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5월 9일 매일미사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5월 9일 매일미사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5. 6.
반응형

2024년 5월 9일 매일미사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5월 9일 매일미사

반응형

 

 

 

2024년 5월 9일 매일미사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5월 9일 매일미사 독서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1-8

그 무렵 1 바오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갔다.

거기에서 그는 폰토스 출신의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아퀼라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를 떠나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자기 아내 프리스킬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는데,

3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4 바오로는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5 실라스와 티모테오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

바오로는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하였다.

6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7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다.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

8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다.

코린토 사람들 가운데에서

바오로의 설교를 들은 다른 많은 사람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2024년 5월 9일 매일미사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

5월 9일 매일미사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18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2024년 5월 9일 매일미사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5월 9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오늘 복음에서 유독 눈에 띄는 문학적 기법이 있습니다. 두 개의 대조되는 낱말을 조합하여 주제를 두드러지게 하는 방법입니다. “조금 있으면”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 대조되고, ‘보지 못하다’와 ‘보다’가 대조되며, “근심”과 “기쁨”이 대조됩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구문은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오는데, 그리스 말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조금 있으면(‘미크론’) …… 다시 조금 있으면(‘팔린 미크론’)”입니다. 이 구절은 ‘보다’라는 동사와 연결되어,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보게 될 것’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을 만듭니다. 제자들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며 술렁이자 예수님께서 그 의미를 설명하여 주십니다. 조금 있으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니 ‘근심’스럽겠지만, 다시 조금 있으면 볼 수 있으니 ‘기쁨’을 누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언급된 기쁨은 인간적 쾌락이나 즐거움과는 구별되는 매우 깊은 내적 감정으로, 지식이나 이론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깨닫는 역설적 신비를 일컫습니다.

반응형

 

상실을 체험하고 견딘 뒤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영적 기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은 빛나는 순간을 체험합니다.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 뒤 다시 어떤 사건을 만나면 이내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며 버려진 듯한 느낌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것 또한 은총입니다. 슬픔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하겠지만, 조금 더 있으면 그 슬픔이 다시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모순적 진리를 번갈아 체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어떤 순간에 체험한 가슴 아픈 ‘상실’이 조금 뒤에 지나고 보면 깊은 ‘기쁨’의 원천이 된다는 역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여정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바로 ‘진리의 영’이십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