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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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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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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성 요셉 대축일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성 요셉 대축일 복음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3월 19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3월 19일 매일미사 제2독서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오늘의 묵상] 보러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다윗 가문의 요셉은 갈릴래아의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마리아와 약혼하였다. 그러나 같이 살기도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요셉은 파혼할 마음을 먹었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여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이로써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또한 성인은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기르는 일에 헌신한 요셉 성인을 기리고, 성인의 믿음과 덕을 본받기로 다짐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성 요셉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아트리움의 성 요셉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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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조상 다윗의 왕좌를 주시리라(루카 1,32 참조)

▥ 사무엘기 하권의 말씀입니다.7,4-5ㄴ.12-14ㄱ.16

그 무렵 4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5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12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13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

14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16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제2독서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4,13.16-18.22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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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Joseph Mosaic Originally from St. Peter’s Basilica at the Vatican
St. Joseph Mosaic Originally from St. Peter’s Basilica at the Vatican 확대한 모자이크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복음 말씀 (1)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6.18-21.24ㄱ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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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성 요셉 대축일 복음 말씀 (2)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ㄱ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18년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아트리움에 있는 성요셉 모자이크를 정비하는 모습

 

 

 

2024년 3월 19일 매일미사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묵상

교회의 수호자이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인 요셉 성인은 예기하지 못한 사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를 모범적으로 알려 줍니다. 먼저, 의로움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약혼’은,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이미 부부와 같은 신원을 가진 상태가 됨을 뜻하였습니다. 이 경우 여성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지면 율법에 따라 처벌(투석형)되었습니다(신명 22,21 참조).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해서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피의 복수를 면하게 하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자, 곧바로 자신의 계획을 거두고 하느님의 뜻을 따릅니다. 요셉에게 ‘의로움’(정의)은 법의 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구현되는 덕목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로, 신앙입니다. 이러한 의로움은 언제나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모범을 통하여 요셉과 아브라함의 공통점을 부각시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실천한 이들이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의로움(정의)의 구현은 믿음(신앙)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천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한마디 저항이나 이의 제기 없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묵묵히 실천합니다. 요셉의 생애는 결코 힘없는 공허도 의미 없는 희생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음을 보여 준 진정한 존엄의 삶이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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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성인에 대해서는 오늘 듣는 복음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이 일화 하나로 성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성인은 충실하고 지혜로운 하느님의 종이었다. 약혼자 마리아의 혼외 임신을 하느님이 하신 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성인이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마태 1,19). 그 당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롭다고 했지만, 성인은 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의로움을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한 젊은 여인과 아기를 살리기 위해 남몰래 파혼해서 자신이 부끄럽게 되는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느님의 사랑, 불쌍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연민이 율법의 정신임을 성인은 알았다. 사람들은 율법의 글자만 봤고 성인은 그 정신을 실천했다.

 마리아의 임신 사실은 명백한 부정이고 불의였다. 요셉 성인도 꿈에서 천사의 말을 전해 듣기 전까지는 그것이 하느님이 하신 일이라는 걸 몰랐다. 하지만 남자의 도움 없는 임신은 아니어도 불가능하다고 했던 몇 가지 임신에 대해서는 성경이 이미 전하고 있었다. 아기를 가질 수 없던 한나는 눈물로 기도해서 사무엘을 나았고(1사무 1,1-20), 마노야의 아내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는데 천사를 만나 임신하고 아기를 낳고 그를 삼손이라고 했다(판관 13,1-24). 그리고 장차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가 될 노인 엘리사벳의 임신 소식도 들었을 거다. 그러니 남자의 도움 없는 임신도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가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요셉의 꿈은 실제로는 그의 묵상과 기도였을지 모른다. 성인은 임신한 배우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불가능이 없는 하느님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성경이 직접적으로 전하는 요셉 성인의 이야기는 오늘 복음이 전부지만 아들 예수님을 보면 성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불쌍한 사람들을 대하셨던 그 모습이 바로 성인이 사람들을 대했던 모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성인의 신앙이다. 당신도 성인의 신앙과 연민이 아니었으면 태어날 수 없었다. 성인이 임신한 약혼자,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느님은 인류 구원이라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또 다른 계획을 세우시고 어쩌면 또 천 년을 기다리셔야 했을지 모른다.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 충실했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기억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느님의 일에 협력할 수 있었다.

 

   마리아와 태아를 살리는 현실적인 방법은 남모르게 파혼하는 것이었다. 그게 성인의 최선이고 지혜였다. 그것은 성인의 충실함의 열매였다. 자신은 부끄럽게 되지만 두 생명을 살렸던 아버지의 선택은 아들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놓게 했다. 하느님은 당신의 일을 해나가시는 데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 일에 협력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당신 편에 설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남자의 도움 없는 임신이나 십자가 죽음은 아니겠지만,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시험관 시술을 통해 자신의 아기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그 대신 입양이나 또 다른 형태의 부모 역할을 찾거나, 관습적인 불의한 거래를 고발할 자신이 없다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결정 등이 그런 게 될 거다. 쉬운 결정은 아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행동한다. 하느님께 충실함에서 지혜와 용기가 생긴다.

 

예수님, 신앙은 저를 의롭게 만들고, 그 의로움은 현행법과 제도가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삶과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해줍니다. 주님의 창조적인 자유를 저에게 주십시오. 요셉 성인님, 구세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게 가정을 지켜주셨으니, 제 신앙이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지켜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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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베필 성요셉 대축일입니다.

사순 시기 중에 지내는 유일한 대축일로 사막과 같은 회개와 보속의 시기에

오아시스와 같은 기쁨의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시지만 그 아버지라는 특별한 위치치고는 그렇게 크게 부각되는 분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성모님에 관한 이야기도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요셉 성인에 대한 이야기는 그보다 더 적습니다. 또 성경은 요셉을 예수의 아버지라고 정확하게 말해주지도 않습니다.

   마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의 족보를 보아도 선대의 모든 다른 이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예수님은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라고 전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도 요셉을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여겼다라고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축일의 이름도 예수의 아버지 성 요셉 대축일이 아니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베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의 진짜 면목은

예수의 아버지라는 지위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보여주었던 삶의 모범'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요셉 성인에 대해서 단 한마디로 설명합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비록 간단한 표현이지만 요셉 성인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정확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그려지는 성인의 의로움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성 가정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에서 드러납니다.

요셉 성희는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충실하면서 내 생각이나 내 판단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랐고,

또 그것을 위해 자신의 뜻을 기꺼이 포기하는 순종의 덕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가 잉태한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에 따르면 마리아의 운명은 약혼자인 요셉의 손에 달리게 됩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할 수도 있었고, 그러면 마리아는 재판에 넘겨져서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혼장을 써주면 그 둘은 아무 상관없는 사이가 되고 요셉이 더 이상 짊어질 책임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에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호의인 동시에 가장 간편한 해결책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는 하느님의 명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인간적이고 간편한 길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힘들고 어려운 길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요셉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성모님께서도 그러하셨듯이 요셉 성인도 당신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에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고,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게 됩니다. 요셉의 의로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했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의로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곳은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 같은 의롭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곳임을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산다는 것은 성령에 따라 사는 삶이지만, 성령은 늘 우리가 원하는 길로만 우리를 이끌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싫어하는 길, 바라지 않는 길로 또 우리가 두려워하는 길로 우리를 이끌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그 순간순간 나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셨던 성요셉의 의로움을 우리가 실천할 때 주님께서는 기꺼이 그 의로움과 함께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가장 큰 기쁨이고 대치될 수 없는 삶의 의미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성 요셉 성인의 추기를 지내면서 그분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 사순시기를 의미 있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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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합시다!

사순 특강을 갔다가 정말이지 몇십 년 만에 신학교 동창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특강 시간에는 성당에 안 보이더니, 사제관에서 따로 들었더군요. 저를 보고 하는 말, 어떻게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 변할 수 있냐고.

 

 하루 온 종일 말 한마디 없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말을 붙여도 뒤로 빼면서 실실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어떻게 이렇게 날나리가 되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정말이지 그랬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요셉 성인 못지않게 과묵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듣기만 하고, 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하고, 해야할 일만 딱 하고... 몇십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말을 하며 살았으니, 이제 다시 과묵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진국 같은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말없이 사랑하는 사람.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 조용히 도와주는 사람. 힘들 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사람. 침묵 속에 기도하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든든하고 힘이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요셉 성인이 그런 분이셨습니다. 복음 사가들은 그에 대해 철저하게도 함구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세주의 양부이자,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오랜 세월 구세사의 주역들을 동반하셨던 그의 역할은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의 특별하고 굴곡진 삶을 글로 쓰자면, 아마도 소설 몇 권으로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 침묵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요셉 성인은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 사명은 예수님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마리아의 순결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요셉 성인의 사명이 세례자 요한의 사명이나 베드로 사도의 사명에 버금가는 막중한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성 요셉의 사명은 조용히 생각하는 사명이요, 침묵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구속 사업의 비밀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리 노출되지 않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켰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는 성 요셉의 사명은 곧 오늘날 우리 교회의 사명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성모님과 함께 계실 때의 성 요셉의 사명은 보호와 방위의 사명, 수호와 원조의 사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적으로부터 방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곧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역시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지키고,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위에 성장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이 각별하셨던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성 요셉! 저는 이 성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는 가장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전문가 쇼사르 박사는 요셉 성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 요셉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으며, 결코 지상 낙원의 꿈을 쫓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이를 먹지 않는 영원한 청년입니다. 그는 세상 모든 가장들의 모범입니다. 그는 참으로 여성스런 동정녀 마리아와 떳떳하고 올바르게 교제할 수 있었던, 참으로 이상적이고 멋진 남자였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세상, 성 요셉처럼 침묵의 사명에 충실해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요셉처럼 말없이 행동하고, 말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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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오로 사도께서는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떻게 하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를 묵상하게 됩니다.

돈 많이 벌고, 승진 척척 되고, 아프지 않고, 시험에 늘 좋은 성적을 맞고, 자기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늘 기뻐할 수 있을까요? 어린이가 썼다는 다음과 같은 일기의 내용을 봤습니다.

 

“수건은 집안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하게 만들고 걸레가 된다.

걸레가 더러워진 만큼 우리 집은 깨끗하게 된다.

나는 걸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떠십니까? 걸레 같은 삶도 멋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자기 자녀가 걸레 같은 삶을 살겠다고 하면 아마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것입니다.

 그 삶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삶 안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길을 쫓아갈 때, 예수님과 함께하게 되고 진짜 기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덕분입니다.

 

  요셉 성인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않았습니다.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자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단호하게 마리아를 법정에 세우지도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하여 돌로 치게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꿈에 천사가 나타나 주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말없이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그는 조용하게 주님의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가능한 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반드시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초등학생이 말했던 걸레면 또 어떻습니까? 의미가 충만하다면, 분명히 기쁘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바로 그런 행복을 가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깨끗이 닦여진 귀한 명품만 되려고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명품은 피곤합니다.

어떤 분이 제게 명품 만년필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한 번 쓸 때마다 부담됩니다.

즐겨 쓰는 만년필은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보급형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쓰는 기쁨 역시 명품 만년필이 아닌, 막 쓰는 보급형 만년필에서 생겼습니다. 많이 사용되는 ‘나’, 비록 걸레처럼 지저분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며 기쁘게 사는 ‘나’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범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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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내 입으로 그 진실하심을 대대로 전하리라.”(시편89,2)

사순시기 및 3월 성 요셉 성월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오늘 3월19일은 우리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주보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우리 요셉 수도원이 1987년 3월19일 설립됐으니 설립 37주년이 되는 날이자, 2014년 3월19일 원장좌 자치 수도원으로 승격됐으니 승격 1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 영예스럽고 자랑스런 성 요셉입니다. 저절로 3월 성 요셉 성월에 자주 부르는 “성 요셉 찬양하세” 성가 280장이 생각납니다. 3절까지 가사가 다 좋지만 1절만 인용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을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가톨릭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마다 교회 수호자가 된 요셉 성인을 생각하면 저는 늘 하는 “만세육창”에다 오늘은 “성 요셉 만세!”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교회 위기때 마다 큰 빛을 발한 성 요셉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합니다. 교회가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도움이 됐던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 성 요셉입니다.

1870년 교황 복자 9세는 성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889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보호자이자 가장의 모범으로 공포했고, 1920년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성 요셉을 노동자와 임종자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 요셉을 사회정의의 수호자로 선포했고, 1955년 교황 가경자 비오 12세는 5월1일 노동절을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로 정했고, 1961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성 요셉 축일에 회칙을 발표하고 성인에게 공의회를 보호해 달라고 청했고, 1989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성 요셉이 ‘구세주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고, 2020년 교회가 코로나 19펜데믹으로 혼란을 겪을시, 교황 프란치스코는 ‘보편교회의 수호자 성 요셉 선포 150주년’을 맞이하여 그해 12월8일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를 발표하고 다음해 2021년 12월8일까지 1년을 ‘성 요셉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참으로 교회가 위기를 겪을 때 마다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셨던 성 요셉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 가득 지니게 됩니다. 성가정 공동체하면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이 생각나듯,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하면 참 좋은 배경의 불암산이 생각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자작 애송시 두편의 불암산이 상징하는바 성가정 공동체의 배경인 성 요셉입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큰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하나 침묵에 잠긴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짧은 자작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같은 성 요셉입니다. 세 측면에 걸쳐 성인의 위대한 덕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요셉 성인은 참 큰 분이십니다.

참으로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신 분, 한마디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성인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신속한 처신이 참으로 놀랍고 고맙고 감동스럽습니다. 자비와 분별의 지혜는 함께 갑니다. 다음 구절에서 성인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럽납니다.

 

‘마리아의 남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성 요셉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기가 아니라 마리아의 안위요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자비하고 지혜로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둘째, 요셉 성인은 참 깊은 분이십니다.

참으로 잘 들으시는 경청의 겸손한 성인이십니다. 귀기울여 주님 천사의 말을 겸손히 경청하는 성 요셉입니다. 깊은 산이 좋은 산이듯, 겸손의 깊은 사람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를 받고 있는 경청과 겸손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속내를 당신 천사를 통해 소상히 성 요셉에게 드러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성 요셉의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를 뜻하는 예수란 이름은 얼마나 은혜로운지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제2독서 사무엘 하권의 예언자 나탄의 다윗을 향한 예언이 흡사 요셉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다윗에 버금가는 존재가 오늘 복음의 다윗입니다. 그대로 우리 구원자 예수님의 출현에 대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튼튼하게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사실 나탄의 이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20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가톨릭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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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요셉 성인은 참 고요한 분이십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바로 요셉의 고요한 믿음이 그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브라함에 대한 고백은 요셉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의로움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는 요셉의 믿음,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한 아브라함의 믿음, 요셉의 믿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에서 요셉의 순종과 믿음이 통쾌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일하시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믿음의 순종의 협조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이요 요셉의 믿음의 순종이 너무나 기쁘고 고마웠을 것입니다. 성가정 교회 공동체의 영원한 배경이신 성 요셉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참 사람의 모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성 요셉이요, 자비와 지혜, 경청과 겸손, 순종과 믿음의 성 요셉입니다. 그대로 이런 양부 성 요셉을 보고 배웠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날로 주님을 닮은, “크고 깊고 고요한 삶을,

1.자비와 지혜의 삶,

2.경청과 겸손의 삶,

3.순종과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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