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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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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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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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44-52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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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7-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10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나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나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나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나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나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나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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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7일 매일미사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묵상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고, 관계가 지속되려면 당연히 서로 만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제시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청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느님을 뵙는 방법을 알려 주셨는데도 여전히 이를 요구하는 황망함입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서 누누이 강조된 아버지와 아드님의 일치가 또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여 주어도’ 그 안에 있는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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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독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다인들을 고발하며, 이제 그들을 떠나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라고 담대히 선언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전하여 줍니다. 결국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을 ‘보게 된’ 이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 땅끝’에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화답송 참조).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한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에게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우아함’과 ‘하느님을 박해하는 우둔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경종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이나 훌륭한 해석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장에 현존하여 계시는 하느님은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 복병처럼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하여 나가는 것은 종교적 허상일 뿐이고 그만큼 쉽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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