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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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묵상

by 필로테아 202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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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묵상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제1독서

독서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1-6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2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화살 통 속에 감추셨다.

3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4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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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복음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1ㄴ-33.36-38

그때에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께서는

21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제자들은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23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다.

24 그래서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쭈어 보게 하였다.

25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

27 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28 식탁에 함께 앉은 이들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축제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셨거나, 또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신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30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너희는 나를 찾을 터인데, 내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처럼 이제 너희에게도 말한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6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7 베드로가 다시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3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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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6일 매일미사 성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의묵상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견고한 신념으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이토록 ‘산란하게’ 한 것은 “너희 가운데”에서 일어난 ‘배신’이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함께 대의를 이룩하여 온 밀접한 관계가 그저 허술한 기만에 지나지 않았음을 들키는 자리, 그들이 지켜 온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외면되는 자리가 배신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와 베드로를 대조시킴으로써 배신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고위층의 계략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하려는 일”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을 “어서 하여라.”라는 준엄한 말씀에 유다는 밖으로 나가 자신의 계획을 구체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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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신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라고 선언한 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사도는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9,26)뿐이었습니다. 그 말고는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던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유다와 달랐던 점은 배신의 현장에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점입니다(루카 22,61 참조). 배신의 순간을 지켜보고 계시는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치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친 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은, 다시 진실을 깨달은 구원의 눈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신 그 자체보다, 배신하는 순간조차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둠이고 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유다는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남아 있기

 

함께 밥 먹는 자리는 친교의 시간이다. 그가 손을 뻗는 반찬을 그 앞으로 옮겨주고, 맛있는 부분을 골라 그의 밥 위에 얹어준다. 참으로 따뜻한 자리다. 예수님은 그런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그 안에는 유다도 있었다. 퍽퍽한 빵을 적셔서 먹기 쉽게 만들어 그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날 그런 자리가 예수님에게는 친구들의 배신이 드러나고 지난 수년간 만들어진 우정이 깨지는 시간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러 밖으로 나갔고, 베드로는 당신을 모른다고 할 거라고 예언하셨다.

유다는 악마가 아니라 그 꼬임에 넘어갔고, 베드로는 자신을 몰랐다. 예수님을 배반하기는 서로 마찬가지다. 오십보백보고 도토리 키재기다. 예수님은 유다가 그럴 줄 오래전부터 아셨다. 그러니 베드로에 관해서도 그러셨을 거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요한 6,64).”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나는 나를 잘 모르지만 하느님은 다 아신다. 유다는 자신의 행동이 스승을 그렇게 만들 줄 몰랐을 거고, 베드로는 스승을 모른다고 할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거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둘은 자신을 보았고 둘 다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유다는 슬퍼하고 괴로워했지만 돌아오지 않았고, 베드로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면서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알고 있지만 그때 그들은 몰랐다. 모든 게 그렇게 끝나는 걸로 알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지만 베드로는 남아 있었다. 그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 품에 기대어 앉아 있었던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한 13,23), 요한 사도라고 알고 있는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남아 있었다.

지난날 나의 말과 행동이 문득 떠올라 부끄럽고, 후회와 그것을 되돌릴 수 없음에 괴로울 때가 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그러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괴롭다. 이웃을 아프게 하려는 마음이 아니었고, 하느님 뜻을 거스를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돼버렸다. 나는 몰랐고 주님은 아셨다. 부끄럽지만 인정하고 괴롭지만 끝까지 남는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한다. 이게 내 믿음이다. 외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대한 신뢰다.

예수님, 바빌론 유배 중에도 주님께 대한 신앙 안에 남아 있던 그들처럼 주님을 믿는다고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게 아닙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영웅심 같은 오기가 발동해서 주님을 더 열렬히 믿는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겸손하게 이런 저를 인정하고 불쌍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저를 위해 주님이 목숨을 내놓으셨음을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보다 소중한 이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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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당신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며 배신할 것인지? 누가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할 것인지? 누가 당신 홀로 체포 당하실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놓을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제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었다면, 즉시 노발대발했을 것입니다. 급한 성격에 제자들을 총집합시켰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며 제자들을 일렬로 쭉 세워놓고 일장 훈시를 했을 것입니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불러대며 인간이 어떻게 그러냐?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혹독한 배신감과 고독함, 그로 인한 극도의 산란함 속에서도 철저하게도 제자들의 배신을 함구하십니다. 결정적인 배신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제자들이 계속 캐물었지만, 끝끝내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런 태도를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 보지 않은 이상, 쉽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각 개인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존중해주신다고.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당신을 철저하게도 배신하고 죽음의 길을 가는 것조차 본인의 선택에 맡긴다고?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면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존재가 인간이니, 스스로 잘못을 인식할 때 까지 기다려주시는 예수님이시니, 그런 배신의 기회조차도 제자들에게도 체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영원하신 하느님, 절대 진리이신 하느님에 비해 우리 인간은 너무나 가변적이고, 지극히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기세였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의 잇속과 안위만을 궁리합니다. 어제 금강석보다 더 굳은 신념으로 결심하였지만, 오늘 속절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나약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너무나도 나약한 우리 인간 존재 곁으로 사탄의 강력하고도 집요한 유혹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우리의 취약함 부분을 거듭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어제의 대단한 결심을 오늘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제 당당한 주님의 제자였지만, 오늘은 배신의 참담함에 눈물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어떻게서든 주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입니다. 비록 오늘 죄와 배신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다 할지라도, 다시 한번 고개를 주님께로 돌리며 그분의 크신 자비를 구하는 노력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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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는 앞의 얘기와는 반전을 예고하는 표현이지요.

앞에서는 헛수고, 헛고생을 얘기하다가 그건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만 하느님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노력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헛수고가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영광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헛수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의 실패와 관계의 실패입니다.

보통은 공들인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을 때 헛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이 헛수고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헛수고인 것으로 바꿔야.

그러니 우리 신앙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그렇게 애쓴 것이 헛수고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하느님 뜻과 달라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 곧 주님의 헛수고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패, 그러니까 제자 교육의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식 농사의 실패입니다.

3년 동안 당신의 제자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그렇게 애써 키웠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당신을 팔아넘기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배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아주 심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토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서 터뜨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심란하심이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심란하심일까요?

물론 좌절감 곧 제자 교육이 내 뜻대로 안 된 것의 심란하심이 아니라 사랑의 심란하심 곧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우리만 해도 자식 농사가 잘되지 않았을 때 내 뜻대로 안 된 것 때문에 심란하지 않고, 자식이 불행할까 봐 심란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갈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아무도 당신 곁에 없을 겁니다.

그럴지라도 당신 곁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며, 당신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그리고 제자들도 지금은 배반하지만 나중에는 참 제자로 바뀔 것이라며 심란하심을 추스르십니다.

‘그러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됩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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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너는 나의 종,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37,5) 오늘 강론 제목은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신원이자 존재이유입니다. 요즘 참 절실히 깨닫는 것은 리더인 지도자의 중요성입니다. 세계든 나라든 사회든 가정이든 언제 어디서든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리더의 중요함은 더욱 커집니다. 지도자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 민생입니다. 정말 정치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 할 4월10일 총선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중 국가와 권력에 대한 내용을 일부 나눕니다.

 

1.국가권력은 호의와 온유함으로 지배해야 한다.

2.공평과 인내, 친절은 윗사람이 지녀야 할 아주 좋은 자질이다.

3.황제는 교회 위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

4.통치자는 많은 권력으로 구원받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5.세상의 모든 권력은 실재가 아니라 꿈이다.

6.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7.재물은 탐욕으로 이끌고, 권력은 교만으로 이끈다.

 

신자이자 국민인 우리가 알아야할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신자들입니다. 지도자의 영원한 모델 예수님을 참 지도자로 모신 우리임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우리 역시 오늘의 다산 어른과 공자의 말씀도 유익합니다.

“인간을 수단으로 삼아 저울질한다면, 나 또한 인간의 마음을 잃은 도구로 변할 것이다.”-다산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함에도 염구는 많은 세금을 거둬 재산을 더 늘려줬다. 이에 공자가 말했다.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의 죄를 다스려라.”’-논어 성지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시 군중들의 환호, “호산나!”는 우리 식으로 하면 “하느님 만세! 하느님 찬미!”와 같습니다. 새삼 하루를 시작하면서 제가 작년 8월15일 광복절이후 바치는 만세육창이 옳았음을 확인합니다.

 

1.하느님 만세!

2.예수님 만세!

3.대한민국-한반도 만세!

4.가톨릭교회 만세!

5.성모님 만세!

6.성 요셉 수도원 만세!(우리가정 만세!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만세육창입니다. 지금은 성주간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고 답을 찾는 시기입니다. 성주간, 죽음을 예감한 예수님 역시 자신이 누구인지? 처절히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참 지도자인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성주가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였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확인하신 예수님이셨고 우리 역시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향유를 부어 주었던 여인도 예수님께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겠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님의 종을 통한 자신의 신원확인이었습니다. 이런면에서 어제 강론 제목은 참 적절했습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 사랑하기, 예수님 알기, 예수님 살기, 예수님 닮기”

 

주님의 종인 예수님은 우리 삶의 영원한 지도자이자 중심이기에 우리의 신원확립에도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성주간 화요일 예수님 역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

예수님은 배반자의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12제자들중 하나,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임을 지목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애제자에게 슬며시 물어봐달라 했을 때 예수님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자임을 알려주었고, 유다가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고 때는 밤이었습니다.

주님의 빛나는 제자공동체에서 어둠의 멸망을 택한 유다였습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한결같을 수 있었음은 제1독서 주님의 종의 두 번째 노래 덕분이였음을 봅니다. 주님의 종에서 자신의 신원을 발견하고 확인한 예수님이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어찌 주님의 종, 예수님께만 해당되겠습니까?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우리 또한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불림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중교육 역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이런 진리를 깨달아 안다면 낙태는 꿈에도 생각 못할 것이고 자녀들을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임은 물론 부르심에 적절한 인물로 성장하도록 자녀교육에 기도와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를 다시 확인합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시편71,5-6ㄱㄴ)

  오늘 복음에서 유다의 배반에 이어 베드로의 배반도 예고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베드로의 자만을 여지 없이 꺾어버림으로 장차 회개에로 이끄는 주님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참 놀랍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자 몇이나 될런지요? 베드로는 물론 모든 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고 복잡했을런지요! 예수님은 다음 이사야서의 주님의 말씀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위로와 힘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예수님뿐 아니라 또 하나의 주님의 종인 우리가 신원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상기하여 제자리를 찾게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섭리 안에 비로소 구원의 출구를 찾은 예수님의 영적승리의 고백이 감동적이요 이 또한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The glory of God is the living person)’, 바로 이레네오 성인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예수님을 닮아 베네딕도회의 모토대로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 “모든 일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하라. 영원히 남으리라,"(시편37,27).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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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 신학교 추천서를 써 주셨던 이학노 요셉 몬시뇰님의 사제 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금경축이 있었습니다. 미사와 모든 행사를 마치고 몬시뇰님께서는 당신이 추천해 줬던 신부, 수녀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간 정말 빠르다. 나도 금경축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벌써 금경축이다.” 50년이라는 시간, 정말로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닐 수 있었습니다. 하긴 저 역시 엊그제 신학교 들어가겠다고 몬시뇰님께 추천받았는데, 벌써 사제 생활을 한 지도 25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너무 빠른 시간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너무나 천천히 지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 날짜를 기다릴 때, 사제 서품 날짜를 기다릴 때, 힘든 사목에서도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느렸습니다.

물리적 시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느리게도 또 빠르게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나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중요합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시간이 잠깐 멈춰서서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진행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세상 안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에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원함을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하고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함께했던 그 모든 시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느님의 관점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그 모든 마음이 예수님을 결국 배반하게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뜨끔해서 다시 마음을 되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그의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 아닌 인간의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기 이득을 취합니다.

잠시만의 만족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시간은 잠시만의 만족을 가져다주는 유한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영원의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특히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 살 것을 떠올린다면, 이 세상 안에서도 당연히 하느님의 시간을 쫓아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 어떤 시간을 살고 계십니까?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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