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2024년)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2024년) 연중 제6주간 화요일

by 필로테아 2024. 2. 11.
반응형

2월 13일 매일미사
2월 13일 매일미사

 

반응형

 

 

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

 

2월 13일 매일미사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1,12-18
12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13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14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15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16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17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분께는 변화도 없고 변동에 따른 그림자도 없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반응형

 

 

 

2월13일 미사
.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월 13일 매일미사

 

 

 

반응형

 

 

 

2월 13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놀라운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들도 빵을 나누고, 또한 남은 빵을 모으며 이 기적에 직접 참여하고도 주님의 권능을 의심합니다. 그들은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먹일 빵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체험한 기적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 닌데도, 그들은 불안해하며 수군거립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놀라운 권능을 보고도 왜 여전히 주님의 권능을 의심하고 불안해할까요? 자신이 체험한 것 을 기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반응형

 

우리도 삶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일을 체험하면서도, 막상 비슷한 어려움에 맞닥뜨리면 주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합니다. 주님 체험에 대한 기억이 그토록 강렬한데도, 계속 돌이켜 생각하거나 쇄신하 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많은 것을 체험하고도 이를 계속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버리고, 그런 체험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처 럼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의 권능을 체험하여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눈 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라는 예수님의 꾸짖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체험은 축복입니다. 어떤 계기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하는 은총을 체험하지만, 그 체험이 단단한 믿음과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개하기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갑니까? 기억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마침내 구원으로 이끕니다. 미사 가운데 언제나 최후의 만찬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듯이, 우리 삶에서 베푸 신 주님의 은총을 늘 기억합시다. 그 기억이 우리 마음을 하느님께 열고 의탁하게 하는 용기와 희망을 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반응형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

2월 13일 매일미사

 

불안하고 걱정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뒤처지는 것 같고, 나중에 이러저러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계획을 세운다.

 성경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연구결과도 우리의 걱정 중 거의 대부분이 안 해도 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잘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본래 사람은 늘 불안해하고 걱정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그 고백에 참으로 공감한다.

 

"내 영혼은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 불안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빵을 가져오는 걸 깜빡한 것 같다. 예수님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누룩이란 말에 빵이 없는 걸 걱정했다. 예수님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것이 아닌데 그들은 그것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걱정이 더 커졌다. 그런 그들에게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켜 주셨다. 그때도 제자들은 그곳은 외딴곳이고(마르 6,35)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마태 14,17),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뿐이라고(마태 15,34) 했다. 그들은 그들의 결핍에 집중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의 연민에 집중하셨다. 당신을 따라다니던 이들이 배고파 쓰러질 것을 염려하시며 그들을 먹이는 것만 생각하셨다. 이번에도 빵이 아니라 바리사이와 헤로데 같은 마음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세상 걱정 없는 극단적인 낙천주의자여서가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빵 걱정은 안 하셨을 거다. 먹고 입어야 사는 줄 아버지 하느님이 다 아신다고 믿으셨다. 먹고 입는 것뿐 아니라 돈도 있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아신다고 믿는다.

 

 

반응형

 

 

 내 불안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 같다. 생명을 잃게 될까 봐 내 존재를 잃어버릴까 봐 불안하고 걱정된다. 여기서는 영원히 살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데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걱정한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하느님 말씀을 전해주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 말씀을 지켜야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내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면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피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을 사랑해서 그분 안에서 영원히 산다. 그런 그에게 죽음은 단지 강을 건너감에 불과하다. 신앙이 행사가 아니라 기도와 말씀 안에 머무름이 되기를 바란다. 행사를 한다면 그 시간이 하느님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친교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예수님, 그날 배에 하나밖에 없던 그 빵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전처럼 빵을 만들어내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쓸데없는 걱정에서 해방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겨 이 지긋지긋한 불안을 미워하지 않고 그냥 무심히 데리고 다니게 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더 친해지게 도와주소서. 아멘."

 

 

 

 

반응형

 

 

 

2월 13일 매일미사

 

깨달음 예찬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뿐이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사랑,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시편 37,3)

 

"괜찮아 힘내!" 제가 고백성사 후 보속시 말씀 처방전에 자주 찍어 드리는, 깨달음의 지혜를 반영하는 스탬프의 말마디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의 은총에 깨달음의 사랑이요,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살아있는 한 계속되어야 할 깨달음이니 말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깨달음이 끝날 때 곧장 꼰대가, 부패인생이 뒤따르고 치매가 들어올 것입니다. 깨달음 역시 성령의 은총임과 동시에 부단한 의식적 훈련입니다. 모든 종교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강조되는 바 깨달음입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맹자의 말씀도 깨달음의 지혜를 반영합니다.

 

"무수한 이야기들을 짜임새 있게 담아낸 것이 간결함이다.

그래서 간결함의 유의어는 단순함이 아니라 탁월함이다."

다산 」

 

"널리 배우고 자세히 말하는 것은 나중에 돌이켜 요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맹자

 

불교 고승들의 깨달음을 노래한 무수한 오도송(悟道頌), 열반송(涅槃頌)들의 시입니다. 옛 선비들의 한시(漢詩)들, 옛 사막교부들이나 불교 선사(禪師)들의 일화들 대부분 깨달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문득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듣고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논어 이인 편(里仁篇)에 나오는 공자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가 수도생활 중 무수히 쓴 시들 대부분 역시 깨달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중 '하늘'이라는 짧은 자작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 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하늘, 이수철신부님, 1997.2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공감하는 시공을 초월한 진리가 깨달음의 시적(詩的) 진리입니다. 바로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기도의 교과서란 칭하는 우리의 시편집입니다.  참 기쁨도 참 행복도 깨달음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깨달아 알아갈수록 참 나를 깨달아 알게 됨으로 구원의 참 기쁨이요 참 행복입니다. 참으로 내적 성장과 성숙의 삶은 깨달음의 여정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인간을, 자연을, 주변의 관계되는 모든 현실을 깨달아 알아가면서 자유로워지고 순수해지고 단순해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고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참나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깨달음과 더불어 내적치유이자 자유로움이나 깨달음의 여정은 그대로 치유의 여정, 힐링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대부분 인간 불행이나 비극은, 병고는 무지에서 기인하는 바 무지의 힐링에 깨달음의 약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깨달음뿐임을 깨닫습니다.

 

 

반응형

 

 

회개의 여정이라 함도 회개를 통한 깨달음의 여정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모든 공부도 결국은 깨달음의 지혜를 위한 공부임을 알게 됩니다. 지식 축적에만 끝나는 헛된 공부가 아니라 지혜로 전환되는 공부가 참 공부입니다. 공부의 기쁨, 배움의 기쁨은 깨달음의 기쁨으로 이어져야 참 공부, 참 배움입니다. 수도자들이 하루하루 평생 매일 바치는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의 시편들, 거의 모두가 깨달음을 노래한 시들입니다. 매일 깨어 노래로 바치는 이런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야 말로 참 좋은 깨달음의 훈련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바, 깨달음의 선택과 은총에 이어 깨달음의 훈련, 깨달음의 습관화보다 이상적인 영적 삶도 없습니다. 참으로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이러니 깨어있음, 깨끗한 마음, 깨달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깨달음의 훈련이 바로 가톨릭 교회의 공동전례입니다.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반복의 훈련"은 그대로 “기억의 훈련”과도 통하니, 치매 예방에 이보다 더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반복의 훈련이 진리이자 답입니다. 영성생활도 반복의 훈련으로 요약됩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반복의 훈련에 충실해야 할 기도요 공부요 노동이요 수행입니다. 단순한 생각 없는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반복이기보다는 늘 새로운 반복, 거룩한 반복, 깊어지는 반복입니다. 이래야 멋지고 아름다운 정주의 삶에 영성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달음이요 깨달음 예찬의 강론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응형

 

 

고귀하고 품위 있는 삶의 우선적 필수적 요소도 깨달음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람만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훈련이, 깨달음의 기쁨이 사라질 때 서서히 꼰대가 되고 치매가 오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고 참되고 아름답고 놀랍고 사랑스럽고 새로운지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대부분 시편들입니다. 새삼 성서의 예언자들을 비롯한 우리 예수님, 그리고 사도와 제자들,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 한결같이 "깨달음의 대가"이자 "깨달음의 달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당대의 무지한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자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깨달음의 대가이자 깨달음의 달인입니다. 이래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뿐이라, 이 거룩한 미사은총뿐이라 고백합니다. 부패와 타락의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도 명심해야 합니다. 

 부패와 타락의 누룩으로 인한 악취나는 부패인생의 전개입니다. 한결같이 깨달음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향기 좋은 발효인생이 됩니다. 깨달음의 훈련은 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얼마 전 빵의 기적을 잊어버려 기억하지 못하고 수군대는 제자들에 대한 참 스승 예수님의 질책이 고맙습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는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빵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배불리 먹였을 때 얼마나 남았었는지 다시 환기시키며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거듭 제자들의 무지를 일깨우며 깨달음을 촉구합니다. 이런 일련의 배움의 과정을 통해 제자들의 깨달음도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 스승 예수님께 그 제자 사도 야고보입니다. 오늘 복음에 대한 주석 같은 제1독서 야고보서간에서 보다시피 야고보가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은총하에 얼마나 치열하게 깨달음의 공부에 전념했는지 사도의 깨달음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복음에서 무지하다 꾸중받던 제자들 중 예전의 야고보가 아닙니다. 약간 과장하여 청출어람(靑出於藍 : 쪽에서 나온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가르친 말)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반응형

 

 

시련과 유혹에 대한, 또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야고보 사도의 명쾌한 해명의 지혜가 참 멋집니다.

시련(試鍊)을 전화위복의 시험(試驗)의 계기로 삼으라는 말씀은 얼마나 위로와 도움이, 힘이 되는 지혜로운 말씀인지요!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하느님은 유혹하지도 유혹받지도 않으시며 유혹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욕망 탓임을 또 명쾌히 밝히시는 현자 야고보 사도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이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말론적 죽음, 영혼의 죽음을 뜻합니다. 이에 대해 참 좋은 지혜의 처방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밝히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께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불변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뜻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참 좋은 깨달음의 선물뿐임을, 더 분명히 하면 예수님뿐이요 이 거룩한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진리의 말씀, 복음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영적으로 새롭게 낳으십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네 즐거움일랑 주님께 두라.  

네 마음이 구하는 바를 당신이 주시리라."

(시편 37,4)

 

 

 

반응형

 

 

 

 

2월 13일 매일미사

 

 매서운 겨울밤, 급하게 운전해서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도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이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아주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실제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버지가 임신한 딸이 출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고, 또 한 아들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운전하는 차 앞으로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는 것입니다. 둘은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은 힘을 합해서 나무를 옮기려고도 했지만, 둘이 들기에는 너무나 무거워서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둘은 목적지인 병원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둘은 서로 반대편 방향으로 가고 있었고, 그래서 차 열쇠를 서로 교환한 뒤에 상대방 차에 올라타서 목적지를 간 것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차를 바꿔 타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반응형

 

 나의 상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으로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세상 것에 집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배 안에 빵이 한 개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을 빵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이미 보았습니다.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나누어주는 것을, 또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던 기적을 이미 체험했습니다. 이 기적을 기억하고 있다면, 빵 하나만 있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의 부족함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누룩이 빵을 부풀리는 것처럼, 마음 안에 있는 허영, 가식, 탐욕, 권력욕, 교만 등의 작은 죄악들이 점점 부풀려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걱정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작은 누룩이었습니다. 이것이 부풀어서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줄 누군가가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특히 가장 힘센 주님께서 우리 편이 되셔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걱정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