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월 16일 매일미사 강론 2024년 가톨릭 미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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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월 16일 매일미사 강론 2024년 가톨릭 미사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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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매일미사 강론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16일 복음묵상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사순시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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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4년 2월 16일 매일미사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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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6일 매일미사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2월 16일 매일미사 복음 오늘의 묵상

 

5

헌신과 사랑이라는 단식의 실천

 

제1독서인 이사야서는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겉으로는 단식하며 의인인 체하지만 정작 삶에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이들을 이용하며 갈등과 반목을 일삼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정의와 공정을 세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단식은 자신의 즐거움을 절제하는 것, 곧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단식의 진정한 의미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고자” 정의와 공정에 헌신하는 희생적 삶이며,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들과 내 것을 나누는 사랑의 삶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을 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빛이 되고, 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는 치유자가 됩니다.

 

 정의를 위하여 헌신하고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으로 받은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합니다. 불의와 불공정, 이기주의적 사고, 다른 이에게 무관심한 개인주의로 서로에게 준 상처는 이 의인들의 단식으로 낫게 됩니다. 단식이 고통스럽듯이, 헌신과 나눔이라는 단식도 고통이 따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그 고통으로 우리의 상처는 낫게 됩니다. 또한 헌신과 사랑이라는 단식의 실천에서, 주님의 부재 곧 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듯 느껴지는 두려움도 극복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헌신 속에서 주님을 부르면 대답하여 주시고,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라고 응답하여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정의와 공정을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 속에서, 우리를 사랑스럽게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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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매일미사 복음 구속주회 신부님 묵상

6

 

 사랑을 되찾는 단식

 

우리가 하는 단식은 한 끼 굶는 게 아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나의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다.(이사 58,6-7)’ 배부르게 먹을 것을 떼어내서 배고픈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반기시는 단식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 부모를 잃은 자식,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들은 밥을 먹지 못한다. 흔히 하는 말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육체의 제1 욕구인 식욕도 없어진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밥이 아니라 사랑이다. 배부른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사람답고 행복하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았고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 잔치의 신랑에 비유하셨다.(마태 9,15) 신랑과 신부가 혼인을 통하여 결합하듯이 하느님과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혼인 잔치는 그저 즐겁고 기쁘기만 하다. 그 안에는 슬픔이 없다.

 

하느님과 하나가 됨이 그렇다. 이보다 더 기쁠 수 없이 기뻐 충만한 기쁨이고, 죽음조차 빼앗을 수 없어 영원한 기쁨이다. 그 기쁨을 빼앗기면 밥맛이 없고 살맛이 없어진다. 단식하지 말래도 단식한다. 하느님을 빼앗기면 단식한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세상에서 단식한다. 불의하고 불공정하고 비상식적인 세상에 대한 비난과 불평을 멈추고, 하느님을 빼앗긴 것을 슬퍼하며 작은 이들에게로 마음을 돌린다.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고, 억울해도 참아야 하는 이들에게 잘해준다. 지금 그들을 만날 수 없다면 배고픔을 통해서 마음으로라도 그들과 연대한다. 그게 하느님을 섬김이고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단식이다. 사순 저금통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어렵다. 그 또한 영혼 없는 행사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의 단식은 밥을 굶는 게 아니라 잃어버린 사랑과 자비를 되찾는 것이다. 예수님, 사랑과 자비가 없는 세상에 분노한다고 제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분노는 오직 하느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랑과 자비를 잃어버린 것에 슬퍼하고 저부터 먼저 그것을 되찾아 오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수난의 동정녀이시니 특히 억울하게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로하시고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소서. 아멘.(구속주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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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월 16일 매일미사 복음 빠다킹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묵상

예비자들에게 종교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후에 신앙을 버리시는 분을 종종 보게 됩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는데, 지금의 불행을 해결할 수 없다면서 기껏 얻은 신앙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큰 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말씀하십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데 하느님 믿으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 중에서 너무 미운 사람이 있다면서, 어떻게 성당 다니면서 저럴 수 있냐고 그런 사람도 주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듭니다.

 사실 종교로 인해 세상 안에 혼란이 많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교와 구교의 종교전쟁을 비롯한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중세에는 선교를 명목으로 한 식민지 지배도 있었습니다. 최근 탈레반이 저지르는 만행까지 종교인의 잘못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종교 자체가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입니다. 반대로 신앙생활로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생활로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면서 행복해하시는 분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문제는 종교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따르는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종교 안에서 올바른 가치와 의미를 먼저 찾아야 했습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야 종교 잘 믿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행복의 기준 자체를 제대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을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고 오히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로지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그 안에서 의미와 가치를 자기 것으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의미와 가치를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단식 논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음을 두고서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경건한 바리사이들은 한 주에 두 번 단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는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단식의 의미와 가치는 보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단식의 의미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을 동참하는 이유로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봉헌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주님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따를 수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가치와 의미에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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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6일 매일미사 김명겸 요한 신부님 묵상(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8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자신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단식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 관점에서 이 질문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는데 너희는 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 질문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게 들립니다. 우선 질문의 중심은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신앙생활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의 신앙생활에 집중하기보다는 너의 신앙생활에 참견하고 싶습니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보다는 노력하지 않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인데 너는 그렇지 못하다고 단정 짓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겸손 해질 텐데 오히려 콧대만 높아집니다. 즉 나 스스로 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단식도 많이 하고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도 많이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은 공동체적입니다. 서로 이끌어 주고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옆 사람의 모습도 보이고 그것에 대해 해 주고 싶은 말도 생깁니다. 단식하지 않는 것에 단식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도와주어 단식을 할 수 있게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안을 할 때 나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먼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힘든데 억지로 하고 있는 것을 제안하다 보면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을 심판하는 것처럼 표현하기 쉽습니다. 반면 쉽지 않지만 기꺼이 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그 안에서 좋은 의미를 찾고 있다면 하지 않는 사람에게 동참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권유는 그가 기꺼이 내 말을 듣지 않아도 기분 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제안은 어떤 방식인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형제회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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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16 매일미사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9

 

참된 단식 :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단식

 

"깊기만 하면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경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오늘의 다산 어록도 ‘홀로와 더불어가, 관상의 깊이와 활동의 넓이가, 잘 조화되고 균형 잡힌’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 논쟁"이고, 제1독서 이사야서 주제는 "참된 단식"입니다. 유다인의 전통적 수행, 자선, 기도, 단식 셋 중 하나에 속하는 단식이고 모든 고등종교 전통에 자리 잡고 있는 단식수행입니다.

 단식하니 식당이 떠오릅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음식점은 얼마나 많은지요. 흔히 "먹자고 하는 일인데... 먹는 재미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라는 말도 생각납니다. 수도공동체만 봐도 먹는 일은 현실입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면 곧장 식당에서의 식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동공동체의 중심은 성당과 식당이라고 합니다. 식당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야 공동체가 평화롭습니다. 좋은 주방장 수도자는 수도공동체의 큰 복이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성사(聖事)가 거행되고 식당에서는 식사(食事)가 이뤄지고 농장에서는 농사(農事)가 이뤄지니 말 그대로 삼사(三事), 성사(聖事), 식사(食事), 농사(農事)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식사와 관련된 단식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제4장은 온통 수행덕목들에 대해 74절까지 나열되어 있고, 10-13절까지는 육체의 금욕에 관한 내용들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어버려라. 육체를 다스리라. 쾌락을 찾지 말라. 금식을 좋아하라" 육체에 끌려가지 말고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이 바로 단식입니다. “금식을 좋아하라”라는 말씀은 영어로 하면 더욱 실감이 납니다. Love fasting (단식을 사랑하라), 신선한 충격을 주는 말마디입니다. 모든 수행생활의 답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로 하는 수행이기보다는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수도생활을, 삶을, 공부를, 기도를, 노동을, 침묵을, 겸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바로 이것이 수행의 최고 경지입니다. 사랑해서 자발적으로 행할 때 마음의 순수요 심신의 자유로움에 건강입니다. 수도승들의 영적 아버지라 칭하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수행생활에 관한 가르침 중 여덟 가지 악한 생각들 중 첫 자리에 나오는 것이 바로 탐식입니다. 그 발생학적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탐식에 이어 음욕, 탐욕, 슬픔, 분노, 아케디아(나태), 허영, 교만입니다. 가장 뿌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음식의 무절제인 탐식이요 식욕을 채운 이에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음욕입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도 닦기 힘들다”는 말도 바로 탐식을 경계한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식욕(食慾), 이성에 대한 성욕性慾, 물건에 대한 물욕物慾, 인간의 기본적 세 욕망입니다. 이런 욕망은 선도 악도 아닌 현실이며 문제는 탐식(貪食), 탐애(貪愛), 탐욕(貪慾)에 있습니다.

 

 이래서 모든 악덕의 뿌리인 탐식의 절제의 영적훈련이 단식이요, 수도승전통에서는 “단식을 사랑하라” 합니다. 단식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광야에서 악마에서 유혹받았을 때 주님은 40일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을 정도로 단식에 대한 능력도 탁월하셨지만 결코 단식을 수행의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권장하지도 않으셨고 그렇다고 금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단식 자체가 수행생활의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에서 참으로 자유로웠기에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무엇보다 분별의 지혜를 요하는 단식이 예수님의 관심사였습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적절할 때의 단식입니다. 자칫하면 에고를 부풀릴 수 있는 자기중심적 단식이 될 수 있을 것이요 경쟁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점이 오늘 복음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명쾌한 답변입니다. “혼인잔치 손님들과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당신과 함께 있는 축제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며 적절한 때 단식이 있을 거란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야 할 축제인생을 어리석게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단식의 관행을 보면 바리사이들은 매주 2차례 월요일, 목요일에 단식을 했고, 세례자 요한 제자들은 자주, 그리고 예수님 제자들은 평소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으며, 100년경에 쓰여진 디다케에 의하며 예수님 사후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수요일, 금요일에 단식했다 합니다. 오늘날은 밥을 안 먹는 금식禁食보다 고기를 안 먹는 금육(禁肉)이 더 적절하다 싶습니다. 너무 많이 고기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남판단하며 죄짓는 교만보다 더 낫다는 영적 핵심을 담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먹는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가는 온갖 불순한 것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는 바 이미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나팔을 불지 않는’ 이웃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단식, 겸손한 단식입니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겸손한 단식, 겸손한 수행 자체가 보상이요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다 합니다. 참 좋은 참된 단식은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 좋아하는 이사야 예언자가 통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참된 단식의 정체를 환히 밝힙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대로 하느님의 심중을 반영합니다. 예수님 역시 100% 공감하셨을 내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오늘날 우리의 무지를 환히 밝히는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혼자서 자기도취의 이기적 단식이 아니라 불쌍한 이웃을 살리고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행위들이 참된 단식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겸손한 단식에 이어 이런 자발적 사랑의 실천인 참된 단식이야말로 단식의 최고봉입니다. 이런 겸손한 단식, 사랑의 단식, 참된 단식에 대한 주님의 축복 말씀이 무지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주님의 빛 같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런 참된 단식,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인 사랑의 실천이 우리를 치유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단식 자체가, 침묵 자체가 답이 아니라 사랑의 잣대가 답입니다. 배고픈 자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하고, 말할 기회가 없는 홀로 있는 이들에게는 침묵이 아닌 말을 하게 해야 합니다. 정작 단식해야 할 이들은 많이 먹어 비만해 있는 이들이요, 침묵해야 할 이들은 말 많이 하는 직업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못 먹어서 병이 아니라 무절제하게 잘 많이 먹어서 병도 많습니다. 먹는 것을 보면 그가 누구인지 압니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니,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탐식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께 맛 들여 참된 단식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네 근심 걱정을 주께 맡겨 드려라, 당신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이 흔들리게 버려둘 리 없으리라."(시편 55,23). 아멘, (성 베네딕도 요셉 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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