소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네가 고해소에 갈 때면, 내가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나는 단지 사제에게 감추어져 있을 뿐, 네 영혼 안에서 활동하는 것은 바로 나다. 너는 내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제는 가림막일 뿐이다. 내게 쓰임 받는 사제가 어떤 사제인지 따지지 마라. 고해성사 때 내게 하듯 네 영혼을 열어라. 그러면 나는 네 영혼을 내 빛으로 채울 것이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고해소에서 나올 때, 하느님의 현존이 나를 꿰뚫었고, 나는 하느님의 세 위격이 내 안에 머무심을 느꼈다. 아니, 알아차렸다.”(파우스티나 성녀 일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기억들이, 심지어 이미 고해성사를 받았음에도 계속 되돌아와 머릿속을 맴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죄가 정말로 용서받은 것인지 미심쩍어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절대 의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죄는 분명히 용서받았을 뿐만이 아니라 없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가 얼마나 나쁜 죄였든지 상관없습니다. 어떠한 죄도 하느님의 사랑보다 크지 않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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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나는 네가 매우 많은 자손을 낳아 여러 민족이 되게 하겠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아브라함을 모두 얘기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얘기이고, 복음은 그 아브라함이 보리라고 희망하며 즐거워했던 그분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라는 얘기입니다.

독서와 복음에는 ‘보는 것’과 관련된 표현도 나옵니다.

 

“나를 보아라.”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나의 날을 보리라 즐거워하였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창세기의 “나를 보아라.”라는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봤더니

먼 훗날 당신의 오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왜 아브라함을 이렇게 추켜세우시겠습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저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묵상했는데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보면 땅만 보지 않고 하늘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자기만 보지 않고 꽃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우리나라만 보지 않고 다른 나라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그리스도교만 보지 않고 타 종교도 봅니다.

그러니까 여기만 보지 않고 저기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면 지금만 보지 않고 미래도 내다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절망만 보지 않고 희망도 바라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죄만 보지 않고 은총도 봅니다.

하느님을 보면 죽음만 보지 않고 부활도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하느님 말씀대로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고 경계를 넘을 수 있었기에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봤기에 장소적 경계뿐 아니라 시간적인 경계도 넘을 수 있었고 미래 메시아 시대도 내다볼 수 있었던 겁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런 경지를 얘기하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들렸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보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마귀나 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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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야자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니,

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시편92,13-14)

 

 

수십년 전 어느 목사님의 “신부님의 소원이 뭐냐?”는 물음에 대해

   “잘 살다 잘 죽는 것입니다.” 라는 즉각적 대답에 내심 만족했고 지금 또한 그러합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남의 죽음입니다. 잘 떠남의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선물같은 삶에 감사하며 기쁘게 사는 것이 참으로 현명하고 중요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이 청춘이면 몸도 청춘이 된다. 꿈과 열정이 사라지면 죽음이다. 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소극적인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노령에도 뇌세포는 증식한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라. 확실히 늙음은 나이보다도 마음의 문제이다.”

 

사는 동안 하루하루 진실히, 성실히, 절실히 살아야 하겠지만, 늘 떠남을 염두에 두고 늘 준비하며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잘 떠나는 뒷 모습은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추억으로 길이 남습니다. 이런 잘 떠남의 선물보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오래전 “꽃마다 반갑고 아름다운 것”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꽃마다

그리도 반갑고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폈다지기 때문이다.

일년내내

피어있는 꽃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인생이

그리도 반갑고

슬프도록 아름다운 건

잠시동안 살다 떠나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는 인생이라면 누가 반갑다 아름답다 하겠는가?

아,

꽃지므로 꽃 좋은 줄 알겠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인 줄 알겠다.

짧은 인생

날마다 꽃처럼 반갑고 아름답게 살다 떠날 일이다.

내 영원한 고향

주님의 집을 향해”

(2006.4)

 

또 하나 “떠남의 여정”을 노래한 제 좌우명 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중 한대목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폭으로 또 넓은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떠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2012.9

 

오늘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을 지냅니다. 성인의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거룩한 죽음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고 우리들 또한 보고 배웁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평생 삶은 “떠남의 여정”으로 요약할 수 있고, 마지막 죽음의 떠남은 아름다운 떠남의 절정입니다. 언젠가 갑작스런 거룩한 죽음이 아니라, 평소 하느님을 향한 떠남의 여정에 충실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제37장은 전부 성인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죽음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한 단락만 인용합니다.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병세가 날로 심해지자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았기에, 주님의 전사답게 하

늘 향해 기도중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는 성 베네딕도입니다. 어디로 떠날지 모른다면 어찌 이런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이 가능하겠는지요. 어느 분이 아름다운 수의를 입은, 믿지 않았던 죽은 친구를 떠나 보내며 탄식했다는 일화가 문득 생각납니다.

 

“옷은 잘 입었는데 갈데가 없구나. 어디로 가나?”

 

오늘 성인의 별세 축일 미사전례중 말씀 배치도 떠남의 여정에 잘 맞춰져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의 인도하에 하느님의 복이 되어 떠나는 아브람의 모습이 정말 멋집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둔 아브람의 떠남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러면 너는 복이 될 것이다...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주님의 복이 되어 길을 떠나 떠남의 여정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니 제 나이와 같네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떠남의 사람, 아브람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고별기도는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지요! 오늘 요한복음 17장은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세상을 떠나기전 아버지께 바치는 유언과도 같은 느낌의 장엄한 예수님의 고별기도가 소개됩니다. 1.자신을 위한 기도, 2.제자들을 위한 기도에 이어 오늘 복음에 소개되는 3.믿는 이들 모두를 위한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복음의 고별기도를 요약하면 믿는 이들 모두가 당신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떠나 보내시며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인 이 미사를 우리 인류에게 남겨 주심으로 아드님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성체를 영할 때 마다 속으로 불러보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 177장 2절입니다.

 

“참 기쁨이 넘치는 그곳 주님 계신 곳, 내 모든 근심 슬픔을 다 위로하여 주시네.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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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올스만’이라는 사진작가가 있습니다. 플로리다 대학교에서 사진을 강의할 때, 수업 첫날 수강생들을 두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출하는 사진의 질은 전혀 보지 않고, 오로지 촬영한 사진의 양으로만 성적을 매긴다고 말했습니다. 즉, 100장 낸 학생은 A학점, 90장은 B학점, 80점은 C학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한 학기 동안 사진의 ‘질’에 초점을 맞추라고 했습니다. 촬영한 사진의 우수성을 기준으로 성적을 줄 것이기에, 단 한 장의 사진만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A 학점을 받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최고의 작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양에 치중했던 첫 번째 그룹에서 모두 나왔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으면서 실수를 반복했고 이 실수를 통해 기술을 배우고 재능을 익혀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분이 많습니다. 참 신앙인이 되고 싶은데 생각뿐이지 행동이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기도도 제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도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최고의 신앙만을, 그리고 완벽한 신앙생활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특별하고 놀라운 기적 체험을 통해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일상 삶 안에서 하느님과 대화를 많이 하고, 하느님과의 만남 시간을 늘리는 사람만이 참 신앙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완벽한 사랑을 우리는 처음부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랑을 계속 실천하면서 최고의 사랑, 완벽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사고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하나의 작품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생각에 갇혀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힘주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합니다.

우리 역시 자기만의 최고 가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이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지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삶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양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만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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