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 축일 세상을 뒤흔든 광야 외침과 참수, 그 은총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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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말씀

세례자 요한 축일 세상을 뒤흔든 광야 외침과 참수, 그 은총의 흔적

by 필로테아 2025.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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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 축일 세상을 뒤흔든 참수당한 외침과 은총의 흔적

세례자 요한 축일 세상을 뒤흔든 광야 외침과 참수, 그 은총의 흔적

목차


세례자 요한 축일 , 그는 누구인가

세례자 요한 축일은 6월 24일로 가톨릭 교회 전례력 안에서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로 기념되며,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 특별한 인물을 기립니다.  예수님께 요르단에서 세례를 준 사람이자, 신약의 문을 열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신약을 열며 마지막 예언자로 ~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왔습니다. 도심의 회당도, 유대 귀족의 집도 아닌, 하느님께서 말씀을 위해 선택하신 장소는 황량하고 쓸쓸한 광야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낙타털 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생명을 이어가며, 아무 장식도 없는 외침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 그의 목소리는 메마른 땅을 가르는 겨울 강물처럼 날카롭고 맑았습니다. 그의 외침은 하느님께서 사람들 마음속에 오래전에 새겨두신 회개의 씨앗을 일깨우는 소리였습니다.

누구도 그를 빛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도 그렇게 불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둠을 뚫고 오는 새벽빛 같았습니다. 스스로 빛은 아니었지만, 빛을 준비하는 이였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이미 성령을 체험한 그는, 마리아의 인사를 듣고 뛰놀았으며, 그 만남은 구약의 마지막과 신약의 시작이 맞닿은 하느님의 시간이었습니다. 요한은 한 시대의 종말이자, 다른 시대의 서문이었습니다.

요르단 강가에서 그는 오직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세례를 주며 회개의 길을 가르쳤지만, 자신보다 더 큰 분이 오신다고 말하며 늘 뒷자리를 지켰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다.” 그 고백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정확히 인식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속으로 들어오셨고, 요한은 물러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으며,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자다.” 그 순간,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쳤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말씀이 육화된 순간을 직접 지켜본 사람. 그가 이 세상에서 한 모든 행위는 메시아의 길을 위한 포석이었으며, 이제 그는 서서히 무대에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력의 부정을 지적하였고, 헤로데의 불의한 결혼을 꾸짖었으며, 진리를 말했을 뿐인데 목숨이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잔치상의 사치와 욕망이 휘몰아치는 밤, 그의 목소리는 침묵당했고, 그의 머리는 은쟁반 위에 놓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외침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서도 일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은 끔찍했지만, 그의 사명은 완성되었으며, 그의 침묵은 더 큰 구원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드렸으며, 그 누구보다 앞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다리를 놓은 이. 그는 진정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으며,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진리를 증거하였습니다.

 

 

정리하면,

세례자 요한 축일은 6월 24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로 기념되며,  8월 29일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로 미사가 거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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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계획으로 태어난 세례자 요한, 그 외침의 흔적

하느님께서 거룩한 시간 속에, 나이 많고 아이를 가질 수 없던 엘리사벳 성녀와 즈카르야 성인에게 기적을 허락하셨습니다. 모든 시작에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고 하는데요. 세상의 시간과는 같지 않은, 오직 하느님의 섭리 아래 흐르는 은총의 때에 엘리사벳이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아이를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 성소에서 분향하던 즈카르야에게 가브리엘 대천사를 보내십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이름도 함께 전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 곧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의 이름이었는데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한 생명이 태어납니다. —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리고 이 아기의 탄생은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가족만의 인간적 기쁨보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시작하셨다는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족보

 

세례자 요한의 삶은 그 출생부터 남달랐는데요. 그의 삶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은총 안에서 시작되어, 성모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친족 관계였기에, 요한은 예수님과도 육적·영적 친밀성 안에서 연결된 인물이었습니다.

복음에 따르면,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태중에 아기도 뛰놀았다는 부분에서 요한은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기쁨에 찬 움직임으로 응답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아이였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인물이었습니다.

요한은 세상과 단절된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 고요한 광야에서의 삶은 세상적인 눈으로 열악하고 건조한 무채색이었을지 모르지만, 영적 시선아래 한없이 투명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들에서 메뚜기와 꿀을 먹으며, 그는 인간의 본능을 넘어 늘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무도 보지 않는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자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요르단 강을 따라, 회개의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의 선언은 하느님께서 마침내 사람의 마음을 부르시는 호소였습니다.

요한의 외침이자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돌보다 단단했고, 메마르고 갈급한 영혼에 처음으로 떨어지는 이슬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 때, 요한은 곧장 그분의 정체를 알아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하시어 그리스도의 오심에 맞춰 깨어 있도록 그를 준비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그의 입술은 떨렸고, 손은 뒤로 물러났지만, 하느님의 뜻이 그를 다시 앞으로 밀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세례를 베푸는 순간, 하늘은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하느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 역사적인 장면 속에서 요한을 세례자 요한으로 진정한 선구자로 남습니다.

묵주기도 '빛의 신비' 제1단에서도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심을 묵상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역설적이게도,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은 항상 평탄한 길을 걷지만은 않았습니다. 요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요. 그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의 부도덕함을 날카롭게 제시하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꾸짖고 주님의 뜻을 수행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신이 형제의 아내를 취한 것은 옳지 않소!”

그 한 마디는 그 시대의 권력자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헤로디아와 살로메는 결국 계략을 짜내고, 어이없는 맹세 하나에 의해 목이 잘리는 참수를 당합니다. 

그의 목숨은 칼에 멈추었을지언정,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그 외침은 역사 속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순교는 그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을 완성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곧게 내는 자'라고 말했는데요요.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기부정입니까.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자리를 지키며, 빛이 아닌 빛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기를 택한 사람.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믿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28)” 이 칭찬은 하느님께서 요한을 통해 신약 시대의 문을 여셨음을, 그리고 그가 구약의 마지막 불꽃임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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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오래전부터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섭리 속에서 세례자 요한의 삶을 두 번 기리는데요.

6월 24일은 요한 세례자의 탄생을, 8월 29일은 그의 순교를 기립니다. 이 기억은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 각자의 광야에 외침을 보내신다는, 아주 깊은 위로입니다.

 

 

 


세상을 뒤흔든 성 요한의 성품

요한의 성품

침묵 속에서 자라난 하느님의 사람

복음서는 요한의 어린 시절을 길게 다루지 않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간결하면서도 강한 한 문장으로 그를 설명합니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영이 강해졌다.”

이 한 문장은 요한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전,
먼저 하느님 앞에 서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표면적으로 조용했지만, 그 속에서는 믿음의 뿌리가 깊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경건한 신앙과 삶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물려받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 성실하고 절제된 일상, 정결한 영혼의 무게를 일찍부터 지닌 아이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장성한 후, 그는 광야로 나아갑니다.

이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단이었습니다.
요한은 그곳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두르며 살아갑니다.
이 모습은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며, 요한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전인적으로 응답했다는 상징적 행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에게 깃든 예언자의 성품

세례자 요한의 성품은, 그가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는 차원보다 어떤 내면의 태도와 신앙적 깊이를 지녔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린 요한 세례자

 

겸손함
요한은 자신을 따르려는 무리 앞에서도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이라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람들의 기대가 자신에게 쏟아질 때, 그는 오히려 그 기대를 꺾어버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로 돌립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 위치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철저한 자기부정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라는 고백은 요한의 영적 철학과 성품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물러날 줄 아는 아름다움을 지녔습니다.

 

예언자적 용기
성 요한 세례자는 불의한 권력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부도덕한 혼인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그 일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참수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습니다.

 

회개와 정의의 외침
요한이 베푼 세례는 그것은 삶의 전환을 요구하는 근본적 외침이었으며, 하느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라는 정직한 권고였습니다.
"회개하여라!"는 그의 말은, 인간의 양심을 깨우는 영적 울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뿌리, 사명의 열매가 되다

세례자 요한의 용기와 겸손, 맑고 흔들림 없는 내면은 그의 유년기에서 비롯된 신앙의 유산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었고, 그 섭리는 그를 광야로 이끄는 삶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세속의 소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마음을 드린 사람, 그리고 하느님의 길을 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장면은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마태오복음 3장, 마르코 복음 1장, 루카 복음 3장, 요한복음 1장—모두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에서 중대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공식적인 시작이자, 그분의 신원이 하늘로부터 선포되는 계시의 순간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 위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이 울려 퍼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그분께서 세상 구원을 위해 파견된 메시아임을 분명히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시편 2편과 이사야서 42장에서 예고된 하느님의 ‘아들’이자 ‘종’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인류의 구속 사명을 이루실 분임을 명백히 드러냅니다. 또한 이 장면에서 성부 하느님의 음성, 성자 예수님의 수세, 성령의 임재가 함께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온전히 계시되어, 교회는 이를 통하여 하느님의 본질적 관계성과 사랑의 역동성을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 없는 분께서 인류의 죄와 고통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신 겸손의 행위이기도 하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길로 초대받았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늘의 음성은 예수님만을 향한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과 기쁨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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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나 신약의 첫 목소리라고도 불립니다. 그에게  사람들을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기꺼이 그 어떤 영광도 거절하며 대답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말합니다. 요한은 자신의 존재를 하나의 ‘소리’로 규정했습니다. 자신을 철저히 제거하고, '하느님께서 오실 길'만 남기려는 철저한 비움입니다. 그는 마지막 예언자였고, 동시에 첫 번째 선포자로, 구약의 예언이 그의 입을 통해 닫히고, 신약의 복음이 그의 외침으로 열렸습니다.

이 경계의 자리에 서기란 지극히 고독한 일이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그 고요한 단단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마태 11,11) 그 말 한마디로, 하느님께서 요한을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지가 드러납니다. 요한은 위대한 기적이 아니었고, 단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모든 것을 내어놓은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겸손이, 곧 위대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외침에서 시작해, 침묵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조차 하느님의 말씀처럼 깊고 무거웠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요한처럼 겸손한 ‘소리’로 살아갈 수 있을까 싶습니다. 빛이 되려는 욕심보다, 빛을 향한 길을 곧게 내는 손이 되는 것.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줍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짤막 상식

1.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는 엘리사벳, 아버지는 즈카르야입니다.

2. 요한은 역사의 경계선에 선 인물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이자 신약의 선구자입니다.

3. 세례자 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사이를 열어준 영적 가교이자, 오직 하느님만을 향한 삶을 살다 간 예언자였습니다.

4. 교부들은 성 요한 세례자를 ‘새벽빛’으로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

세례자 요한의 죽음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자세히 보면,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되풀이되는, 권력과 체면, 그리고 침묵하는 대중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사건의 배경 – ‘비판을 견디지 못한 권력’
세례자 요한은 진실을 말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당신의 결혼은 잘못됐습니다.”
당시 유다의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의 남동생 필리포스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했는데 이는 유대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권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이 결혼을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한 사회운동가가 대기업의 탈세나 정치인의 부적절한 사생활을 폭로하는 상황 같은 것이 가끔 뉴스에 나오지요. 그 말이 옳을지라도, 그 권력자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분노합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을 단순히 비판자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요한은 자신의 명예와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였고,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야?’라는 자존심을 자극하는 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요한의 입을 막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립니다.

생일 연회 – 현실판 왕의 게임
그 기회는 헤로데의 생일에 찾아옵니다. 왕의 생일 연회는 지금으로 치면 정치와 기업, 권력자들이 모두 모인 초호화 VIP 파티였다고 할 수 있을까요. 거의 그런 스케일로 술이 돌고, 웃음이 가득하고, ‘체면’이 최고의 덕목인 그 자리에서, 헤로디아는 자신의 딸, 살로메를 무대로 올립니다.

 

살로메는 춤을 춥니다.
살로메의 춤은 모든 시선을 강탈하며 치명적인 퍼포먼스였나봅니다. "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마태 14,6)라고 복음에도 나오는데요. 왕의 마음이 흔들리고, 술에 취한 헤로데는 무엇이든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마태 14,7)

이건 오늘날로 치면, 회장이 한 연예인에게 취중에 말하길 “너 원하는 거 다 해줄게. 계약서 다시 쓰자.”라고 말한 상황과 비슷하지 않나요. 그런데 헤로데의 문제는, 그 말을 너무 공개적으로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살로메의 요청 – 침묵과 체면의 살인
살로메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묻습니다. “엄마, 무엇을 원하세요?”

헤로디아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와라.”
살로메는 그대로 왕에게 요청하는데요.

성경에는 '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8)'라고 나와있으니 엄청난 요청을 한 셈이지요.

왕은 충격에 빠집니다. 그는 요한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거든요.
하지만 그 말은 연회장에 울려 퍼졌고, 수많은 눈들이 '왕의 체면'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로데는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세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참수를 당합니다.
그의 머리는 쟁반에 담겨, 치명적 춤을 췄던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만약, 어떤 인플루언서가 소셜미디어에서 거침없이 정의를 말했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권력자들이 뒤에서 한 통의 DM으로 그 계정을 영구 정지시켜 버리거나 활동정지가 되도록 조치 안 하면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입은 닫혔고,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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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최후 인물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 모두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자, 수치를 분노로 돌려 ‘정당한 복수’라고 믿은 인물입니다.

오늘날엔 자신의 실패나 비판을 인정하지 않고, 지위를 지키기 위해 누구든 끌어내리는 사람들이 있지요.
살로메는 결정권이 없었던 '수동적인 존재'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무기로 사용했고, 결과적으로 도구가 되었든 아니든 죽음의 청부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팔로워’가 되어버리는 사람들, 누구의 말인지 모르고 퍼 나르는 댓글이나 좋아요나 리포스트(인용하기)에도 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헤로데는 진실을 알고 있었지만, 체면과 이미지 때문에 소신있는 행동을 하지 못한 인물입니다.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잃기싫어 진실을 외면하거나,조직에서 불의에 침묵하는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한. 그는 끝까지 말을 멈추지 않았고, 그의 올바른 외침은 죽음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죽음 이후에도 하느님의 말씀처럼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암살이나 같았지만, 신앙안에서 그 죽음은 ‘은총의 승리’와도 같이 여겨집니다.

가톨릭에서는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을 기억하며 8월 29일을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로 미사가 거행됩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

세례자 요한은 신약성경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한 위대한 인물로, 그의 삶과 사명은 네 복음서에 걸쳐 입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은 요한의 신학적 증언을 보다 심화시켜,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선포하며(요한 1,29), 그의 제자들이 이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또한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장소로는 요르단 강 동편 베타니아와 살림 근처 애논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요한 1,28; 3,23), 역사적 지리적 맥락까지 부여됩니다. 한편 요한은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부도덕을 꾸짖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살로메의 요청으로 참수되는 비극적인 순교를 맞이하게 되며(마태 14장, 마르 6장), 그의 죽음은 세상의 진리 앞에 불편함을 느끼는 권력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요한을 두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그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평하셨으며(마태 11,11), 이는 요한이 단지 예언자 이상의 인물—구약과 신약을 잇는 다리이자,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결정적인 인물—임을 보여주는 평가입니다. 결국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삶,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사명, 회개를 촉구한 예언자적 용기, 그리고 진리를 위해 죽음까지 받아들인 순교로 인해, 교회가 그를 경외하고 본받는 영적 거인으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탄생 예고와 신비로운 출생 (루카 1:5-25, 57-80)

루카 복음 1장에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 부모(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이야기, 요한의 출생과 이름 명명, 어린 시절 요한이 “영이 강해지며 광야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루카 복음 1장에서는 천사의 예고 아래 늦은 나이에 태어난 기적의 아이로서, 의로운 부모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잉태되고, 요한이라는 이름이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이 강조됩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이 강해져 광야에 머물렀다”(루카 1,80)고 전해지며, 하느님께 철저히 헌신된 삶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마태 3:1-12, 마가 1:2-8, 루카 3:1-20)

복음서들은 그가 유다 광야 혹은 요르단 강가에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외침과 함께 세례를 베풀며,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수행했다고 전합니다(마태 3장, 마르 1장, 루카 3장). 그는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칭하며(요한 1,23), 단지 자신의 명성을 위한 인물이 아니라, 오실 분(예수 그리스도)을 위한 길을 닦는 예언자로 자리매김합니다. 

 

마태복음 3:1-12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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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세례를 베풀다 (마태 3:13-17)

마태오 3장 이하에서는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베푸는 장면이 전개되며, 이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자다”(마태 3,17)라는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 이 사건은, 삼위일체의 신비와 예수님의 공생활의 서막을 알리는 결정적 순간이자,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3:13-17 (예수님의 세례)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강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며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이르셨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하늘이 열렸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또 하늘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메시아를 증언하다 (요한 1:19-34)

요한복음 1:19-28 (세례자 요한의 증언 )

19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29 이튿날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세례를 베푼 장소

요한복음 1: 28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감옥과 순교 (마태 14:1-12, 마르코 6,14-2, 루카 3,19-20 )

마태복음 14:1-12 

1 그때에 헤로데 영주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 시종들에게,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3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붙잡아 묶어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4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기 때문이다.

5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마침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자,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게 하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가져갔다.
12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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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세례자 요한 언급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평가하며, 요한의 예언자적 위상을 강조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루카 7,24-35)

마태오 복음 11,7-19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12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고,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13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14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15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17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하고,

19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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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예술 속 세례자 요한, 은총의 흔적은 어떻게 남았는가?

세례자 요한은 ‘광야의 소리’였지만, 2천년이 지난 오늘도 미술관의 캔버스·극장 스크린·콘서트 홀·도시의 골목에서 계속 말을 걸어옵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은 아기 예수 옆에 아기 요한을 배치해 구원의 예고를 그렸고, 근현대 예술가들은 그의 열정·비극·불편함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변주했습니다. 이 글은 가톨릭 신앙의 시각으로 예술 속 요한을 따라가며, 우리가 본받아야 할 요한의 영성을 짚어 봅니다.

 

광야의 외침, 오늘의 도시 한복판에 울리다

요한의 사명은 “회개하여라!”라는 외침이였지만 그 외침은 지금도 회색빛 도시에 균열을 냅니다. 그의 거친 낙타털 옷과 광야에서의 외침은 도시 한복판에서도 확성기처럼 우리를 뒤흔듭니다. 요한의 메시지가 ‘깨어남’이었기에, 돌아가신 교황 프란치스코는 요한의 삶을 준비 → 분별 → 작아짐이라는 세 동사로 정리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으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르네상스에서 ‘어린 예수와 어린 요한’ 이 등장하는 작품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1483~1520)의 '성모자와 아기 성 요한(마돈나 델 카르델리노)'에서 아기 세례자 요한과 아기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그림 속 성모님은 삼각형 구도의 꼭짓점에 자리하고 있는데요. 화면 상단에 위치한 성모의 머리에서 시선은 사선으로 흘러 내려가, 한쪽은 그녀의 발로, 다른 한쪽은 무릎을 꿇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닿습니다. 이 삼각 구도는 구체적으로 인식되지 않더라도, 전체적인 안정감과 조화를 이끄는 핵심 요소로 기능합니다. 삼위일체의 상징성과도 연결되는 이 구도는 회화적 완성도뿐 아니라 신학적 상징성까지 아우릅니다.

아기 예수는 성모의 보호 아래 자리하고 있으며, 아직 걸음마를 뗐을 법한 몸짓으로 세례자 요한이 든 작은 십자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으며, 이 장면은 존경과 복종의 태도, 그리고 메시아 앞에 선 예언자의 자세를 함께 보여줍니다. 두 인물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교감이 있으며, 동시에 위계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모의 표정은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어머니로서의 보호 본능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아는 이로서의 내면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풍경은 현실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평화롭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초원이 펼쳐지고, 그 너머에는 잔잔한 호수가 자리합니다. 작품에 전체에 걸친 조형감과 공간 배치는 매우 정교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단숨에 완성된 것이 아니며, 라파엘로가 수차례 습작을 거듭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의 손동작, 인물들의 자세, 옷 주름 등은 여러 번의 연습을 통해 다듬어졌으며, 이 과정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의 반복 연습과도 같습니다.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아기 성 요한'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아기 성 요한'

 이 그림은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머물던 1506년 무렵, 스물세 살의 젊은 나이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각자의 벽화를 준비하던 치열한 예술적 현장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성모자와 성 안나’ 스케치가 일반에 공개되면서, 화단은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라파엘로는 그들 사이에서 직접 경쟁을 벌일 위치는 아니었지만, 대가들의 기법을 흡수하고 자기만의 언어로 변형해 내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그는 서민들을 위한 성모자상들을 꾸준히 제작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넓혔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당대 사람들의 신앙과 일상, 기도와 희망이 담긴 장르로 기능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라파엘로는 성실한 태도와 꾸준한 시도로 주목을 받게 되었고,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바티칸에 초청됩니다.

이후 바티칸에서 그는 ‘라파엘로의 방’이라 불리는 공간에 여러 벽화를 남깁니다. 오늘날 바티칸을 방문하면 관람객 대부분이 향하는 두 곳—시스티나 경당과 라파엘로의 방—은 각각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이 담긴 핵심 장소입니다. 라파엘로의 그림이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이유는 기술적인 완성도뿐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를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단순한 성모자상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시각화한 신앙 고백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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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영화·음악에서 반복되는 세례자 요한 모티프

요한 세례자와 문학

T. S. 엘리엇의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1915)에서 화자는 “머리가 쟁반에 담겨 왔을 때도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중얼거리며 요한의 참수를 직접적으로 언급합니다. 이 성경적 비유를 통해 엘리엇은 프루프록의 자기검열과 예언자적 용기 부재를 강조하고, 독자에게 “당신은 진실을 외칠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문학·영화·음악에서도 세례자 요한 모티프가 자주 등장합니다

 

연극‧오페라

오스카 와일드의 상징주의 희곡 〈살로메〉(1891)는 욕망의 화신 살로메와 광야의 예언자 요한(조카난)을 정면으로 충돌시켜, 거룩함과 에로스의 극단적 대립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905년 이 작품을 동명 오페라로 옮겨 ‘일곱 베일의 춤’과 살로메의 네크로필리아적 독백을 음악으로 확장함으로써, 요한을 “권력에 불편한 진실을 들이대는 예언자”로 더욱 극적으로 부각했습니다.

 

영화‧뮤지컬 속 성 요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Godspell (1973)에서는 요한이 뉴욕의 분수대에서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를 외치며 젊은이들에게 즉석 세례를 베풉니다. 광야가 현대 도시의 한복판으로 옮겨지면서, 회개의 초대가 언제 어디서든 울릴 수 있다는 메시지가 시각적으로 선명해졌습니다.

 

대중음악

밥 딜런은 회심 직후 발표한 〈Gotta Serve Somebody〉(1979)에서 “누구든 결국 누군가를 섬겨야 한다”는 이분법적 가사를 던져, 요한의 급진적 선택 촉구를 블루스 록으로 재현했습니다. 

존레논 노래에 등장하는 요한 세례자
존 레논 은 데모곡 'Serve Yourself'에 모티프로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

 

이에 존 레논은 데모곡 〈Serve Yourself〉(1980)로 응수하며 “스스로를 섬겨라”는 냉소를 퍼부었고, 평론가들은 이를 딜런의 복음성뿐 아니라 요한적 직언 자체에 대한 반(反)응답으로 해석합니다.

이처럼 시, 희곡, 오페라, 영화, 록 음악은 모두 “외치고, 충돌하며, 선택을 요구하는” 세례자 요한의 영성을 각기 다른 예술 언어로 되살려 왔습니다.

 

예술 속 도상학, 요한 세례자 작품 속 구원의 표징

Saint John the Baptist" Leonardo da Vinci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요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하늘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의 '성 요한(Saint John the Baptis)' 작품은 묘한 미소와 하늘을 가리키는 손짓으로 “나를 보지 말고 그분을 바라보라”는 요한의 역할을 압축합니다.

 

양·십자가 막대·낙타털
중세·르네상스 화가들은 책 위에 놓인 어린양, 깃발 달린 십자가 막대, 그리고 낙타털 옷으로 요한을 식별했습니다. 이는 ‘세상 죄를 없애실 어린양’을 지목하고, 구약의 엘리야적 예언을 잇는 표식입니다.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

순교의 피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는 캔버스에 실제로 서명처럼 피줄기를 그어 넣어 ‘피로 쓴 복음’을 시각화했습니다.

몰타 발레타의 성 요한 공동대성당 오라토리움에 걸린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 작품은 높이 361 센티미터, 너비 520 센티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유화로서, 캔버스를 마주하는 이를 감옥 안뜰 한복판에 내던지는 무정한 사건 기록입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광휘보다 정적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배경은 푸석한 석회빛 벽으로 눌려 있어 하늘도 통로도 사라지고, 관람자는 출구 없는 사형장에 갇힌 채 현장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림 중심에는 이미 목이 거의 잘린 세례자 요한이 돌바닥에 엎드려 비스듬히 몸을 비틀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잘린 동맥에서 흘러나온 피줄기는 바닥 틈을 따라 흐르다가 ‘f. Michelang.o’라는 서명을 형성합니다. 이는 작가가 남긴 유일한 자필 서명이자, 성인의 피와 화가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붉은 돌출부로 결속시킨 행위로, 미학적 장식이라기보다는 “나는 여기에서 이만큼밖에 말할 수 없다”는 냉담한 고백으로 읽힙니다.

 왼편에는 칼을 다시 꺼내 든 사형 집행자와 금빛 쟁반을 가리키는 관리, 머리를 움켜쥔 늙은 여종, 그리고 쟁반을 들고 서 있는 살로메가 차례로 선형 배열을 이루며, 각각의 몸짓으로 사적인 감정 대신 공적 절차의 기계성을 드러냅니다. 오른편 창살 뒤 두 죄수는 몸 전체를 숨긴 채 고개만 내밀어 장면을 엿보는데, 그들의 침묵은 캔버스 너머 우리 쪽으로 기울어 관람자에게 '당신은 방관자인가, 공조자인가'라는 질문을 흘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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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이 작품을 제작한 1608년, 카라바조는 기사단에서 곧 추방될 위기에 놓여 있었고, 살인 혐의로 로마를 떠난 도피자 신세였다는 점은 피로 쓴 서명을 일종의 자백문으로도 읽히게 합니다. 이 그림은 교리나 연민을 앞세우지 않고 사건 그 자체만을 무심히 드러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목이 잘리는 순간조차 시간을 멈춘 듯 고요하고, 빛은 찢긴 살과 돌바닥 사이로 침투해 흉터처럼 공간을 가릅니다. 관람자는 두 창살 죄수 옆에 어깨를 끼운 듯한 위치에서 이 정적을 함께 견뎌야 하므로, 작품은 예배용 제단화라기보다 부조리의 현장 증거물이 됩니다.

 죽음의 냉기와 절차적 폭력이 완결된 자리에서 남는 것은 목소리를 잃은 예언자와 목격자인 우리 사이에 흐르는 무력감이며, 이는 신앙이 제공하는 안온함 대신 인간 존재에 내재한 부조리를 끝까지 직시하도록 합니다. 이 '세례자 요한의 참수'는 거대한 캔버스를 통해 신앙과 제도, 폭력과 침묵을 동일한 어두운 피로 연결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돌려도 따라붙는 사건의 냄새로 끝내 해석을 거부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오늘날 현대에 본받을 성 요한의 영성에 대한 필로테아 묵상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옛 시대 위대한 성경 속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보기보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였고, 사람들 앞에 나아가 두려움 없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외친 모습일 것 같습니다. 당시의 권력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이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던 진실을 그는 가감 없이 말했고, 그러한 그의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환영받는 것이 아니었고, 요한은 정치 권력에 의해 침묵당합니다. 그의 죽음은 한 여인의 분노, 한 권력자의 비겁함, 한 연회장의 퇴폐적인 쾌락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결코 허망하거나 잊혀진 것이 아닐것입니다.

 헤로데는 일시적인 권력을 쥐었고, 그의 명령으로 요한은 세상을 떠났지만,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의 삶과 죽음은 오늘까지 살아 있습니다. 권력은 잠시지만, 진실은 끝내 이깁니다. 역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적 증언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교회는 그를 ‘주님의 길을 준비한 이’, ‘광야의 소리’, ‘최후의 예언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모습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큰 울림을 줍니다.

오늘날도 지금 정치 권력뿐 아니라, 경제, 문화, 미디어, 심지어 종교라는 이름의 권력까지 여러 겹의 영향력 속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권력은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공동선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그런 현실 안에서 눈을 감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기준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침묵해야 할 때 말하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보여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하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나타나자 “이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정확히 지목하며 자신은 작아지고 조용히 내려섭니다. 요한의 영성은 바로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지만, 그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은 작아지고 그리스도만 드러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그의 말은 오늘날 모든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좌표가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소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정보는 넘쳐나고, 자극은 끊임없으며, 타인의 시선은 쉼 없이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광야는 우리의 마음, 영적 선택입니다. 광야로 나아가는 삶이란 세상과 내면의 소음을 끄고, 세상의 기준 대신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겠다'는 다짐이지 않을까싶습니다. 스마트폰을 끄고, 성당 한 귀퉁이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며,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같습니다. 또한 요한이 보여준 분별의 지혜도 오늘날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세상에는 진실처럼 보이는 말들이 많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그 안에서 무엇이 참된 복음이고, 어떤 삶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능력 없이는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요한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민감했으며,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알아보는 영적 눈을 지녔습니다. 우리 역시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그러한 감각을 키워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은 작아지는 삶의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든, SNS를 통해서든, 스스로를 부각시키고, 인정받고, 그 칭찬받으려는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도구'일 뿐이며, 중심은 오직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자세는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영성아닌가 싶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늘도 우리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살아 있는 손가락입니다. 이번 한 주, 하루를 정해 스마트폰을 끄고, 조용한 곳에서 ‘광야의 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준비하고, 분별하며, 작아지는 시간을 통해 우리 역시 요한처럼 하느님의 뜻 안에서 나 자신을 놓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하느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그 삶 안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있다는 것을 요한은 삶 전체로 증언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 이제는 우리가 그 증언을 이어갈 차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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