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묵상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3. 3.
반응형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반응형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복음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그리스도의 일생 중 '유다의 입맞춤(The Kiss of Judas)',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반응형

 

 

 

 

2024년 3월 27일 매일미사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누군가는 자신의 사랑을 상대에게 고스란히 건네줄 결심을 하고, 누군가는 상대를 팔아넘길 결심을 합니다.

이 불공평한 관계는 비단 예수님과 유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은 우리 주변에도 때로 발생하니까요. 뉴스는 거의 날마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과 편리를 위하여 아기를 팔고, 딸을 팔며, 약자를 파는 사건을 보도합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의 사랑을 팔아 버린 유다가 받은 돈은 겨우

“은돈 서른 닢”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는 문장을 그리스 말 성경에서 그대로 옮기면 “무엇을 나에게 줄 거요? 내가 당신들에게 그를 넘기겠소.”입니다.

‘무엇을’이라는 그리스 말 의문사를 문장의 첫머리에 배치하여 ‘거래’라는 인상을 먼저 부각시킵니다.

 

사실 성주간 월요일부터 계속 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유다는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냄비나 접시에 담긴 음식을 서로의 숟가락이나 젓가락에 신경 쓰지 않고 함께 먹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친한 관계에서는 비슷한 식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친밀함’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으로 이용하고 배신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아무개”(그리스 말 ‘데이나’)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병행 구절(마르 14,13; 루카 22,10)이 그를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로 명시한 것과 달리 마태오 복음서는 특정 인물을 지칭하지 않아 그 “아무개”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습니다.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파스카 식사를 하실 자리를 ‘아무개’에게 부탁하셨듯이, 우리 안에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드실 만찬을 마련하여 드리는 오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반응형

 

 

 

 

 

어제 그제에 이어 오늘 복음도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에 관한 이야기다.

반면에 첫째 독서를 통해서 이사야 예언서의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관한 노래 세 개를 연달아 듣는다.

 구세주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람과 구세주 메시아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고난을 받게 될 거라는 예언이 대조를 이룬다. 그가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어도 그분은 그렇게 될 운명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돼버렸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 26,24).”

 

그런데 유다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첩보영화에 나오는 스파이처럼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제자공동체로 들어간 것도, 예수님이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를 뽑은 것도 아니다. 당신을 팔아넘기는 자는 불행하다는 예수님 말씀에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그는 예수님을 넘기기는 하지만 그로써 자신이 불행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유다는 악당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이 뽑아 세운 열두 사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5). 요즘 말로 ‘그건 네 생각이고’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유다는 너무 머리가 좋고 너무 현실적이었던 거 같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그 신적인 능력을 지도자들 앞에서 발휘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지도자들과 만나게 해서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나라를 구하시게 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그들 말이고, 왜 그랬는지는 유다만 안다.

창세기 저자가 뱀이 왜 여자를 유혹했는지 묻지 않는 것처럼 악의 근원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이 복음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콕 박히는 말이다. 예수님을 대놓고 저주하고 욕하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길 제자가 어디 있겠나? 유다도 스승을 배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스승에게 그리고 나라에도 좋은 일이라고 여겼을 거다.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럴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적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현실적인 성공을 추구하게 된다. 종교적으로 남을 이기거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일이 어디 있겠나? 오늘 ‘매일미사 복음 묵상’에서 수녀님은 복음에 나오는 “도성 안에 있는 아무개(마태 26,18)”에 집중한다. 예수님의 파스카 만찬을 위한 방을 내준 사람이다. 그 사람 덕에 우리는 매일 예수님을 만나게 됐다.

수녀님은 그 아무개가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고 소망한다. 예수님께 잘해드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 굽은 자로 직선을 그으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죄마저도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피해 도망갈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의 계명을 더 사랑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반응형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인류 구원 사업이 한 인간의 배신, 특히 당신이 사랑하셨던 제자의 배신으로부터 본격화된다는 것이 참으로 특별하고 아이러니합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신을 잘 알고 계셨기에,

마음이 무척이나 산란하셨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직접 지목하지는 않으셨지만, 넌지시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몹시 근심하며 다들 스승님께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참으로 놀라운 일이 또 벌어집니다.

이미 스승님을 배신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은 유다 역시 똑같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배신자 유다의 그 속 보이는 질문에 예수님의 마음은 더욱 참담해지고 암울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공개석상에서 결정적 배신자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존중해 주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그런 태도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가 돌아올 것을 기다리신다는 표현이 아니었을지...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때로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을 위한 축제의 무대는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배신과 타락, 죄와 이기심이 난무하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한복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의 거듭되는 배신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우리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흔들림 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장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등에 비수를 꽂힌 적이 있습니까?

가장 절친했던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으로부터

치떨리는 배신을 당한 적은 없습니까?

어찌 보면 유다의 배신, 베드로 사도의 배신, 요한 사도를 제외한 나머지 사도들의 배신은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했던 제자로부터 배신당했지만, 그래도 그를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의 시선을 보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유다의 결정적 배신으로 인한 수난과 죽음의 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것이었지만,

그것마저 아버지의 뜻임을 알아차렸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반응형

 

 

 

 

 

 

 

오늘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세 번째 노래인데 참 제자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얘기합니다.

우선 제자의 혀를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의 혀는 어떤 혀입니까?

우리는 혀를 흔히 세 치 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세 치 혀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고도 하고, 그러므로 혀를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된다고도 합니다. 사실 혀는 세 치밖에 안 되지만,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뱀의 혀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의 기를 살리는 제자의 혀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제자의 혀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제자의 혀는 스승이신 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제자의 귀로부터 혀도 있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시고,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매일 귀로 주 하느님의 말씀을 제자들처럼 들어서 마음을 채울 때 그때 제자의 혀가 되고 그 혀에서 지친 이를 격려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제자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 제자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근본적으로 안 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스님의 말이 있지요.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라는 말 말입니다.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들고 뱀은 그 물을 먹어 독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같은 물을 먹는데 그 물이 소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젖이 되고, 뱀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고,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기에 우리는 우선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종 노래는 제자의 입과 귀에 이어 얼굴을 얘기합니다.

“나는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제자의 얼굴은 모욕과 수모와 관련해서는 차돌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욕과 수모를 아무리 받아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누가 아무리 상처를 줘도 내가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준다고 다 받지 않습니다.

받고 안 받고는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아놓고는 줘서 받았다고 남 탓을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받기 싫은 상처나 모욕을 내가 받는 것은 그것을 거절할 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일 겁니다.

 

내면의 힘,

그것이 왜 없습니까?

참사랑이 없기 때문이고,

참 자기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하느님으로부터 그 사랑을 받지도 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매일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제자의 귀를 가지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자의 혀와 귀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반응형

 

 

 

 

 

 

"나는 주님의 집에서 푸르른 올리브같이 언제까지나 주님의 자비에 의탁하리라."(시편 52,10)

 

성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입니다.

앞서 주님의 첫째, 둘째 노래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과 더불어 우리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를 통해 하느님의 제자로서 자신의 신원을 다시 확인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통해 우리 또한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거듭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주님의 종의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의 고백이요 교회 전통은 처음부터 그렇게 인정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

나를 의롭다 하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그대로 하느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육성을 듣는 듯합니다. 바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이렇게 예수님처럼, 예수님따라 살면 되겠습니다. 성주간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깊이 고뇌하셨을 것이며 이런 예수님 덕분에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음 옛 어른의 말씀도 주님의 제자로서 사는 데 유익한 조언이 됩니다.

 

“내가 초대받기 위해서는 먼저 남을 초대해야 한다. 마음을 얻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꺼내라.”(다산)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논어)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제 자작 애송시 “하늘과 산”은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스승과 제자간의 깊은 상호보완의 사랑과 신뢰관계를 보여줍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저에게 한결같은 불암산은 참된 제자의 모범도 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수없이 다짐하며 주님의 제자답게 살려고 노력한 정주의 삶이요 더불어 떠오르는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역시 여전히 새롭게 공감하는 자작 애송시입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불암산이다.”-2006.4

 

말 한마디 천냥빚을 갚는다 했습니다.

정작 마음이 지치고 다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가 아닌 위로와 격려의 말이며, 예수님처럼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아는 제자의 혀를 지니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날마다, 아침마다 겸손히 귀를 열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배우고 실천할 때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관계와 더불어 비로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겠습니다. 복음과 신약 서간에서도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말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삶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순종의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5,8-9)

 

새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인생은 고난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워가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생의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필립비 서간 역시 비움과 순종, 겸손으로 요약되는 제자의 모범,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스럽게 묘사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예수님보다 아름답고 거룩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은 제자가 참제자이자 참사람이요,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추구해야 할 영원한 과제입니다. 이런 제자상과 비교하면 오늘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모습은 얼마나 실망스러운지요!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의 경각심을 촉구하며 반면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배신자 유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는 우리 제자들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인 유다가 배신할 것을 예고했을 때

전전긍긍 반응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위기 중에 있을 때, 제자들은 모두 그분을 혼자 남겨두고 살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의 유다에 대한 탄식이 우리에게는 깊은 충격과 더불어 크나큰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비록 예수님의 죽음이 성서에 따른 것일지라도, 유다는 결코 그의 배신의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유다의 비교가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둘의 차이는 단 하나,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믿었고, 유다는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일화가 재미있어 인용합니다.

어느 총명한 어린이가 유다의 배반 이야기를 듣고 말합니다.

 

“유다는 목을 매단 나무를 잘못 골랐어요. 무화과나무를 골랐거든요.”

놀란 교리교사가 “그럼 뭘 골랐어야 했을까?” 물었을 때 어린이의 대답이 정말 기막힌 명답입니다.

“예수님 목에 매달렸어야죠!”

무화과나무에 매달려 자살할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예수님의 목에 매달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송과 더불어 주님께 용서를 빌었더라면, 그는 정말 베드로처럼 용서받았을 것이라는 일화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를 믿지 않았음이 유다의 결정적 패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 따라 주님의 종이자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결같이 경청과 순종, 비움과 겸손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 97,11).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반응형

 

 

 

 

 

우리는 나이 들면서 늙을 운명이고, 병들 운명이며, 죽을 운명입니다.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만약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삶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으로부터 피하길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론적으로 절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인생 자체가 고통이고,

존재 자체가 고통이기에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고통을 그대로 적시하고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고통은 이 세상 창조 때부터 이렇게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창세 3,17)

따라서 고통은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면서 그 안의 하느님을 발견하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모든 고통 속에서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도 고통을 피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화려한 장신구가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 고통을 안고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가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 누구도 자기 고통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안고 지나가야 하는 고통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힘들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안락한 삶이라는 보증수표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에서 어떤 끔찍한 일도, 나쁜 일도 경험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증수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구원받는 존재이지, 환난과 고통에서 구원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스승을 팔아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스러워합니다.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솔직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의아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팔아넘길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특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들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로 팔아넘길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유다도 예수님께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안락과 풍요로움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님 묵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