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월 12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2024)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월 12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2024) 연중 제6주간 월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1.
반응형

 

2024년 2월 12일 월요일

[연중 제6주간 월요일]

 

2월12일매일미사

반응형

 

 

 

 

제1독서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리하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다.>


▥ 야고보서의 시작입니다. 1,1-11
1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세상에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에게 인사합니다.
2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3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4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5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6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7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9 비천한 형제는 자기가 고귀해졌음을 자랑하고,
10 부자는 자기가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1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와 같이 부자도 자기 일에만 골몰하다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복음

2월12일 매일미사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반응형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반응형
 
 

 

 
 

 

 

2월12일 오늘의묵상

오늘의 묵상

"신은 없을까"

하느님께서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주님의 기도)라고

기도하며 매일 의지하기를 원하시는 이유

(해당 제목은 제가 묵상글을 읽고 임의로 지은 것입니다. - 필로테아)

 

체코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는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가장 큰 차이가 '인내'임을 통찰합니다. 신앙인이나 무신론자나 똑같이 하느님의 부재를 느낍니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에도 침묵을 하시는 하느님을 설명하려고 무신론자들은 “신은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은 명확한 답을 바로 얻고 싶은 무신론자들의 성급함에서 나온 결론 니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신앙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대응합니다. 바로 '인내'로 견디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 신비의 오묘함과 우리 삶의 모호함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인내로 기다립니다. 모든 것이 명백한 곳에서는 신앙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모호하고 불분명한 곳에서 요구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느님, 차갑고 어두운 밤, 불확실 한 삶 안에서 신앙이 드러납니다. 그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신비와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가르칩니다.

 

반응형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과 희망은 바로 불분명한 순간에 드러나는 우리의 인내입니다. 제1독서에서 야고보는 삶의 시련에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시련을 잘 받아들이면, 그 안에서 인내가 생겨날 것입니다. 인내와 함께 우리의 믿음은 더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을 단단하게 하여 주는 이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인내심 없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표징을 바랍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눈으로 확인하고 비로소 이해하려는 그들의 모습은, 무신론자들과는 다르지만, 인내심 없이 명확함을 바라는 성급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들에게 표징을 주지 않으시고 인내와 진정한 믿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뜻이 무엇인 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시는' 성모님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반응형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지혜가 모자라면 청하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베푸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모자라고 청할 것이 지혜뿐이고,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 지혜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모자라는 것투성이고, 그러니 우리는 청할 것을 특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 좋은 거라면 뭐든 청해도 되고 하느님께서는 너그럽게 주십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주신다고 하는데 이 말을 바꿔 이해하면 하느님은 은총의 하느님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하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신다고 그 은총이 다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는 것인지, 그 은총이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다시 말해서 은총을 완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이 오늘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은총의 완성은 실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이 우리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게 하려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이것이 야고보서가 줄곧 주장하는 바이며 우리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얘기하는 바입니다. 개신교가 비판하듯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있어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과 공로가 은총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실천은 주신 은총에 대한 합당한 노력입니다. 밥을 주십사 청하면 하느님은 밥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밥을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빈둥빈둥 놀면 그 밥은 우리의 힘이 되지 않고 살만 찌개하고 비만만 되게 할 뿐이지요. 밥이 우리의 힘이 되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써야 합니다. 여러 차례 말씀드렸듯이 힘들다는 말은 힘이 들어온다는 말인데, 밥이 힘이 되어 들어오게 하려면 힘들어도 힘을 쓸 때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인내 또는 인내력이 어떻게 생기는지 얘기하는데 그 골자는 시련 없이 인내는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말이기도 한데 너무도 당연한 말입니다. 인내라는 것이 본래 싫어하는 것, 고통, 시련을 견뎌내는 것이지, 좋아하는 것, 즐거움, 순탄함은 견디지 않고 그저 즐기고 누리는 법이지요. 요즘 인내하는 힘들이 갈수록 떨어집니다. 역경에 조금만 처해도 쉽게 Burn out이 됩니다. Burn out을 우리말로 무기력증이라고 번역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풀어서 얘기하면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어느 순간, 심리적 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되고 육체적으로도 무기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렸을 때부터 역경을 적당히 견디는 힘을 길렀어야 하는데 자식을 너무 사랑하여 그 나이에 맞는 역경을 겪지 않아도 되게 부모가 과보호했고 역경을 피해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는 힘이 세다고 하지요. 맞는 말이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아니, '과잉 사랑'을 받아 힘든 것은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고 컸다면 그 사랑의 결과는 완성이 아니라 실패이고 밥을 먹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아 비만이 되듯 사랑도 비만이 될 것입니다. 사랑이든 은총이든 많이 받았으면 많이 실천해야 사랑 비만 은총 비만이 되지 않고 완성될 것입니다.(김찬선 레오나르도신부님)

 

 

 

 

반응형

 

 

 

 

 

예닮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행복하여라, 지혜로운 이들!"

 

 

"Every human person is a precious gift of God"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다)

어느 책 서문, 교황님의 지극한 평범한 서두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없애는 말씀의 빛, 하느님이 지혜인 예수님입니다. 부단히 자기를 넘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아초월의 여정, 예닮의 여정을 통해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사람, 지혜로운 사람, 자유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 부요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진정한 부자는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가장 적은 사람입니다. 예수님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진정 부자입니다. 아주 오래전 써놓고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시가 생각납니다. 이 시로 한 달간은 행복했습니다. 24년 전 짧은 자작시인데 방금 생각이 났습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

 

『이수철 신부님 (자작시), 2000.4.20

 

아마도 수도 형제들 다 엠마오 산보 떠나고 수도원 집을 지키던 부활절 다음날 썼던 시일 것입니다. 하늘을 담아, 하늘을 닮아 행복한 부자처럼 보이는 작고 낮게 위치한 땅에 바짝 붙어있는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 샛노란 민들레꽃이었습니다. 교회학자 성인 축일에는 이들의 지혜를 기립니다. 학식은 물론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뿌리내린 지혜로운 진리의 연인들이 진짜 교회학자들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다음 독서는 늘 고무적입니다.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 (지혜 7,13-14)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주님과 깊어가는 우정과 더불어 주님의 벗이,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요즘 들어 자주 생각하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 4,47) 이와 더불어 내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 년 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점검하는 것입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아마도 해지는 죽음의 시간을 오후 6시로 할 때 오후 4:30분,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초겨울쯤 되지 않겠나 수차례 인용하여 나눴던 예화입니다. 이런 수행이 참으로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삶의 환상이나 거품, 교만이나 집착이 말끔히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인생휴가 얼마 안 남았는데 새삼 무슨 휴가인가 하는 생각에 이미 휴가를 접은 지 수십 년이 지난 수도생활입니다. 얼마 전 써놓은 '인생휴가'라는 시입니다.

 

 인생휴가

 

아버지의 집에서

  휴가 나온/인생인데

             남은 휴가/얼마/안 남았는데

                             지상에서의 삶자체가/날마다/휴가인데

          죽으면 영원한 휴가인데

새삼 웬 휴가?

       날마다/휴가처럼 사네

 

『이수철 신부님 (자작시), 2023.8.9.  

 

어제 읽은 성염(요한 보스코) 교수 부인 전순란 자매의 글이 생각나 인용합니다.

'요즘 보스코가 마루에 피어난 꽃들을 부쩍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꽃을 좋아했어도 좀 낯선 버릇이라 "무슨 일이죠?" 물으니, "남은 날이 적어지니까 풀꽃 하나도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지 몰라. 보고 볼수록 신비롭기만 하거든." 이 대답, 열심히 눈에 담아 놓았다, "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씀드릴 준비 중인가 보다.

 

반응형

 

 

우리 옛 선비들도 참 지혜로운 성인급의 학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 요한의 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읽기 버거운 책이 누구에게나 한 권쯤 있다. 독서는 그와 마주하는 경험이라야 한다." 제게는 평생 독서의 대상인 성경이 이에 속합니다. "위로는 성현(聖賢)을 뒤따라가 짝할 수 있고, 아래로는 백성(百姓)을 깊이 깨우칠 수 있으니, 독서야 말로 우리 인간이 해야 할 본분이다." 다산의 「여유당전서」에 나오는 글입니다. 무지에 대한 해결책으로 평생독서와 평생공부를 참 많이 강조한 다산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고질적 마음의 병이 무지입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의 병에는, 죄에는, 악에는 답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지혜의 주님과 무지의 바리사이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어 방금 4천 명을 먹이신 주님의 기적의 하늘 표징을 목격하고도, 예수님 당신 자체가 하늘의 표징임을 모르고 시험하려 유혹하는 바리사이들에게 깊이 탄식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 자체가 빛나는 하늘의 표징이요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서도 무수히 발견되는 하늘의 표징들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이들 무지한 이들을 버려두신 채 지체 없이, 단호히 당신 삶의 여정에 오르는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납니다. 오늘 제1독서 야고보서에서도 예닮의 여정에 충실했던 야고보 사도의 지혜가 보석처럼 빛을 발합니다. 시련과 관련된 인내와 지혜와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 빈부(貧富)에 대한 가르침이 마음 깊이 각인됩니다.

 

반응형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 인내가 완전한 효력을 내도록 하십시오. 그러하면 모든 면에서 모자람 없이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정주의 믿음, 정주의 인내를 통한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대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이런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어떠한 길을 걷든 안정을 찾지 못합니다." 갈림 없는 마음으로, 한결같은 믿음으로 한결같이 항구히 주님께 청할 때 선사되는 지혜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예닮의 여정도 실현됩니다. 빈부에 초연함도 탁월한 지혜입니다.

 "비천한 형제는 고귀해졌음을, 부자는 비천해졌음을 자랑하십시오. 부자는 풀꽃처럼 스러질 것입니다. 해가 떠서 뜨겁게 내리쬐면, 풀은 마르고 꽃은 져서 그 아름다운 모습이 없어져 버리니 바로 부자가 자기 일에 골몰하다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많이 지녀서 부자가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부자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최소한도의 의식주에 주님만으로 행복하고 부유한 자가 빈부를 초월한, 무지의 탐욕에서 해방된 참 부자요 복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 할 때 주님을 닮아 참으로 아름답고 지혜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의 실현이겠습니다. 제 좋아하는 예닮기도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반응형

 

 

 

 

 313년 로마 제국이 종교 자유를 허락하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성직자들에게 병역 면제, 세금 면제 등을 베풀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재산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특히 종말을 걱정한 부자들은 유산 대부분을 교회에 기부했고, 가난한 사람도 죽을 때 구원을 위해 교회에 전 재산을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재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이를 통해 교회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심각한 세속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발 빠른 사람은 자기 자녀를 성직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성직매매를 통해서입니다. 당시의 교회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헌금을 받아 부자가 된 주교들은 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으며 호화스럽고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그들이 벌인 잔치는 로마 제국 황제의 잔치들보다 더 성대했다." 종교 자유는 분명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종교는 부패했고,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편하고 쉬운 세속화에서 찾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런 세속화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반응형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랑의 하느님은 그런 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보고서 믿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세상의 기준을 통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들은 절대로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것, 빵의 기적 등을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자기들 앞에서 직접 표징을 행하라고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태도이며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과거 종교의 자유로 세속화가 이루어지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졌던 것처럼, 세상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불신의 마음이 하느님과 절대로 함께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말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믿음은 세상 것에 기준을 내세울 때 절대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기준을 맞출 때 비로소 믿음이 생기고 계속된 하느님의 놀라운 표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