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6. 5. 11.
반응형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반응형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제1독서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 2,8-15

사랑하는 그대여, 8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9 이 복음을 위하여 나는 죄인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통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10 그러므로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12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13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 신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설전을 벌이지 말라고 하느님 앞에서 엄숙히 경고하십시오. 그런 짓은 아무런 이득 없이, 듣는 이들에게 해를 끼칠 따름입니다.

15 그대는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복음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2026년 6월 4일 매일미사 연중 제9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이 사람은 바리사이와 헤로데 당원, 사두가이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적대감을 가지는 대신 존중하며 경청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마르 12,28)라고 묘사합니다. “듣고”, “보고”, “다가와”라는 동사를 잇따라 쓰며, 한 인간이 진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여는 장면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라삐들이 613개의 계명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으로 나누어 논쟁하던 시대, 그는 율법 전체를 떠받치는 중심을 묻습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지, 무엇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인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계명만으로 답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신명기 6장 4절의 고백을 꺼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라면, 사랑도 둘로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 인간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께 삶 전체를 돌려놓는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가져와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12,31). 여기서 사랑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인간을 향한 책임으로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국 형제적 관계의 회복으로 드러납니다. 이에 율법 학자는 더 나아가 이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12,33)라고 고백하며, 성전의 제도보다 더 깊고 넓은 곳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짚어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12,34). 아직 문턱이지만, 이미 빛은 그 사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사랑은 그 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사랑은 하나의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놓은 숱한 형식 안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율법은 제도와 사상과 규범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선 곳에서 완성을 이루어 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반응형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