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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사순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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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사순 제3주간 금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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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사순 제3주간 금요일

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2024년 3월 8일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매일미사 복음 묵상 (바로가기) [ 목 차 /클릭가능 ]

2024년 3월 8일 금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8일 금요일 복음

가톨릭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양승국 스테파노신부님 묵상, 살레시오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이민우 유스티노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미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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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3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 주시고 좋은 것은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5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7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8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

9 내가 응답해 주고 돌보아 주는데 에프라임이 우상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10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복음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28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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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8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모든 계명 가운데에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여전히 우리에게도 궁금한 질문입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 신앙생활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무엇인지 언제나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명확히 답을 주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우리 하느님만이 유일하신 ‘주님’(주인님)이심을 인식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독서 또한 비슷한 내용을 선언합니다.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이 선언에 이어 독서는 첫째 계명을 잊어버릴 때 나오는 결과를 ‘비틀거림’이라는 주제로 묘사합니다. 독서의 시작과 끝에 ‘비틀거림’이라는 단어가 되풀이되어 나오는데 이는 히브리 말 ‘카샬’로, ‘넘어지다’, ‘흔들리다’, ‘실족하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에 흔들리거나 불안에 넘어지는 이유는 ‘주님만이 하느님’이시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잊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삶의 중심과 본질을 잊어버리고 본질이 아닌 것에 의지하고 매여 있으니 중심을 잡지 못하여 매번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순 시기의 정점으로 가는 이번 주에 계속 강조되고 있는 주제는 ‘회개’입니다. ‘주님만이 하느님’이심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 아시리아나 군마가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고백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더 이상 우리를 흔들리며 걷게 하지 않는 지혜이며, 이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시작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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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얼른 어른이 되기를 그렇게 바랐는데, 막상 한참 어른이 되고 보니 어렸을 때가 그립다. 그때는 맘 놓고 기댈 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데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기댈 언덕이 되라고 요구받는다. 내 속은 아직 열두 살 아인데 그런 몫을 하라고 하니 불편하고 무겁다. 이제는 정말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기댈 언덕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주님의 외침은 이행해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가야 할 유일한 길이다. 고아가 부모나 부모 같은 어른, 삶의 짐을 내려놓고 지친 마음이 쉴 수 있는 그런 곳을 찾는 것과 같다. 그런 곳을 찾지 못하면 사는 게 너무 무겁고 외로워 살 수 없을 거다.
호세아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호세 14,4).” 이는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호세 14,2).” 하신 하느님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다. 그런데도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 회개가 그렇게 기껍지 않은 건 왜일까? 그래야 하는 줄 잘 알지만, 하느님 생각하면 아주 깐깐한 바른생활 선생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은 아닐까? 거기에 더해 세속적으로 살면 안 해도 되는 의무들, 주일미사 참례와 정기적인 고해성사, 단식과 단체활동 등 나의 자유로운 삶을 간섭하는 것이 생겨난다. 하느님께 돌아가고 싶어도 그런 것들 때문에 주저한다.


예수님 시대 일반 서민들은 수백 가지 율법 규정 준수 때문에 사는 게 무거웠다. 그걸 다 외울 수 없거니와 안다고 해도 먹고살기 바빠서 그런 거를 다 지킬 수 없었다. 율법 준수가 곧 구원이라고 알고 있었으니 서민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없었다. 서민들의 그런 처지를 몸소 체험하셨던 예수님은 가장 큰 두 계명을 강조하셨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그걸 다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하나로 줄이셨고 당신이 몸소 그것을 실천하셨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 가장 큰 사랑을 하셨다(요한 15,13).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그 율법 학자는 ‘하느님은 한 분이고 그 두 계명이 가장 크다’는 예수님의 대답에 온 맘으로 동의했다. 그 이후 예수님께 도전하는 이가 없었다고 하니(마르 12,34), 그는 저명하고 모범적인 학자였나 보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이 TV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하셨을 때가 기억난다. 사회자는 아주 똑똑한 신학자요 철학자였는데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를 세속적인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냐는 질문에 추기경님은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인간 존엄’ ‘인권 존중’이라고 답했다. 그 답에 그 똑똑한 사회자는 뭔가로 머리를 맞은 듯 잠시 멍하고 있다가 감탄했다. 웬만한 성직자면 할 수 있는 대답이지만 그분이 소외된 이들을 어떻게 대했고, 또 그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기에 그 대답의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 회개는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내 안에 가려지고 억눌려 있는 사랑을 회복하는 거다. 하느님 사랑은 무겁고 귀찮은 또 다른 의무가 아니라 내가 사는 길이고 영원히 기댈 언덕을 찾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사랑 계명은 삶의 편한 멍에고 가벼운 짐이다(마태 11,30). 아끼다 똥 되지 않게 마음껏 사랑해야겠다. 예수님 공생활 끝은 성체성사 제정이었고, 그 이후 바로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를 위해 당신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것이 당신의 하느님 사랑이었다. 그래서 매일 내 영혼을 위한 양식이고 치료제로 당신을 먹게 하신다. 삶은 갖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모범을 보여주신다.
예수님, 저는 사랑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외로운 이와 동행하며 제 외로움이 해소됩니다. 버려야 가벼워지고 죽어야 음식이 되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십자가의 길 묵상이 제 삶을 더 가볍고 편하게 해 준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잘 따라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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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만난 이후, 그리도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성숙하고 균형 잡힌 것, 보다 진정성을 지니기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진한 하느님 사랑의 체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사제나 수도자들의 진지한 자기 반성도 필요하겠습니다. 우리가 동반해 드리는 교우들은 절절하고 뜨거운 하느님 사랑 체험에 저리도 행복해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냉랭하고 뜨뜨미지근할 뿐입니다.

존 포웰 신부님은 하느님 사랑 체험의 첫출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게 와 닿았다.”

신부님은 그 특별한 체험 이후 삶이 180도 달라지게 되었답니다. 당시 받은 느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아름다운 세계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렇게 새로운 눈을 뜨고 보니 그전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강렬한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한 그 이후는 더 이상 하느님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랑과의 접촉 이후 더 이상 이웃을 미워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감미로운 체험 이후 봉헌 생활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 두 가지를 소개하고 계십니다. 그 둘은 구약 모든 율법의 종합이요 요약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두 가지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놀라운 신비체험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있는 경쟁의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도 없는 성공을 위한 갈망, 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기대, 이웃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길고도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갈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이 찾아들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살게 될 때 새 안경을 처음 쓰는 기분일 것입니다. 그간 보이지 않았던 하느님 자비의 흔적을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던 하느님 사랑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뵙듯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의 손길이 우리 삶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 우리는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매 순간 흠뻑 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신부님,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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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다산 어른의 말씀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사랑 하나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사랑으로 정리된다. 내 마음의 바름을 다른 이의 마음에 합하는 것이다.”-다산 사랑이 답입니다.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가 사랑입니다.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요 사랑해서 비로소 사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이요 삶의 의미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삶은 ‘사랑의 학교’로 정의하곤 합니다.

“공자가 ‘삼아! 내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스승의 도는 충서(忠恕) 일 따름이다.”-논어 공자 역시 충서의 사랑, 용서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용서의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어제는 새로 구입한 소설의 문장 표현들이 너무 아름다워 처음 두 페이지를 소리 내어 읽어봤습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아름다움이 감동을 주고 마음을 정화합니다. 어제 강론 중 인용된 “산과 강”이란 제 자작시에 감동하여 보내준 댓글도 잊지 못합니다.

“내가 머물면 산이고 움직이면 강이다. 와! 신부님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사랑합니다. 최고세요.” 한 자매는 ‘산과 강’을 시화(詩畫)로 만들어 보내줬고 덕담의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자매님 시화 솜씨가 달인의 경지에 도달했네요! 축하드립니다.” 이 또한 사랑의 덕담입니다. 의도적, 의식적으로 누구든 저는 이름 앞에 과감하게 “사랑하는” 이란 말마디를 꼭 붙입니다. 고백하라 있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백하다 보면 사랑이 뒤따라 온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사랑한다 고백하며 막 살 수는 없으니 나를 위한 사랑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전례가 좋은 것은 전례의 아름다움이요 전례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리아의 집 피정집 벽에 붙어있는 제 자작시 “사랑”이란 시화입니다.

27년 전 시이지만 당신으로 지칭된 주님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늘 새롭게 타오르고 있음을 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 있습니다. 사랑의 열정, 사랑의 순수, 열정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새롭게 강조되는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물음에 주님은 이웃 사랑까지 덧붙여 답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갈림없는 사랑, 한결같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둘이자 하나인 사랑이되 우선순위는 하느님 사랑에 이은 이웃사랑이요,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고 검증되기 마련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공감, 감동한 율법학자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함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고 화답합니다. 호세아서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 신의의 사랑, 예지의 사랑입니다.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거룩한 전례의 거부나 반대가 아니라 사랑의 삶이 바탕된 참된 전례에 대한 강조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가 아닌 삶과 전례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전례는 공허(空虛)하고 전례가 없는 삶은 맹목(盲目) 일 수 있습니다. 전례와 삶은 둘이자 하나요 함께 가야 함을 봅니다. 미사전례는 삶으로 확산(擴散)되고 하루의 삶은 미사전례로 수렴(收斂)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흡족해하시며 그를 격려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율법학자는 지금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챘는지 궁금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화신이자 그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 회개의 여정에 항구 하며 평생 예수님께 보고 배워 살아야 할 사랑의 이중계명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사랑입니다. 회개하라, 사랑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삶인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끝납니다. 한결같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회개뿐입니다.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영혼의 화장에 사랑의 기도와 회개보다 더 좋은 화장품도 없습니다. 사랑의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날로 아름답고 깊어지고 향기로워지는 영혼입니다. 호세아가 우리 모두에게 거듭 요청하는 바, 회개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날까지 숨 쉬듯, 밥 먹듯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사순시기야 말로 집중적 회개의 시기, 정화와 성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와 사랑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사랑의 축복이요 날로 새로워지는 사랑에, 삶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호세아 예언자처럼 시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자 영성가이자 시인인 호세아의 사랑의 시가 호세아서의 대미를 참 멋지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우리 하나하나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주님의 미사축복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회개에 따른 하느님 사랑의 축복이 차고 넘칩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그들은 다시 내 그늘에서 살고

다시 곡식 농사를 지으리라.

그들은 포도나무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명성을 떨치리라.”(호세 14,6-8). 아멘.(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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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 어게인’의 저자 애덤 그랜트는 우리가 성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다시 생각하기’ 기술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과 이제껏 배운 것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부정당하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지요. 이것은 정체성의 위상을 지키려는 본능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정체성을 바꾸면 안 될까요?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지요. 계속해서 완성되어 나갈 뿐입니다. 따라서 다시 생각하면서 ‘정체성’을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해 봤자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 다시 생각할 수 없을까요?

‘전에 해봤는데 소용없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 또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너무 어려워. 나는 절대 못 해.’라는 생각도 다시 생각해야 할 말이 아닐까요? 만약 당신과 가장 친한 사람이 예를 들어, 사랑하는 자녀나 친한 친구가 그런 말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다시 생각하라고 정중하고 간곡하게 부탁할 것입니다. 다시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고, 의미도 생기게 됩니다.

  며칠 전에 지방으로 강의를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오니 너무 늦은 시간이고 너무 피곤했습니다. 씻는 것도 귀찮고 얼른 침대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저녁기도와 끝기도를 바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생각했습니다. 피곤해서 곧바로 침대에 눕고 싶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회를 줄이고 기쁘게 기도를 마치고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사랑의 계명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신명기에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셨던 사랑의 계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다시 만든 세부 조항 613개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세부 조항 613개 모두 중요하다고 하니, 만약 두 개의 조항을 동시에 지켜야 할 상황이라면 어떤 조항을 지켜야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 정작 반드시 실천해야 할 사랑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던 이유는 다른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고 잘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모습을 주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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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써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 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 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레위 19,18)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레위 19,34)에 한정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루카 10,30-37),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암수동체와 같은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내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주님!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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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서 여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첫째 가는 계명을 대답하시는데 이것은 신명기 6장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 이 내용은 똑같이 신명기에 있습니다. 신명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유다 민족에게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고 나서 다임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는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거듭 들려주고 일러주어라."

그렇기 때문에 유다 민족은 누구나 이것을 다 알고 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다 민족의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외우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서 묻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독도는 어느 나라 땅입니까?" 하고 묻는 것과 다름없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을 가지고 있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소 행적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무시하면서까지 이웃을 위해 병을 치료해 주고, 악마를 쫓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육박사는 예수님께서 과연 첫째가는 계명이 스스로 무엇이라고 생각하기에 저렇게 행동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첫째가는 계명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당연히 '하느님 사랑'이 첫째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끝났다면 일부 학자는 예수님께 그걸 알면서 왜 그렇게 행동했냐고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가지 더 덧붙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무시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던 이유가 드러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 선상에 놓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드러나는 표시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안식의 의무를 충실히 지켜도 이웃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안식일 계명을 어기면서까지도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는 이런 것을 예수님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는 예수님 말씀이 옳으시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요즘 시대에 많은 신앙인들이 율법학자가 깨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만 뒤끝이 없어."라고 하면서 필터 없이 함부로 내뱉는 말 때문에 이웃의 마음에 상처 입히는 경우들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인들은 아무리 묵주를 열심히 돌리고, 성무일도를 빠짐없이 바치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웃의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께 상처를 주면서 기도를 바치는 건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느님 마음만 상해드릴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목석이 아닙니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상처를 지속적으로 주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당신께 기도를 바친다면은 그것도 열심히 다한다면 오히려 더욱더 미운 마음만 더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들을 한번 가질 수 있길 바랍니다. (이민우 유스티노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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