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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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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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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성주간 월요일

 

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성주간 월요일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 ]

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제1독서

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복음

매일미사책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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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주간 월요일 제1독서

<그는 외치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2,1-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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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주간 월요일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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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5일 매일미사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의 잔치를 배경으로 합니다. 참혹한 수난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 잔치, 향유, 여성의 머리카락 등의 소재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음에도 다시 살아난 라자로의 이야기는 오늘부터 엿새 뒤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마리아의 이야기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1년 치 품삯에 해당)이나 하는 비싼 향유를 한 번에 사용하며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 것 때문에 유다 이스카리옷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 · · · ·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러나 본문은 분명하게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냥 놔두어라.” 하시며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행위와 당신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향유’를 쏟아 ‘예수님의 발을 닦는 행위’는 당신의 ‘피와 물’을 온전히 쏟아 ‘인간의 죄를 닦으신 예수님의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던 것처럼 십자가 주변도 예수님의 피 냄새가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듯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그가 허리를 굽혀 예수님의 발을 닦았듯이 예수님께서도 허리를 굽혀 인간의 발을 닦으시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고, 성실하게 공정을 펴시며,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분께서는 “백성에게 목숨을 · · · ·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이시기에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처럼 이제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숨과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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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2천 년 전 오늘, 그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졌는데, 죽었다가 되살아난 라자로도 함께 있었다(요한 12,1-2). 죽은 오빠를 되살려내신 예수님을 위해서 마르타와 마리아가 잔치를 얼마나 성대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준비했을지 설명할 필요 없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렸다.

   돈 계산이 빠른 유다 이스카리옷에 따르면 그 향유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일당 노동자 1년 품삯이라고 한다.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값비싼 향유를 쏟아부어도, 그것도 머리가 아니고 그분의 발에, 그래도 조금도 아깝지 않은 분, 그보다 더 한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해드렸을 분,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드려도, 내 목숨을 드려도 아깝지 않은 그런 분이다.

예수님께 기름을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다른 세 공관복음에도 소개된다(마태 26,6-13; 마르 14,3-9: 루카 7,36-50). 그런데 각기 다른 형식으로 보도 된다. 그만큼 그 사건이 풍요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인 것 같다. 그 당시 기름을 부음, 도유(塗油)는 임금이나 예언자를 임명하거나, 또는 장례 때 시신이 부패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영원한 임금이고 영원히 살아계셔야 할 분이었다.

  잔칫상에서 마리아의 그 행동은 이상하고 어쩌면 무례해 보였을 거 같다. 하지만 그런 눈치와 비난은 그에게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목숨보다 소중한 분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 향기가 너무 진해서 어지러울 정도였을 거 같다. 그때 그 여인이 향유를 쏟아 온 집안을 향기로 차고 넘치게 채웠다면,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은 당신 피를 쏟아 온 세상을 적시실 거다.

온 세상이 생명의 향기로 가득 차게 된다.

물이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는 아니 가는 곳 없이 온 세상 모든 데로 흘러 들어간다.

특히 희망을 잃은 이들의 마음속,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누군가 새로 합류했을 때 그 향기를 맡아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그의 향수나 색다른 섬유유연제 냄새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 공동체 전체 분위기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향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향기를 품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피를 수혈받은 사람이다.

아직도 인공적으로 피를 만들 수 없다. 피는 오직 사람의 몸에서만 만들어지고, 사람만이 피를 나누어줄 수 있다.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피를 수혈받을 수 있다. 러시아의 한 극장에서 평범한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사람들, 돈 몇백만 원을 받고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할 피다.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의 향기로 가득하기를 바란다.

 

예수님, 제 몸에는 주님의 피가 흐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 함께 죽어서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목숨보다 귀한 이 신앙을 지켜주시고 제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어, 사랑이 없는 곳에 사랑을,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을, 믿음이 없는 곳에 믿음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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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도 유난히 가깝고 편안하고 절친한 가족이 있었으니, 바로 라자로와 그의 누이 마르타, 마리아네 집이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끝도 없이 늘어선 환자들의 치유, 적대자들과의 거듭되는 논쟁으로 온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즐겨 찾던 집이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의 집이었습니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갑작스레 우르르 들이닥치곤 했었는데, 그럴 때 마다 세남매는 그들을 극진히 환대하였습니다. 냉장고를 탈탈 털어 식사를 준비했고, 감춰두었던 값진 포도주를 내어놓곤 했습니다.

베타니아의 그 집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오아시스이자 베이스 캠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두신 성주간 첫날 베타니아의 그 집을 또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여느 때처럼 마르타는 마음이 급해지고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지지고 볶고, 삶고 굽고 정신없었습니다. 라자로는 예수님 맞은 편에 앉아 귀빈 접대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이 일치하고 있었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녀는 직감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드디어 사랑하는 주님과 작별할 날이 가까이 다가왔구나. 이제 드디어 그분을 떠나보내 드려야 하는구나.

뭐라도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에 마리아는 자신의 소지품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즉시 찾아냈습니다. 자신의 소지품 가운데 가장 아끼던 물건,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챙겼습니다.

식사 중이던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마리아는 그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아낌없이 통째로 예수님 발 위에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둘러 앉아 있던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저런저런 저게 얼마나 비싼 향유인데...저런 행위는 아무 사이나 하는 행위가 아닌데...공개석상에서 무슨 꼴불견이람.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당하고 거리낌없이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여인들이 아주 중요시 여기는 머리카락으로 누군가의 발을 닦아드린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겠습니다. 너무나 그를 사랑한다는 표현,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대상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마리아가 보여준 특별한 행위는 일종의 장례 절차였습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해드리는 것도 좋지만, 살아생전 해드릴 수 있는 가장 극진한 예를 주님께 바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갸륵해보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자신이 지니고있는 가장 귀한 것을 봉헌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내가 지닌 가장 귀한 것을 대체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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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삼백 데라리온 어치의 향유를 발에 바르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는

항의와 비판을 받으시는데 제 생각에 이 비판은 날카롭고 정의롭기도 하여 참 뼈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신 것은, 유다의 비판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도 같은 생각이셨을 겁니다. 그 비싼 향유를 당신 발에 바르는 것보다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원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 행위를 마리아에게 허용하신 것도

당신이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 허용하신 것일 겁니다.

 

사랑의 허용,

사랑의 수용,

사랑을 귀히 여김.

 

이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적당한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예전의 저는 누가 무엇을 제게 선물하실 때 칼 같이 거절했습니다.

저의 가난을 위해서입니다.

견물생심처럼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작은 구멍이 봇물 터지듯 하게 할 것이기에

겁먹고 미리 그리고 아예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주시는 분들의 사랑을 고려하고 배려할 사랑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때 저의 가난은 많이 타락했지만

사랑의 여유는 많이 생겼습니다.

 

그 선물을 사랑으로 받아 나의 소유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 사랑이 순환하게 하는 것

곧 돌고 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허용과 사랑의 수용과 사랑을 귀히 여김이

사랑의 순환이 되게 함이 저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발 씻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실 겁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선언하실 것이고,

주님의 발을 씻어드린 마리아도 주님 돌아가신 뒤에는

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의 발을 주님 발 씻어드렸듯 씻어줬을 겁니다.

 

이럴 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도 대립이 되지 않고

순환이 되는데 이 사랑의 순환을

오늘 주님과 마리아의 사랑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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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라?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오늘 성주간 월요일 복음의 주인공은 단연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쏟아 부은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찾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집에 살았던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남매였고,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고 또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던 삼남매였습니다. 이중 마리아의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가장 뛰어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화답송 후렴의 고백은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상징하는 바 참으로 주님의 종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입니다. 제 옛 자작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그대로 주님의 종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며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은총의 성주간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무려 26년이 지났어도 참 많이 인용했던 시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사랑도 분명 이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예견한 듯 마리아는 사랑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 말그대로 한폭의 살아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화같은 장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다.’ 순 나르드 향유 냄새가 상징하는 바, 마리아의 향기, 사랑의 향기,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 같습니다. “난같은 당신”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바로 마리아가 그러합니다.

 

“당신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있음자체만으로

향기롭고 평화로운

난같은 당신, 마리아입니다.”-1998.3.37

 

흡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경청하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가, 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드리던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이 연상되는 참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말하는 주님의 종은 그대로 마리아가 참으로 사랑했던 예수님이심이 환히 계시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전폭적 사랑과 신뢰를 받았던 주님의 종, 예수님에 대한 하느님의 고백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은 마리아는 물론 사랑의 관상가의 삶을 지향하는 우리 모든 이들의 이상적 인간상입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공정을 펴리라.’

 

한결같이 자비롭고 섬세하고, 성실하고 공정하고, 고요하고 자상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하느님을 고스란히 닮은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이자 믿는 모든 사랑의 관상가들이 닮고 싶은 모습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을 참으로 사랑하시는 다음 하느님의 모습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 이런 하느님을 잊어버려, 잃어버려 자초한 인간의 불행이요 비극입니다. 새삼 이런 하느님을 경외하고 흠숭하고 찬미하고 감사함이 우리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며 살길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로 불림 받은 우리의 보편적 성소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사명을 부여받는 주님의 종은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주님의 종들, 세례받아 주님의 종, 주님의 자녀가, 복음의 일꾼이 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우리를 무지와 허무에서 해방하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세상의 빛이신 주님의 종 예수님을 모심으로 무지의 눈이 열려 보게 되고, 무지의 감옥, 무지의 어둠, 허무의 감방에서 해방되어 우리 역시 주님의 종이 되고 참 자유인이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아 참으로 자유로운 주님의 종이 되어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꿰뚫어 본 주님의 종, 사랑의 관상가가 오늘 복음의 주인공 마리아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신원을 깊이 깨달아 알았고 이심전심 참으로 마리아를 사랑했던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에 속했으면서도 장차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길 제자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극명히 대조됩니다. 말그대로 영적으로 눈먼 유물론자 유다입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사랑에 눈멀었기에 이런 계산이요 판단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어찌 사랑을 계산할 수 있겠는지요. 유다가 보기에 마리아는 참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쳤을지 모르나 예수님은 물론 우리는 압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임을!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했다 합니다.

 

다음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참으로 사랑했고 자신이 참으로 사랑했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를 더 이상 제발 괴롭히지 말라 당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 어른 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입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를 죽이기로 결의했고, 주님의 종 예수님의 생명도 풍전등화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리아의 사랑의 향유 추억을 간직하고 주님의 종 예수님을 닮은 향기로운 주님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 안에 늘 현존하는 주님이시오, 가난한 이들을 통해 늘 만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 주님의 빛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3-14).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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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을에 두 농부가 있었습니다.

둘 다 곡물의 씨앗을 뿌리려고 준비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씨앗을 뿌리려는데, 곡물 씨앗 안에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가려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한 농부는 “나는 다른 씨앗이 섞여 있는 이 씨앗을 뿌리지 않겠다.”라며 씨 뿌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반면 다른 농부는 그럼에도 씨앗을 밭에 정성껏 뿌렸습니다.

시간이 지나, 곡물을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다른 씨앗이 섞여 있어도 씨앗을 뿌린 사람이 분명합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말씀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가라지는 독보리라고 불리는 잡초로, 밀의 뿌리와 뒤엉켜 자라기 때문에 이 가라지를 뽑으면 밀까지 뽑히게 됩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점과 약점을 얼른 뽑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적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는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가지려고 하지만, 이 부정적인 모습도 받아들이면서 밀과 같은 좋은 모습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부족함을 가지고 있다면서 대충 막살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되돌아갈 수 있는 용기 있는 겸손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겸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가라지를 억지로 뽑으려 하지 않습니다. 즉,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잡초의 힘을 빼앗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잡초를 솎아내고 그 힘을 빼앗습니다.

물론 전부 제거하거나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그 불순물을 제거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매달리며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유다는 이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지요. 쓸데없는 낭비를 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사리사욕이 가득 찬 계산속에서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립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낭비일까요? 아닙니다. 사랑만이 보입니다.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받아주십니다. 주님 앞에서는 완벽주의자가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로지 사랑의 삶만이 필요합니다.(조명연 마태오 (빠다킹)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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