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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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목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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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목요일

 

2024년 3월 7일 목요일 매일미사 오늘의 복음 묵상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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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목요일 제1독서

2024년 3월 7일 목요일 복음

가톨릭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보러 가기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작은 형제회 보러 가기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신부님) 묵상 보러 가기

김동규 바오로 신부님 (의정부교구 /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영성부장)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진훈 코페르티노의 요셉 신부님(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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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민족이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23-2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에게 23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24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25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26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27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28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 민족은 주 그들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은 민족이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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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23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15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024년 3월 7일 매일미사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은 서로 대조되는 두 존재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듣지 않아서 말이 끊기게 된 이스라엘’(독서)과 ‘말을 못하였지만 이제는 말을 하게 된 벙어리’(복음)가 그들인데, 이들을 연결시키는 주제는 ‘소통’입니다. 복음의 본문은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말을 못하게’ 된 것, 곧 듣지 못해서 말까지 못하게 된 것이 ‘악의 일’이었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렇게 악의 일이 듣지 못하게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 결국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일’은 듣게 하고 말하게 하여 소통을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악(베엘제불. ‘즈불룬의 바알’이라는 뜻)의 힘을 빌려하는 것인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논지로 답을 주십니다. 어떤 나라나 가정도 분열되면 망하는데, 만일 악의 최고 존재인 베엘제불이 또 다른 악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악의 분열을 자처한 것이니 너무도 분명한 모순이 됩니다. 그러니 악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일은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 무엇보다도 하느님과의 소통을 무력화하는 것이 악의 일입니다. 만일 어떤 사건이나 상황이 내 삶을 무너뜨리고 피폐하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면, 분열과 교란으로 우리를 붕괴시키는 악의 속성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선명하게 호소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소통하며 알려 주시는 길을 의연히 걸어갈 때, 우리는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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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꾸 잊어버린다. 사람 이름이나 하겠다고 한 일을 잊는 건은 봐줄 수 있는데, 그렇게 뜨겁게 한 통회와 결심 그리고 죄와 잘못으로 아팠던 기억도 잊어버리니 참 걱정스럽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해 홍해를 마른 땅을 밟고 건너고 그들을 쫓던 이집트 군대가 바다에 빠져 죽는 모습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고 대들었다.

그래도 그중 일부는 그것을 잘 기억하고 마음에 새겨 말로써 글로써 후손에게 전했다. 하느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언자들을 계속 보내셔서 당신 말씀을 전하셨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예레 7,25).” 성경은 옛날얘기가 아니라 오늘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이다. 하느님은 온갖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에게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또는 제멋대로 하고 싶어하는 유전자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에덴동산에서 그 열매를 따먹었던 죄의 유전자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듣지 않는다. 예수님이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어떤 이들은 그게 사탄의 힘을 빌려하신 것이라고 했다. 모순이다. 어떻게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겠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그 자체로 마귀는 망한 거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순을 설명해 주셨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거다. 마치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세례자 요한이 금욕적으로 살자 마귀가 들렸다고 했고, 예수님이 사람들과 어울리자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마태 11,18-19).

 

 사람이 이러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법을 개정하거나 이러저러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아무리 외치고 시위를 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큰 사고가 나고 사람이 죽어야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나마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아픈 기억을 잊어버린다. 구세주 예수님은 2천 년 전의 현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살아계신 분이다. 우리 안에 계시고 나와 동행하신다. 그분과 그 반대편 사이 중간 지대는 없다. 같은 복음을 수백 수천 번 듣고,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라고 매일 말하고 듣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잊어버리지 말라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성경을 읽지 않고, 성사를 받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사람은 본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 육체와 세속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 이외 것은 모두 그 형체가 사라지는 중이다(1 코린 7,31).

 예수님, 매일 주님 말씀을 듣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하루 중 여러 번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하고 문득 떠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습관처럼 주님을 찾고 기도합니다. 주님 편에서 모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더욱 친밀해지게 도와주소서. 아멘.(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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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불편부당(不偏不黨)과 부화뇌동(附和雷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불편부당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화뇌동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도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불편부당하지 않으면 공동체가 깨지는 것을 보겠습니다. 불편부당이란 어느 편에서 서지 않고 어느 당파에 속하지 않는 거지요. 그런데 한 공동체에서 누가 한편에 서고 누가 다른 편에 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주도적으로 그리고 나 중심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편으로 만드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력한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은 비단 다른 편과 내 편을 가르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편에 서고 주님 편에 서야 할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편 네 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느님 편만 있어야 하는데 내 편에 서게 함으로 그를 하느님 편에 서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부화뇌동하지 말아야 함을 보겠습니다. 남을 내 편으로 만들지 않을 뿐 아니라 나도 어느 편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함입니다. 부화뇌동이 주도적으로 편 가르기와 줄 세우기를 하는 것보다는 덜 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동체를 깨는 것이기에 못지않게 악하고, 무엇보다도 줏대를 잃고 악한 일에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기에 딱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뇌동(雷同)이 의미하는 바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뇌동이란 천둥소리가 나면 사람들이 놀라 같이 움직이는 형용이고, 그래서 뇌동하지 말라고도 하지요. 이는 예기(禮記)에 聽必恭 毋勦說 毋雷同, 곧 남의 말을 공손히 듣되,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무조건 따라 하지 말라고 한 말과 맥을 같이하지요 그런가 하면 군자의 태도와 관련하여 논어에는 이런 말도 나옵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곧 남과 화합을 하나 꼭 같지는 않다(논어)는.

 그러니까 진리에 어긋나는 말을 누가 하면 화이부동하고 부화뇌동하지 않아야 군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군자를 넘어 성인 곧 진리 편에 서고 하느님 편에 설 사람들입니다. 확실하게 주님 편에 서야 하지 어정쩡하게 있다가 부화뇌동하지 말아야겠습니다.(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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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아인슈타인이 지금 이 자리에 강의하러 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강의를 듣겠습니까? 또 이 강의를 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올까요? 지금이야 워낙 유명한 분이라서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듣기 위해 올 것이라고 예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는 교수로서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너무 아는 것이 없어서 아인슈타인의 강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물리학계의 주목받는 샛별이었지만, 수강 신청자는 겨우 세 명이었고 다음 학기에는 신청자가 아예 없어서 그 강좌가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통해 프린스턴 대학 총장은 아인슈타인의 교수 기량이 부족하다면서 정교수 직위를 주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잘 가르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기 역량을 드러내는 분야가 있는 법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실력 없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처럼 실력은 뛰어나지만, 단지 가르치는 것만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늘 이런 식입니다. 하나의 모습으로 전체를 평가하는, 그래서 더 중요하고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느님 일 역시도 전체를 보지 못하기에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에 바로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마귀가 나가고 이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군중 중의 몇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이 말을 듣고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런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알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도 하느님의 커다란 표징입니다. 당시에 벙어리 마귀는 하느님만이 쫓아낼 수 있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못 하게 하는 벙어리 마귀이기에 하느님만이 쫓아내서 당신 말씀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편을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마귀가 마귀를 쫓아내는 어리석은 행동들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단순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에 관한 부정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반대하고 흩어 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조명연 (빠다킹 신부님) 마태오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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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해 성사를 드리면 누구나 은총으로 나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보석을 통해서도 가시지 않는 마음의 상처가 주홍글씨처럼 각자 풀어야 할 숙제로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아무리 열심히 드려도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고해성사를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화해를 이루는 시간으로 이해하기보다 불편한 숙제를 빨리 해치워버리는 죄의 목록을 두서없이 나열하는 시간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고해 자체가 내 할 일을 다한 것처럼 형식적인, 마치 면죄부 성사로 여겨지게 된다면 양심과 의식을 진심으로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각으로 반성하고 또 순간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의지로 결심하는 그러한 성사가 될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확고하고 결의에 찬 결심을 해도 순간적일 뿐 지속적인 회개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몇 시간만 지나도 또 같은 죄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블의 강력한 힘에 늘 쉽게 장악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변화되지 않는 내 삶에 조급함과 두려움을 느끼면서 스스로에게 더욱 큰 실망과 죄책감을 떠안기게 됩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죄의식은 결코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또 자신을 혐오하고 단죄하는 신경증적인 죄의식이 아닙니다. 즉 수치심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죄의식이란 '혼자 힘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 죄를 극복하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무한한 하느님 앞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죄의식은 물론 비참하고 괴롭지만 하느님 사랑을 굳게 믿고 있다면 오히려 이를 통해 하느님 사랑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또 용서의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신을 단죄하는 죄의식은 나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 또한 증오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더욱 그 죄 자체에 압도당하고 미움과 증오에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결국 죄를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 속 군중들 몇몇도 마귀를 쫓아내시고 죄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주시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오히려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즉 자신 안에 죄에 갇혀 죄의 두려움만 보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이 쓴 영신수련이라는 책에 영적 식별을 위한 규범들, 그 내용은 사탄의 계략에 관한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과 심리, 특히 상처와 아픔과 같이 가장 취약한 부분에 최대치를 아주 비열하게 집중적으로 공약하고 지배하게 유혹한다고 말합니다.

   악마의 관심사는 인간이 죄를 짓기에 유혹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내버려 두어도 스스로 수많은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주요 목적은 죄를 지은 인간이 '하느님과 다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죄를 짓는 그 자체보다 죄를 지은 다음에, 우리의 마음과 태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죄를 마음껏 지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의 나약함으로 죄의 유혹에 빠졌더라도 곧바로 하느님께 달려가면 용서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느끼고 체험하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인간은 영성적으로도 또 신학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도 혼자 힘으로는 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혼자 힘만으로 아무리 완전히 무장한다고 하여도 인간보다 더 힘센 악마가 덤벼들면 스스로 믿고 의지했던 무장이 모두 해제되고, 또 그마저 가지고 있던 선한 마음, 노력의 의지, 기쁨의 전리품들을 모조리 빼앗겨버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죄 안에서 빨리 다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말씀은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나약함과 죄를 하느님 사랑 안에서 받아들일 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또 하느님 은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와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믿음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덜 의기소침해질 수 있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이 더욱더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일상 안에서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사랑을 믿고 곧바로 하느님 사랑과 용서, 자비의 품으로 달려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 은총을 구하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동규 바오로 신부님, 의정부교구 /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영성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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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이자 사순시기 내내 계속되는 새벽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입니다. 사순시기 낮기도 독서 시 계응송 역시 늘 동일합니다.

 

“주여,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주소서.”(시편51,12)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 중 ‘배우다’, ‘섬기다’에 이어 ‘어질다’입니다. 공자의 인(仁)이 바로 어질 인(仁) 자입니다. 마음이 어질다는 마음이 “좋다, 착하다, 순하다, 슬기롭다, 너그럽다, 관대하다, 유연하다, 현명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덕목을 다 담고 있는 “어질다”라는 우리말이 참 좋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논어에 나오는 말씀도 어진 사람에 대한 언급 같습니다.

타인의 결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감수성이라고 한다. 감수성은 지식이 아니기에 남에게 귀 기울이는 태도로 나타난다.(다산)

새삼 남에게 귀 기울이는 경청의 자세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들음의 수용적 사람들이 어진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예를 지켜서 무슨 소용인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을 한들 무슨 소용인가?(논어) 

 공자가 강조한 것 역시 호학(好學)과 더불어 인(仁)입니다. 결국 공부의 목적도 어진 사람이 되는데 있음을 봅니다.

 

얼마 전 주고받은 결코 잊지 못할 고마운 마음 가득 들었던 어느 분과의 아름다운 대화 내용과 제 자작시를 소개합니다. 지금 남도(南道) 섬진강 부근에는 매화꽃이 한창이랍니다.

-“섬진강 매화마을입니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생각납니다. 봄철이 유난히 아름다운 섬진강의 그 자체가 시이지요!” 사실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 말도 있듯이 봄철의 한반도는 어디나 아름다운 시적(詩的) 풍경입니다. “내년 봄에는 신부님 모시고 매화 가득한 아름다운 섬진강에 봄여행하고 싶습니다. 봄의 섬진강은 항상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주고받은 대화에 즉시 떠오른 “산(山)과 강(江)”이라는 자작시에 만족했고 위로받았습니다. 이 또한 어진 마음의 표현이겠고 참으로 정주 영성의 절정이 아니겠나 하는 자긍심(自矜心)도 들었습니다.

 

 

    베네딕도 16세 전임 교황님이 자주 사용했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부러워했던 말마디 “Enough!(충분하다!)”를 저 또한 좋아합니다. 매사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넉넉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Enough(이너프)의 사람들’을 감히 누가 유혹할 수 있을런지요!

밖으로는 “정주의 산”처럼, 안으로는 맑게 흐르는 “생명의 강”처럼, 산과 강의 정주영성을 살아가는 참으로 깊고 어진 사람들이 이상적 베네딕도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와 루카복음 말씀을 읽으며 묵상하다 보니 떠오른 예화와 시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흡사 무지의 악에, 사탄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삶의 중심인, 참으로 어지신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무지의 악마입니다. 베드로의 예에서 보다시피 사탄이, 악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을 떠날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이런 이들은 바로 자기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입니다. 다음 실감 나는 예레미야서의 묘사가 그대로 우리 인간의 부정적 단면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깊은 좌절감의 표현입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는 변함없이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 등 부정적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목격하는지요. 사람이라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는 이런 이들이 악마요 사탄입니다. 악에 사로잡힌, 악에 포획된 이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회개에의 촉구입니다. 사순시기 우리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구제불능의 마음이 딱딱하고 목이 뻣뻣한 무지한 이들은 오늘 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특징은 따뜻함과 부드러움이요 죽어있는 죽음의 특징은 차가움과 딱딱함입니다. 흙도 마음처럼 살아있는 흙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살아있다 하나 죽어있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은 마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곡해하는,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이들이 바로 마음이 완고하고 목이 뻣뻣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영리한 마귀들이 결코 분열되는 일은 없으니 사탄의 힘을 빌려 사탄을 쫓아내는 일은 어불성설임을 천명하시며 당신의 구마행위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에 기인함을 밝힙니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어 악마를 포박할 수 있는 가장 힘센 자로 당신을 묘사합니다. 이미 이사야 예언서(이사 49.24-25)에서 예고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주님만이 우리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어둠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분은,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 우리의 희망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또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늘 당신 편에 설 것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과연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구원 역시 선택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단호히, 결연히 늘 사탄이 아닌 주님을 선택하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삶이 아닌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살 때, 또 온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따르는 삶을 살 때, 참으로 온전한 참나의 자유인의 삶일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 중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며 바치는 사랑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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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다른 이들의 허물이나 흉이 될 만한 점을 끄집어내어 험담을 하거나 비방을 하는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상당히 난감하거나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의 약점을 폭로하고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을 넘어 그 상대의 인간관계까지 붕괴시키는 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악에 가까운 것은 모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함은 나쁜 계략으로 남을 위험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사실이나 행동을 뒤집어 씌워서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 곧 누명을 씌우고 중상과 모략의 죄를 회담하게 됩니다. 이처럼 비방과 모함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자신 안에 부정적인 감정이 크기에 다른 이해가 잘 되는 모습을 치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다른 이를 깎아내리고 낮추려고 합니다. 또한 이와 더불어서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야만 한다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다른 이들을 어떤 입장에서 바라보며 또한 상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모함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귀머거리 마귀를 쫓아내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과 신비를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중 몇몇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에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악에 가득 차고, 근거 없는 말을 합니다. 분명 예수님을 향한 비방과 모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인 예레미야서에서도 주님께서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말을 잘 듣고 명령하신 길을 따라 온전히 걸으면 잘 되리라고 말씀해 주셨고 당신의 많은 종들을 예언자들로 보내셨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악한 마음을 따라서 고집스럽게 걷고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명하신 축복과 생명의 길이 아니라 파멸과 저주, 또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이 가고 있는 이 여정이 다른 일을 향한 악의와 죽음의 길이 아닌지를 스스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주님의 빛을 받으면서 우리 안에 선의와 희망, 감사와 영적 여정의 아름다운 덕들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는 그런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아멘. (이진훈 코페르티노의 요셉 신부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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