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안토니오 축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수호성인
성 안토니오 축일, 그는 누구인가?
성 안토니오 축제 어떻게 진행될까요?
성 안토니오의 생애와 하느님의 일
왜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일까?
성 안토니오의 유해
하느님의 부르심과 시성
그의 설교와 지식의 오늘날 영향
성 안토니오의 출신 수도회는?
성인의 프란치스코회에서의 역할
일상에서의 성인을 떠올리는 영적근력운동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기적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
성 안토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안토니오 성인께 전구를 청하는 기도
필로테아의 생각과 묵상 노트
성 안토니오 축일, 그는 누구인가?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 마음이 있을 때 그것을 찾아 헤매게 되지만, 이렇게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Sanctus Antonius Patavinus)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축일은 6월 13일입니다. 그의 본명은 페르난두 마르팅스 드불룡이스(Fernando Martins de Bulhões)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태어났는데요. 하느님 안에서 그의 삶은 한 편의 영화같았습니다.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무언가를 잃습니다. 이 '잃어버림'은 스마트폰과 지갑처럼 손에 잡히는 것부터 인생의 방향, 오늘 할 일과 같이 말로 하기 어려운 것까지 함께 하는데요. 잃어버림은 이렇게 우리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주해질 때 찾아올 때 '잃어버림'을 '되찾음'으로 바꾸어 주는 성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입니다. 본명 앞서 말한 것처럼 페르난두 마르팅스 드 불룡이스로 그는 주님께서 세상 보내신 부드러운 등불같은 존재였습니다.
1195년 8월 15일 포르투갈 리스본의 유복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세상의 환호와 인기 대신 수도원의 종소리를 따랐고, 아우구스티노회를 거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며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새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파도바에 이르러 그는 깊은 신학적 통찰과 따뜻한 인간적 매력을 섞어 아주 복잡한 교리를 매우 '정교하게 풀어내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설교를 시작하면, 어린아이부터 학자까지 모두를 매료시켰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 더 다가갔고, 길을 찾았습니다. 심지어, 강가의 물고기가 안토니오 성인 발치로 다가와 그의 설교에 귀 기울였다는 전설까지 퍼졌습니다.
1231년 6월 13일 파도바에서 성 안토니오가 선종한 뒤에도 기적은 이어졌습니다. 32년 후 이장하는 날, 그의 혀가 신선한 꽃처럼 온전히 남아 있었고, '하느님 말씀을 전한 도구로서 부패하지 않았다'는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선종 11개월 만에 그를 성인으로 선포했고, 1946년 교황 비오 12세는 교회학자라는 월계관을 씌웠습니다.
매년 6월 13일 세계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 안토니오 축일을 기념하며 미사와 기도, 순례가 이어집니다.
파도바 대성당의 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면 신자들은 “오늘, 우리는 찾는다!”를 속삭이며 모여들고, 유리관 속 안토니오 성인 유해로 안치되어있는 그의 혀 앞에서는 말을 잃고 경건히 고개를 숙입니다. 저녁이 되면 안토니의 성인상이 거리를 지나고 성가가 울려 퍼집니다.
성 안토니오 축제 어떻게 진행될까요?
축일 날짜: 6월 13일
주요 행사: 미사, 기도, 순례, 축제
의미: 설교와 신앙의 모범,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 기념
특별 전통: 파도바 대성당에서 성인의 혀를 기리는 행사, 음악회 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깊은 신심과 영감을 주는 중요한 날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인생과 하느님의 일
책과 사랑에 빠진 리스본 귀족 아들
공부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말그대로 모범생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총명한 어린 소년 안토니오에게 가족과 친구들이 자주 놀러와 방문했습니다. 계속 방문이 이어지자, 그는 학업에 방해를 느끼고, 과감히 코임브라의 산타크루스 대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신학과 라틴어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공부의 신'이 강림한 듯 빛을 발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를 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안토니오 성인에게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지적 호기심을 심어주시어,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향해 질문하는 영혼으로 성장하게 이끄셨는데요. 포르투갈 리스본의 귀족 가문에 태어난 소년 안토니오는 15세에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성빈센트드포라 수도원)에 입회하며, 지성과 신앙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15세의 나이에 아우구스티노회 성비센트 드 포라 수도원에 입회한 것도, 공부와 기도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의 총명함은 조용한 수도원조차 시끌벅적하게 만들었습니다. 친구들과 친지들의 잦은 방문에 학업이 방해되자, 그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가 더 깊이 듣고, 더 조용히 깨달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방문으로 번잡해진 리스본을 떠나, 코임브라의 산타크루스 대수도원에서 조용히 말씀을 연구하도록 이끄십니다. 산타크루스 대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긴 후, 신학과 라틴어에 대한 열정은 하느님 말씀을 통찰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 자라나며 '말씀의 그릇'이 되어갑니다.
순교자의 피는 새로운 씨앗이 되고, 하느님은 고통 속에서 부르시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께서는 순교자 다섯 명의 피를 통해 안토니오를 다시 부르십니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모로코에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순교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은 어린 안토니오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고, 인간의 눈으로 보면 비극이었지만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는 새로운 소명의 씨앗이었습니다. 안토니오는 이 부르심에 응답했고, 수도복을 벗고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때 ‘안토니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입게 하심으로써, 정체성을 새롭게 빚으셨습니다. 수도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대 안토니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 그의 새로운 여정은 모로코로의 선교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병에 걸리면서 쓰러지고, 시칠리아에 불시착하고 맙니다. '운명은 때로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신 셈이죠. 하지만, 인간의 계획은 멈췄지만, 하느님의 인도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강론대에 올라서자, 메마른 자리에 말씀이 심어지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오는 병약한 몸으로 시골 은둔처에 배속되어 조용히 지냅니다. 안토니오가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그 침묵의 시간,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더 깊이 다듬으셨습니다. 그리고는 1222년, 포를리에서 열린 프란치스코회 사제 서품식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집니다. 강론을 맡을 사람이 없었던 거죠! 강론할 이가 없어 난처했던 그 자리에서, 은수원장은 숨어 조용히 지내던 안토니오를 불러 강론대에 세웁니다. 사람의 계산이 아닌, 성령의 때에 따라 마침내 그의 입을 열게 하신 것입니다.
처음엔 안토니오 성인도 극구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올라서야 했던 그는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와 겸손한 태도,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야말로 '말씀의 향연'이었습니다. 그의 강론을 들은 청중들은 "어디서 이런 분이 나타났지?"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진리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당시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까지 전해졌고, 처음엔 "신학 공부에 너무 매달리면 청빈한 삶을 잊을 수 있다"며 우려했던 성 프란치스코조차 안토니오를 만난 후에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하느님께서 선하신 계획에 따라 인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 젊은 수사들의 교육을 전담하게 됩니다. 이후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신학 교육을 가르치며, 많은 이들 사이에서 ‘설교의 스승’이자 ‘진리의 교사’로 불리게 됩니다. 단지 똑똑한 수도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지혜를 말과 삶으로 보여준 사람. 성 안토니오는 그렇게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말씀으로 길을 밝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왜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이 되었을까?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가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그의 생애에 얽힌 유명한 일화에서 비롯됩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성 안토니오의 소중한 책을 훔쳐 갔는데, 성인은 책이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도둑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책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성 안토니오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으로 신자들에게 널리 공경받게 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오가 생전에 겪은 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유래는 사실 볼로냐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일화에서 시작됩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던 안토니오 성인에게는 원고와 주석이 담긴 시편집이 매우 소중한 보물이었는데, 어느 날, 한 수련자가 허락없이 그 시편집을 가지고 수도원을 떠나 멀리 사라집니다. 당시 인쇄 기술이 없었으니 책 한 권의 가치는 지금의 스마트폰 몇 대보다 더 귀했습니다. 성인은 그 책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몰래 수도원을 떠나고 시편집을 가져간 수련자는 어느 날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수련자의 마음을 움직여주십니다. 곧이어 수련자는 다시 먼 길을 돌아와 시편집을 성 안토니오에게 돌려주고, 다시 수도생활로 복귀해 수도자가 됩니다. 이 일화는 안토니오 성인은 오늘날까지 ‘잃어버린 것을 찾게 도와주는 성인’이라는 신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고, 실제로 잃어버린 물건 외에도, 잃어버린 꿈과 희망, 잃어버린 가정 등 잃어버린 무언가로 헤매는 이들 곁에서 여러 체험을 통해 그분의 전구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이 신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 세계 많은 신자들이 일상에서 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집 열쇠, 휴대폰, 지갑, 묵주처럼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성 안토니오께 짧게 기도했더니 바로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흔합니다.
이런 실제 사례들이 쌓이며, 성 안토니오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 안토니오께 기도하면 찾지 못할 물건이 없다”고까지 말하게 된 것이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성 안토니오는 분실물을 찾아주는 수호성인으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널리 공경받게 되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 유해, 신약의 방주라 불리는 혀
안토니오 성인은 몽플리에와 툴루즈 대학에서 교수로도 활동했지만, 그의 진정한 재능은 강단이 아닌 강론대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성경의 비유와 상징을 알기 쉽게 풀어내, 듣는 이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의 설교를 듣고 감탄하며, 그를 '신약의 방주(Doctor Arca testamenti)'라고 칭찬했습니다.
1231년 6월 13일, 35세의 나이로 파도바에서 선종한 안토니오 성인은 그의 유언에 따라 산타 마리아 마테르 도미니 성당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1232년부터 그를 위한 거대한 대성당, 바로 지금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이 지어졌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신비롭습니다. 그가 선종하자 길거리의 어린이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리고 모든 성당의 종들이 저절로 울렸다고 하니, 이건 영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유해 중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의 혀만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후 1350년과 1745년 사이 시신이 발굴되었을 때도, 다른 부위는 부패했지만 혀만은 온전했다고 하니, 그가 설교에 담았던 진실과 은총의 힘을 상징하는 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의 혀는 지금도 거대한 유리관에 안치되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부산 대연성당은 2016년 6월 12일, 본당 설립 55주년을 기념하여 주보성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유해를 본당에 최초로 안치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기념을 넘어, 성인의 영성과 삶을 보다 깊이 되새기며 공동체가 그 모범을 실천하고자 하는 신앙적 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날 예식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수도회 한국관구장 윤종일 신부의 주례로 교중미사 중에 거행되었고, 유해 안치대와 함께 제대, 강론대, 해설대 역시 새롭게 봉헌되었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사제였던 김효근 신부는, “성인의 유해를 모신 것은 그분의 영성을 더욱 깊이 본받기 위함”이라 밝히며, 성 안토니오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서는 신앙의 길로 공동체가 나아가길 권고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 현상이나 기적에 기대는 기복적 신앙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며, 모든 성인의 공경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여정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합니다.
윤종일 신부 역시 강론을 통해 성 안토니오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영성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낸 인물임을 강조하며, 그 가난과 겸손의 삶이야말로 참된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묵상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아울러 본당은 유해 안치에 앞서 6월 11일,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최문기 신부를 초청하여 성인의 삶과 영성에 대한 특강을 마련함으로써, 유해 안치가 단순한 외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신앙 공동체 전체가 성인의 삶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통로가 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성인 공경이 어떻게 현대 신앙 안에서 살아있는 영성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인 유해 공경에 대해 굳이 덧붙여 첨언을 드리면,
성인의 유해를 공경하는 일은 단순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외적인 현상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우리 신앙 여정에서 성인을 삶의 동반자이자 영적 스승으로 모시는 태도가 바람직하겠습니다. 유해는 성인의 신앙과 삶을 되새기게 하는 물리적 표징일 뿐이며, 결코 신앙의 목적지나 궁극적인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성인 공경의 본질은 늘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 안에 있으며, 우리가 성인을 기리는 이유 또한 그분이 하느님께로 향한 삶을 충실히 살아내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간혹 이러한 공경이 '기복적 신앙'으로 흐를 우려도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 자신의 바람에 초점을 맞추게 할 수 있기에, 그 취지와 정신은 다시금 올바로 인식할 필요는 있습니다. 참된 성인 공경은 하느님과의 일치, 그리고 그분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가고자 하는 내적 열망과 순수한 지향에서 비롯되며, 성인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따르려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다면 하느님께서도 더없이 기뻐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또한 그러한 '겸손한 순례의 삶'을 살아내신 분이며, 전생애 안에서 특별한 표징이나 기적보다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한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저희도 성인의 유해 앞에 기도하며 머무를 때, 단지 어떤 바람의 성취보다 '하느님과 더 깊은 연결성'을 견고히 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으로 나아간다면, 성인의 삶은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도 살아 숨 쉬게 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안토니오 성인의 시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세속의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프란치스코회의 청빈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 속에서 살며 복음을 전했고, 신앙은 말보다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전적으로 응답한 그의 삶은 그 자체로 설교였습니다. 성 안토니오는 선종한 지 불과 1년 만인 1232년 5월 3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이는 가톨릭 역사상 드물게 빠른 시성이었으며, 그만큼 그의 삶과 기적, 신앙적 영향력이 매우 강력하게 인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명성은 출생지 포르투갈은 물론, 이탈리아 파도바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성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전구를 통해 분실물을 되찾았다는 신앙 체험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축일이 6월 13일로 정해진 이유는, 성인이 1231년 6월 13일 파도바에서 선종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전통에서는 성인의 축일을 일반적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즉 ‘천상 탄생일’로 기념하는데, 성 안토니오 역시 그 원칙에 따라 6월 13일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 날은 단순한 기념일을 넘어, 성인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이들이 기도와 묵상을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간을 갖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의 설교와 지식이 오늘날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중세를 대표하는 설교가이자 사목자였지만, 그의 설교와 지식은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 안팎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며, 다양한 영역에서 신자들의 신앙과 삶을 비추는 기준이 되고 있습니다.
설교의 모범
먼저. 성 안토니오는 무엇보다도 설교의 모범으로 널리 기억됩니다. 그는 탁월한 언변으로 복음의 핵심을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능했으며, 탁월한 설교가로서 그의 설교 방식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오늘날에도 설교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현대 설교자들은 청중의 삶과 현실에 맞는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성 안토니오의 접근법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교는 당시에도 많은 군중을 이끌었고, 회개와 삶의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진리를 전하고, 교리나 신학이 추상적인 지식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며, 신자들의 실제 삶 속에 복음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의 설교는 지금도 교회 강론자들의 중요한 참고 모델입니다.
신앙 교육과 영성
또한 성 안토니오의 설교는 깊은 성경 지식과 통찰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이자 학자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 능했고, 신앙 교육과 영성 형성에 필요한 핵심 원칙들을 강론 속에 녹여냈습니다. 오늘날의 신학자와 사목을 하고 있는 모든 분들 역시 성 안토니오의 방식에서, 신앙의 기초와 영적 성장의 기준에서 교육의 방향성을 찾습니다. 성경의 본질적 메시지와 실천적 가르침을 강조한 그의 유산은, 현대 교회가 신앙인의 삶과 공동체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와 개인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이끄는 그의 설교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말씀의 모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윤리와 실천
나아가, 그의 설교는 윤리적 실천을 강조한 점에서도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 사랑만을 강조하지 않고, 이웃 사랑과 공동체 내 책임, 사회 정의, 용서, 자비, 나눔 같은 실천적 덕목을 설교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며 목소리를 내는 데 큰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성인의 설교는 단지 듣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일찍이 강조했으며, 이는 신앙이 단지 개인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고 이웃과 사회에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현대 교회의 가르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복음 전파와 사명
특히 성 안토니오는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인물로도 평가받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 속으로 나아갔으며, 교회 밖의 거리와 시장, 광장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태도는 오늘날 교회가 디지털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새로운 청중에게 다가가는 선교 방식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성 안토니오의 설교와 지적 유산은 단지 과거의 모범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 움직이는 지침이 됩니다. 그는 말씀을 전하는 방식, 신앙 교육의 방향, 신앙과 삶의 연결, 그리고 복음의 창의적인 전달이라는 네 가지 측면에서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뚜렷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설교는 쉽고 명확해야 하며, 신학은 삶과 연결되어야 하고, 신앙은 반드시 사랑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며, 복음은 그 어떤 시대와 문화 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성 안토니오는 설교자이자 교사였고,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신앙의 실천가’였습니다. 그의 삶과 설교는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며, 말씀이란 결국 사람의 삶을 바꾸는 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의 출신 수도회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성 안토니오 디 파도바)는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Order of Friars Minor) 소속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는 원래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했으나, 모로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소식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프란치스코회로 전입하였고, 이때부터 ‘안토니오’라는 수도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으로 설교와 복음 전파,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에 헌신했으며,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했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출신의 대표적인 성인입니다.
성 안토니오가 속한 프란치스코회와 그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1195~1231)는 가톨릭 교회의 알려진 성인이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립한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Order of Friars Minor) 소속 수도자였습니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그는 본래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태어나 젊은 시절 아우구스티노 참사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했으나, 북아프리카에서 순교한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소식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프란치스코회로 다시 입회했습니다. 이 전환은 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고, 그는 이때부터 ‘안토니오’라는 새로운 수도명을 사용하며 본격적인 사도적 삶을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핵심 가치인 청빈, 겸손, 형제애, 그리고 사랑의 실천은 안토니오의 삶과 활동 전반을 이끌었던 영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성 안토니오는 특히 탁월한 설교가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단지 언변이 뛰어났다는 것을 넘어, 그는 당시 민중의 눈높이에 맞게 복음의 핵심을 쉽고 명확하게 풀어냈으며, 말보다 삶과 실천을 통해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이단으로 빠진 사람들을 되돌리고, 신자들에게 신앙의 뿌리를 깊게 내리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에게 "성서의 감실"이라는 찬사를 보냈고, 그가 남긴 《축일 강론》 등의 저술은 오늘날까지도 설교와 성서 교육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프란치스코회 내에서 이탈리아 북부 관구장을 역임하며 수도회의 성장과 조직적 안정을 도왔고,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거나 젊은 이들을 수도생활로 이끄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헌신했습니다. 성 안토니오의 활동은 단지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히 복음을 전하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 특히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는 설교할 때마다 단지 진리를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으로 이를 입증하려 했고, 이는 프란치스코회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성 안토니오는 청빈함 속에서도 지혜로웠고, 겸손함 속에서도 강력한 설득력을 지녔으며, 고요한 기도 안에서도 시대의 고통을 껴안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사역과 영성은 오늘날까지도 프란치스코회뿐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 교회 안에서 살아 있는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많은 설교자, 신학자, 수도자들에게 본보기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가 지향하는 이상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 중 한 명으로, 단지 말로가 아니라 전 생애를 통해 ‘복음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이 시대를 초월한 영적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기억해 둘 안토니오 성인 메모
✍️ 성 안토니오, 프란치스코회의 성인
원래는 아우구스티노회였으나, 순교자들의 삶에 감명받아 프란치스코회로 다시 들어가 성인이 되었습니다.
🎤 강론 잘하는 성인, 하느님의 설교가
안토니오 성인은 복음의 본질을 쉽고 명확하게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성령의 힘으로 전했습니다.
🛠️ 안팎에서 총명한 신학자
교황도 감탄하며 '성서의 감실'이라 불릴 만큼 깊이 있는 통찰과 저술을 남겼습니다.
설교부터, 관구장으로 수도회 조직과 성소 육성에 헌신까지 영성적인 면과 행정력 갖춘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한 실천가
가난한 이들 곁에서 말보다 행동으로, 복음 삶으로 '보여준' 성인이며,
그것은 성 안토니오께서 보여주신 프란치스칸 라이프였습니다.
🔑 한 줄 정리
“성 안토니오는 강론대에만 머문 성인이 아니라, 거리와 삶 한가운데로 내려온 복음의 얼굴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성 안토니의 기적은?
오늘날에도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기적의 성인”으로 불리며, 그의 전구(성인의 중재 기도)를 통해 많은 신자들이 기적을 체험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에는 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해 기도하며, 분실물의 회복, 병의 치유, 삶의 어려움 극복 등 다양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성 안토니오의 혀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썩지 않고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설교와 기적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신자들에게 큰 신앙적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과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성 안토니오에게 바쳐진 성당과 경당이 매우 많으며, 그의 전구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는 신자들의 간증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즉, 성 안토니오의 기적은 현대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신앙과 희망, 위로의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가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이유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기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 성인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안에서 성 안토니오의 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은총의 표징들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오늘날까지도 널리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전구로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았다는 증언뿐 아니라, 잃어버린 신앙의 열정을 회복하거나 질병으로 잃은 건강의 치유를 체험했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백은, 하느님의 자비가 성인의 삶과 일치를 통해 어떻게 오늘의 역사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러한 전구의 은총을 체험하는 이들이 늘어남에 따라, 어떤 이들은 농담처럼 “요즘은 예수님의 이름보다 성 안토니오를 더 자주 부르게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성인의 사명을 되새기게 하는 유쾌한 표현일 뿐이지만, 동시에 성 안토니오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일상 속 신앙 안에서 가까운 중재자로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 사랑에 철저히 응답한 존재로서, 신앙과 사랑, 겸손이라는 복음적 덕을 탁월하게 통합해 낸 증거로 평가받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실천했고, 그의 설교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그의 지혜에 감탄해 "성서의 감실"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교황 레오 13세는 그를 "전 세계의 성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지녔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을 통해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겸손한 삶을 살았습니다. 파도바 성당에 안치된 그의 유해를 찾는 순례자들은 지금도 기적을 체험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성 안토니오의 축복은 과거에서부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을 향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의 삶과 덕, 그리고 신자들의 신뢰와 기도가 함께 어우러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의 영성에서 얻는 하느님께 다가가는 일상 속 영적근력운동
※ 아래 내용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의 삶과 영성에 감명을 받아, 평신도의 관점에서 일상에 적용 가능한 실천을 창의적으로 구성한 묵상 자료로, 일상 속에서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 저(필로테아)가 개인적으로 실천하며 정리한 묵상 노트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공적 교도권이 승인한 공식 문헌은 아니기에, 개인 신앙 성찰의 보조적 도구로 사용해 주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기도와 성찰의 재료로만 활용해 주시길 바랍니다.
1. 위탁(委託) – 하느님께 맡기는 태도 훈련
무언가를 잃어버린 순간, 단순한 당황이나 짜증 대신 신앙인의 첫 반응은 ‘위탁’입니다. “주님, 지금 이 상황을 당신 손에 온전히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며, 사건을 나의 통제 밖에서 하느님의 섭리 안으로 옮깁니다. 성 안토니오의 전구를 청하는 것도 이 위탁의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이는 성인이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룬 이로서, 우리의 청원을 하느님께 바르게 전달해주는 중개자이기 때문입니다.
2. 성찰(省察) – '잃어버림' 속에서 하느님의 메세지 찾기
물건을 잃은 사건은 때로 우리 내면에 있는 불안, 소유에 대한 집착, 조급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성 안토니오처럼 하느님이 주시는 보다 깊은 은총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기릅니다. 잃어버림이 '단절'이 아니라 '초대'가 되도록, 침묵 속에서 감사할 점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과정은 단지 감정 정리가 아니라, 영적 민감성을 회복하는 실제적인 훈련입니다.
3. 나눔 – 회복된 평화를 '삶으로' 흘려보내기
회복된 내면의 평화를 다시 내 이웃에게 전하는 것으로 이 여정을 완성합니다. 작고 단순한 방식으로 나눔을 실천해 보세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부하거나, 누군가를 위한 짧은 기도, 작은 선행 하나도 충분합니다. 은총은 그 자체로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이웃에게 흘러야 할 사명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 실천적 기도 루틴
스트레스가 많은 날, 성 안토니오의 전구를 통해 마음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영적 습관
성호를 긋습니다 – 하느님의 이름 안에서 지금 이 시간을 거룩하게 구별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 “주님, 이 순간을 당신께 맡깁니다.”라는 기도로 상황을 위탁합니다.
성 안토니오께 전구를 청합니다 – “성 안토니오여, 잃어버린 제 마음의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전구 해주소서.”
묵상하며 되돌아봅니다 – 조용히 앉아, 오늘 안에서 감사할 순간을 되새기고, 하느님의 손길을 식별합니다.
사랑의 나눔을 계획/실천합니다 – 지금 가진 것을 나누고 싶은 사람 한 명을 떠올리며 작게 실천합니다.
📖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마음을 정돈하기 – 시편 묵상 제안
1. 오늘 하루, 마음에 와닿는 시편 말씀 한 구절을 선택하세요.
2. 그 구절을 5분간 반복해 소리 내어 읽거나, 조용히 묵상하며 호흡을 정돈합니다.
3. 종이에 써서 지갑이나 핸드폰 케이스 안에 넣어, 하루에 한 번은 꺼내어 다시 바라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내 길의 빛입니다.”(시편 119,105)
혼란한 날일수록,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은 마음을 치유합니다. 안토니오 성인처럼 말씀 안에서 평화를 찾습니다.
성 안토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오! 영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죽은 이를 부활케 하는 능력을 하느님께 받으셨으니
제 영혼을 깨워 열심하고 거룩한 생활로 부활하게 하소서.
오, 지극하신 안토니오여
당신은 성 교회의 참 빛이시며, 천상 진리의 빛이시니 제 영혼을 비추소서.
오! 자비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고통 중에 당신께 다가오는 자를 돕는 데에
언제나 빠르고 능하시니 제 영혼을 현재의 비애에서 도와주소서.
오! 능력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어려서부터 지옥의 원수를 이기기를 배우셨으니
제 영혼을 원수의 공격에서 막아주시고 혹심한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오! 지극히 정결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비할 데 없는 순결의 백합이시니,
불결의 지겨운 모병에 제 영혼을 결코 더럽히지 않게 하소서.
오! 사랑하올 천상 의사이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병자들이 당신의 전달로 건강을 회복하오니,
죄로 상처받은 제 영혼을 고쳐주시고 악한 경향을 바르게 하소서.
오! 지극히 충실하신 성 안토니오여,
풍랑 거친 인생 행로에 제 영혼을 지배하시어 영원한 구원의 포구까지 인도하소서.
오! 자애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인간 재판에서 유죄 선고받은 자들의 구속자시니, 죄의 올가미에서 제 영혼을 해방시켜 하느님의 심판
받을 무리 중에 들지 않게 하소서.
오! 참으로 기이하신 성인이시여,
몸에서 떨어진 지체들이 당신 전달로 다시 생명을 얻듯,
불신과 악습으로 떨어져 나간 지체들도 다시 성 교회에 결합시켜 주소서.
오! 지극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당신은 잃어버린 물건을 잘 찾아주시듯 저로 하여금 성총과 하느님 사랑을 잘 간직하게 하시고
잃어버렸을 때는 즉시 찾아주시어 다시는 잃지 않게 하여 주소서.
오! 사랑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젊으나 늙으나 모두 당신께 오는 이들을 허락하시듯 불쌍하고 가련한 제가 당신께 다가서오니
저의 사랑 들어 허락하소서
오! 인자하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위험이 제 영혼을 둘러쌌으니, 저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소서.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파도바의 당신 무덤 속에서 저의 사정을 굽어보시고 기묘하신 당신의 혀로 하느님께 아뢰어
마침내 위로받고 들어 허락하게 하소서.
오! 주님, 안토니오 성인을 공경함으로써 우리 안에 평화가 충만하고
몸과 마음이 굳세어져 영복을 받는 데 도움을 얻게 하소서.
(13일 간 위 기도를 매일 드립니다.)
안토니오 성인께 전구를 청하는 기도
잃어버린 이들의 친구이신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여,
저희가 찾지 못해 헤매는 잃어버린 ( 물건과 사람, 흔들리는 마음)을 주님의 자비 안에서 다시 찾을 수 있도록 전구 해주소서. 당신의 거룩한 혀가 여전히 속삭이듯 우리의 심령에 하느님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잃어버린 믿음과 식어 버린 사랑, 흔들리는 희망이 새 숨을 얻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하여 되찾음의 기쁨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비와 나눔의 길을 더 깊이 걷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안토니오 성인에 대한 필로테아 생각과 묵상노트
물건을 잃는 일은 익숙합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며 많은 것을 잃습니다.
지갑, 스마트폰, 차 키, 블루투스 이어폰, 우산. 어쩌다보면 세탁기에 들어있던 양말 한 짝도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더 자주, 더 깊이 잃는 건 따로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잃고, 감정을 잃고,
그리고 때로는 믿음, 그보다 더 본질적인—‘내가 누구였는지’를 잃기도 합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는데 익숙했던 얼굴이 낯설고,
기도문을 따라 읽지만 그 울림이 심장까지 닿지 않을 때—나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싶어집니다.
나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원했는지를 잊고,
한때 분명히 나를 이끌었던 뜻과 방향을 잃은 채
기도하는 손이 버겁게 느껴지고,
익숙했던 성당의 문턱이 낯설어질 때도 있습니다.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을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요.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직장, 통장 잔고, 사람들 사이에서의 역할.
수도자도 사제도 아닌 채, 매일의 생계를 염려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흔들리며,
믿음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틈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보겠다고 조심스레 팔을 뻗는 일은
가끔은 어쩐지, 세상과의 씨름보다 더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순간, "하느님께 맡기라"는 말이 더는 위로가 아니라
"그저 견뎌내라"는 말처럼 다가와
무력하고 무의미해질 때도 합니다.
그럴 때 문득 이런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지금 내가 잃어버린 건,
느님에 대한 믿음일까,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일까?
신앙과 삶의 균형일까, 아니면 그 균형을 지켜낼 힘이었을까?
혹은, 애써 주님을 붙들었던 마음과 의지의 감각이
무뎌지고, 희미해지다 어느새 ‘익숙한 무관심’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고도,
그 '잃어버림'조차 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 다시금 나아가도록 다가오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는 무언가를 '찾아주는' 마법사가 아닌, 우리가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바닥에 떨어진 나침반의 방향을 가만히 짚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저 역시 삶의 어느 순간 물건을 잃었을 때뿐만 아니라, 신앙의 감각마저 잃어버렸을 때—성인께 전구를 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도록 선명한 응답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은총 위에 분명히 자리해야 할 것은, 그 응답이나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이라는 것을 늘 깨닫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전구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응답이 ‘되찾음’이라는 형태로 드러날지라도,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언제나 단 하나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인을 통해 드러나는 은총은,
그저 나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다리일 뿐입니다. 다리는 멋지다고 칭송받기보다 조용히 건너가게 하는 것이 역할이지요.
그리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건넨 친절 하나,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올린 짧은 기도 한 줄이
세상을 조금 더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쪽’으로
이끌어가는 조각이 됩니다.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내 안에서 자라고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별들이 제자리를 지키듯,
성 안토니오 성인도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창 1,10) 하셨던
그 원형의 세상을,
우리의 무너진 마음 한가운데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복원하고 계십니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어떤 날은, 포기한 줄 알았던 일이 다시 열립니다.
이 모든 선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조용한 순간,
성 안토니오 성인의 전구가
당신 삶을 스쳐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여전히, 말씀의 방향으로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움직여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루를 겨우 시작하고, 별다른 희망 없이 지나는 사람들은, 겨우 믿음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로 되찾아주실 안토니오 성인께 청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느님의 말씀이 향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누구나 하루를 겨우 시작하는 날이 있습니다.
딱히 기대할 것도, 붙들 소망도 없이
그저 ‘살아내는’ 데에 온 마음을 쏟는 그런 날.
신앙이 있어도 흔들리고, 기도하면서도 공허하고,
때로는 그냥 믿는다는 사실 하나로 겨우 하루를 견디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해
큰 결심을 하지 않더라도
그저 조용히,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로
나를 되찾아주실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인은, 그렇게 잃어버린 마음 한 켠을 다시 하느님께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없이 전구를 청하고, 잠잠한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고 살아내다 보면 —
어느 순간, 잃었다고 생각했던 믿음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믿음의 회복 속에서
말씀과 함께하는 시간이 다시 내 안에 자리 잡고,
주님의 복음이 내 안에 씨앗처럼 살며시 심겨지는 시간을 되찾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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