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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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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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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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십니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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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3월 22일 매일미사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성주간을 앞두고 오늘 독서와 복음은 ‘폭력’에 대한 내용들을 전합니다. 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향하여 주변의 모든 이가 적대감을 드러내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군중(직역하면 ‘많은 사람’)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도 팽팽한 긴장과 불안으로 시작됩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이유는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발과 위협의 긴장감 속에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라고 하면서 그 ‘모독’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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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모독이라는 낱말은 그리스 말로 ‘블라스페미아’로, 상대의 명예를 훼손하고 치욕스럽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명예를 훼손하시거나 치욕스럽게 하신 일이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될 터인데, 그분께서는 오히려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과 가르침이 아버지를 증언하고 드러낸 일이었음을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자들을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한 사건들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역으로 환기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은 언제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여 살기를 내뿜습니다. 논리가 통하지 않으니 물리적 학대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던지려 아무도 모르게 손을 움켜쥔 채 살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손에 움켜쥐고 있던 돌을 조용히 내려놓을 시간입니다. 성주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사람이니까 그렇지.’

실수나 잘못을 이해하고 위로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완전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하지만 하느님이 바로 이 실수하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셨음을 잊지 않는다.

예수님은 지금의 이 육체와 정신 그리고 마음으로 사셨다.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신학교 다닐 때 신학생들 사이에서

열심히 사는 이를 가리켜 ‘상투스하다(Sanctus).’라고 했다.

이는 라틴어로 거룩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칭송이 아니라 비아냥이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에 나오는 말을 하지만, 현실감각이 떨어지고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의 겉모습은 위선이고, 그런 비아냥은 옳다. 하지만 그런 비아냥이 자신의 거룩하지 못함이나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비아냥거림 안에는 교만이 독사처럼 웅크리고 있다.

 

예수님은 때가 차자 당신의 신원을 숨기지 않으셨다.

착한 목자 이야기를 하시며 결정적으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선언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한낱 사람인 주제에 자신이 위대한 하느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신성모독 죄다. 예수님은 그런 고발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라는 시편 말씀을 대시며 당신을 변호하셨다. 말하자면 하느님 말씀을 받은 이는 하느님 자녀라는 뜻이다.

 

자식은 부모의 품성을 물려받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신성(神性)을 내려받아 신성(神聖)한 존재,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

신학생들의 정당한 비아냥처럼 우리에게 문제는 늘 실천하지 않음이거나 부족함이다.

자신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진짜 신성모독이다.

맞다, 사람이라서 그렇다. 예수님도 유혹받으셨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어서 유혹의 대상이 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는 내 안에 있는 신성한 불꽃을 기억하고 그 불이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 불이 온 마음과 몸을 불태우게 한다. 예수님이 그 불을 지르러 오셨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사람은 못 하지만 하느님은 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라고 하신 후 조용히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을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다. 부당하고 불의하게 당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에게 맞설 수 있으셨지만, 당신의 정당함을 변호하고 거룩함을 밝히는 것까지 다 아버지 손에 맡기셨다.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비난하거나 맞서 싸우지 않는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기도처럼 싸움과 복수는 하느님께 맡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예레 20,12).” 내 몫은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외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하신다.

예수님,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그를 사랑하지 않은 건 저의 죄입니다. 세상은 그건 죄가 아니라고 원수는 당연히 미워하는 거라고 하지만 저는 주님의 친구고 하느님의 아들이라서 그러면 안 되는 줄 압니다. 저는 못 하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계명을 더 잘 지키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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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요즘 계속 봉독되는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입니다.

이제 지상에 머무실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는데, 끝까지 당신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죽이려고 돌까지 손에 드는 동족을 향한 예수님의 비애감은 혹독했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9월 중순에서 10월 중순 사이에 초막절 축제를 성대하게 벌이는데...이 축제 후에 또 하나의 축제가 남아있습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봉헌 축제입니다. 점령군들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을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 항쟁을 벌여 탈환한 뒤 실시된 성전 정화작업의 결실로 새롭게 건립한 제단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존경하는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님 표현에 따르면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던 때는 겨울이었는데, 예수님의 생애에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불신과 거부의 찬바람이 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아 내년 봄 파스카에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아레오파고스, 즉 토론의 장소라고 할수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자 유다인들은 즉시 예수님을 둘러쌌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끌어내어 로마에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적 정체를 말씀하실 때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적 정체에 대해 처음부터 무시하고 불신한 것입니다. (송봉모, 요한복음 산책. 제3권, 바오로딸 참조)

유다인들과의 논쟁 중에 예수님께서는 거듭거듭 밝히셨습니다.

당신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다. 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인들은 끝끝내 예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고 손에 돌까지 들었습니다. 눈앞에까지 다가온 구원과 영생을 발로 차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저 그런 예언자 중에 한 사람입니까?

나와는 전혀 무관한 역사 속의 한 인물입니까? 나의 창조주요 구원자,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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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마고르 미싸빕’은 사면초가 상태인 사람, 외톨이, 요즘 말로 왕따란 뜻입니다.

전에도 이에 대해 묵상하면서 저의 비겁함을 고백한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저의 비겁함의 고백보다는 ‘마고르 미싸빕’의 대단함을, 그래서 우리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야 함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원하지도 않는 외톨이, 왕따가 있고, 우리가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상징하는 ‘마고르 미싸빕’은 의로운 외톨이요 더 나아가 거룩한 왕따이기에 본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혼자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일 수도 있지만 너무 큰 고통 앞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고통 그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과 불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죽고 나면 모두와 헤어지고 자기만 영원히 혼자 되는 걸까 봐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것도 버림받아 혼자 될 때 더 두렵고 불안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나 사고로 죽어 혼자 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이가 나를 버려버려서 혼자 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운 법이지요.

그러니 이 두려움보다 더 큰 이유가 없으면 혼자 되려는 사람이 없고,

또 혼자 되는 것을 자초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두려운 외톨이를 왜 되려 할까요?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무엇 있겠습니까?

옳은 소리를 하면 외톨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무릅쓰고 얘기하는 것인데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자기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이런 소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경우 하느님 사랑 때문이 아니라면 왜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사랑하시고 공동체에 당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기에 싫고 두렵지만

그 말씀 전하는 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런데 사랑이 목적이라면 믿음은 바탕입니다.

 

하느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까닭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바탕에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옆에 계실 거라는 믿음,

복수가 필요하다면 그 복수를 하느님 친히 해주실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이 중심추처럼 밑에 묵직이 있기에 옳은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사랑이 있는지, 나에게 이런 믿음이 있는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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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자매님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신부님, 저는 사는 게 재미없어요.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에요. 지루하고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중년의 나이를 넘기면서 이런 말씀 하시는 분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지루함과 무기력함이 과연 나이 탓일까요? 오히려 삶의 태도에서 올 때가 많습니다.

어떤 회합에서 “그거 내가 다 해봤는데 소용없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소용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 어떤 것도 새롭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삶을 과거의 방식대로만 살려고 하기에 지루할 뿐입니다.

 

어떻게 삶을 대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그렇게 책 많이 읽으면 지루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으십니다.

저 역시 학창 시절에는 책 읽는 것을 지루하게 여겼고 또 재미없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재미있습니다.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지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요? 신앙 생활하는 것이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과거의 한 체험을 계속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닌, 너무 재미있고 신날 것이라며 미래를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이 먹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이지만, 삶의 태도를 바꿔서 멋지게 사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엄하게도 주님께 돌을 던지려는 유다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분명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들은 그 일들은 보려고 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을 죄인으로만 만들고 있고,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어리석음 안에 머뭅니다.

크고 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작고 부족한 나의 머릿속에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 때, 일상 안에서 멋지고 신나는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거부하는 몸짓이었고, 죽이려는 적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으로 주님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재미없는 삶이 아닌 너무나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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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시편18,2-3ㄱ)

 

브라질 교회의 6차 사회주간(3,20-22)에 교황님 보내 메시지

“가난한 이들 안에서 예수님 얼굴을 보도록 하자”

라는 말씀과 한 이민자를 품에 안으며 하신 솔직한 위로의 말씀이 감동이었습니다.

 

“나 역시 더 좋은 미래를 찾아 떠난 이민자들의 아이였다."

(I too am a child of migrants who set out in search of a better future.)

 

바로 이런 솔직함이 교황님의 위대한 점입니다. 하느님 떠난 인간 영혼은, 정신은, 마음은 얼마나 허약한지요. 생명이자 빛이신, 꿈이자 희망이신 주님을 잊을 때, 잃을 때 급속히 어둠 속에 무너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제 방문했던 분과의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리대로 산다는 것이 참 힘듭니다.”

“힘들 것 없습니다.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사랑할 때 날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 진리가 되어가고 자유로워집니다. 더불어 튼튼해지는 영혼이요 정신이요 마음입니다. 참으로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할 때 희망과 기쁨, 감사가 뒤따를 것입니다.”

 

진리의 사람, 말씀의 사람, 하느님의 사람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와 요한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두분 다 무지의 악한 세력에 포위되어 악전고투의 절망적 상황입니다만,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은 참으로 견고합니다. 내적 힘의 원천은 바로 말씀과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에 속합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독서 앞부분은 생략됩니다만 아까워 인용합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예레미야의 내적 힘의 원천임을 봅니다. 말씀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마고로 비싸빕”은 예레미야의 별명입니다. “사방에서 공포가!”라는 뜻인데 이 말을 외쳤기에 이런 별명이 붙은 듯 합니다. 참으로 가까운 친구들 마져 예레미야가 쓰러지기만 바라는 악전고투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을 돌파해 나갈 수 있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의 주님 고백과 하느님 찬양이 우리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저와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립니다.”

하느님 고백에 곧장 이어지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주님께 노래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가난한 영혼들을 참으로 강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 찬양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찬양과 더불어 날로 견고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시편성무일도를 통해 주님 향한 믿음과 희망을, 사랑을 고백합니다. 고백과 함께 가는 믿음이요 내적 힘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사면초가의 상황은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재현됩니다. 흡사 무지의 악과 싸우는 모습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며 예수님에게 돌을 던지려 합니다. 무지에 닫힌 마음의 눈은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무지의 편견에 눈먼 유다인들을 다시 일깨우십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새삼 강조되는 믿음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믿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업적을 통해 주님을 깨달아 알 수 있기에 믿음이 우선입니다. 믿으면 압니다. 믿으면 보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모든 날이 다 좋다”라는 자작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주님 늘 힘께 계시기에!”-2023.1.21.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매일매일이 좋은날이라는 고백 역시 낙관적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런 믿음 또한 은총이요 믿음과 더불어 주님을 깨달아 알아 가면서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날로 자유로워지는 영혼입니다. 예수님은 이들 적대자들을 피신하지만 눈밝은 이들은 곳곳에서 주님을 찾아와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시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고백하며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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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도 한번 힘차게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이 우리를 살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을 실천할 때 더불어 굳건해지는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은총입니다.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모범입니다.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용에 나오는 맹자의 말씀 중 덕은 믿음으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얻는다.”(중용)

 

믿음의 큰 덕을 쌓아가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은총과 함께 가는 노력입니다. 믿음의 은총과 더불어 평소 믿음의 훈련이, 노력이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온맘을 다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의 선택과 훈련의 습관화와 더불어 날로 성장, 성숙해가는 은총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생활에서 은총은 전제로하고 한결같은, 끊임없는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좋은 덕목의 자발적 선택과 더불어 훈련과 습관이 영성생활에 참으로 긴요합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곤경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시편18,7).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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