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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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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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묵상

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묵상

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에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 이단에 맞서 투쟁하였고,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면서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253년 6월 이탈리아 치비타베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갈리스토 카타콤에 묻혔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210년 무렵 카르타고(현재 튀니지 일대)의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46년 무렵 체칠리아노 사제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품을 받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모범적인 덕행과 저술로써 교회를 훌륭히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유배당하고, 신임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재판받다가,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봉사자들도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해야 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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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순교자 기념일 복음

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순교자 기념일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17

11 그 무렵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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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묵상

2025년 9월 16일 매일미사 순교자 기념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된 시대에 과부는 고아와 함께 가장 불쌍한 사람, 의지할 곳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직 아들만이 과부의 법적, 정신적, 물질적 삶을 유지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는 외아들의 죽음으로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과부의 처지를 보신 예수님께서 그 과부에게 “울지 마라.”(루카 7,13)라고 말씀하시고 관에 손을 대십니다. 그 당시에 관이나 죽은 사람에 몸이 닿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을(민수 19,11.16 참조)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죽은 젊은이를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하시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실 것을 마치 이미 이루어진 사실로 여기시는, 당신의 굳건한 의지와 믿음을 보여 주시는 듯합니다.

그러고서 예수님께서 그 젊은이에게 말씀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루카 7,14). 주님의 이 말씀은 잃었던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 강한 힘을 지닙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젊은이를 살리시면서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여기에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출발점이 측은지심, 다시 말해서 자비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자비로운 마음과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하느님 현존이 드러나는 표징입니다. 그리고 이 자비심은 인간의 선행이나 믿음보다 앞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선행이나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그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만으로 먼저 다가가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김태훈 리푸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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