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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5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2024년)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사순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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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월15일 매일미사 오늘의묵상(2024년)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사순시기

by 필로테아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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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15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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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5일 (목)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사순시기

 

그리스도의 기도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루카 22,44)

 

 

 

 

 

클레멘스
재의수요일 다음 목요일 독서기도 중 서 클레멘스1교황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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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제1독서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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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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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시기 기간에 대하여

: 사순시기 기간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공생활을 준비하신 기간으로 40일(사십일)이지만, 정확하게는 38일입니다. 사순시기는 재의 수요일을 시작으로 성목요일 주님의 만찬저녁 미사 전까지를 말합니다. 이때 사순시기 기간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단식하지 않는 주일은 제외합니다.

 

 

 

 

 

 

 

 

 

"날마다" 항구 하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 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오직 당신만의 길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는 주님께서 하신 일과 그분의 삶도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통하여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하는 과업입니다.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희생이 한 번으로 그치거나 문득 생각이 들 때 어쩌다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연속적이고 항구하여야 함을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닮아가는 비결은 항구함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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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 거대한 영웅적인 일을 한 번 하는 데 있지 않고, 작고 단순한 일을 꾸준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날마다 참례하는 미사, 날마다 바치는 아침 기도와 저녁기도, 날마다 이웃에게 베푸는 친절 과 미소 짓는 얼굴, 날마다 하는 어려운 이들을 위한 봉사와 나눔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 항구함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더 큰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도록 준비시킵니다. 일상의 삶에 놓인 작은 십자가들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 목숨으로 주님을 증언하여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순교라는 거대한 십자가를 껴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날마다" 항구하게 자신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간다면, 이전에 자신이 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던 더 큰 십자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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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수요일사순시기 미사강론

 

싸움터

"주님은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십자가의 길 매 처마다 바치는 기도다. 예수님은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셨고 그 위에서 돌아가셨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가쁘게 쉬고 계실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빈정거렸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 27,40)" 예수님은 끝까지 내려오시지 않고 그 위에서 돌아가셨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그와 같은 부당한 일을 겪다가도 탈출해서 악당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십자가 위에 계셨다. 예수님은 완전히 순종하셨고 비폭력적으로 사셨다.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이 사람의 모습을 한 하느님의 아들, 인간의 탈을 쓴 하느님이셨다면 그분이 받은 유혹은 다 쇼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하려고 애쓰는 나에게 모욕이다. 예수님도 나처럼 유혹받고 고민하고 어렵게 결정하셨다. 그분은 외딴곳에서 홀로 기도하셨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진땀에 피가 섞일 정도로 번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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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하는 게 너무 힘들어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까지 도움을 구하셨다. 하느님 뜻에 순종한다는 것,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것이다. 사랑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거다. 구원의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뿐이다.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때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셨거나 아예 처음부터 십자가의 수난과 그런 죽음을 피하셨을 거다. 그분이 왜 그러셨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그건 멀지 않은 미래에 하느님을 뵈면, 이 거추장스럽고 감옥 같은 육체를 벗고 나면 환하게 다 밝혀질 거다. 그때까지는 그냥 믿고 따른다. 나를 버리고 매일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 이것이 나를 지금부터 벌써 영원히 살게 한다고 믿는다. 수난 전 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놓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으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이길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이겼다"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진 이들은 이미 승리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진 이들이 승리했다고 밝혀질 것이다. 그렇게 돼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 유혹과 번민을 견디어내신 그 거룩한 몸을 제게 주십시오. 유혹이 없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전혀 없다면 저는 하느님 반대편에 서 있는 겁니다. 유혹받고 갈등하고 괴롭다는 것은 제가 전쟁 중이라는 뜻입니다. 유혹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 전술만으로는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제 몸이 바로 그 싸움터입니다. 저는 거의 언제나 패배하지만 주님은 언제나 승리하십니다. 그럴 때마다 제 안에 부어주신 주님의 은총과 제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여린 목소리에 집중하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의 그 겉옷은 햇빛을 모두 흡수하는 깊은 바닷물 색입니다. 유혹받을 때에 그렇게 남김없이 하느님을 신뢰하셨던 어머니 품에 숨겠습니다.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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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수요일 다음 목요일 미사강론

 

삶은 선택입니다

짐이 아닌,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

 

다산(茶山) 정약용과 논어 공자(孔子)의 오늘 말씀이 멋집니다.

"꽃향기를 맡기 위해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한다.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 -「다산」

"육포 한 묶음 이상을 예물로 갖춘 자를 나는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겸손과 감사는 '배움의 여정' 중에 있는 평생학인의 기본적 품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가 '재의 수요일'이자 '밸런타인데이'인 줄은 후에 초콜릿 선물을 받고 알았습니다.

외출 후 귀원하니 집무실 앞에 정체불명의 봉투가 있었고 초콜릿이 들어 있었습니다.

후에 카톡 메시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이면서 Valentine's day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코렛 선물하는 날입니다. 사랑합니다!!

   봉투에 글을 읽어 보세요! 제가 신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 자매님 선물이었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봉투가 보이지 않네요!"

"초콜릿 넣은 bag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봉투에 영문글자들이 보였습니다.

 

『 Thank you, is the least I can say to you show my appreciation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for me. 』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제 감사를 보여줄 수 있는, 당신께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말마디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은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는 요지로 전개했는데 후에 생각난 내용을 첨가하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요 진실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진실도 끝입니다. 삶이 연장되는 것은 하루하루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주어진 날들인 것입니다." 얼마 전 교구 신부님과 대화하면서 은퇴신부들의 처우에 대해 나눴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양산되는 고령 은퇴 사제들의 처우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선물인생인 듯 생각했는데 이제는 교회에 불편하고 무거운 짐들로 느껴지고 있는 노은퇴사제들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제가 늘 화두로 삼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받을 때는 선물이었는데 받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대부분 불편하고 무거운 짐이, 쓰레기가 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병들고 아프면, 심지어 나도 병들고 아프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선물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영적 본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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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선택입니다!"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도 선택, 행복도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탄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의 주님, 희망의 주님,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용감하게, 무거운 짐 인생이 아니라, 가벼운 선물 인생을 선택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희망차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하면 짐도 선물로 변합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가 대상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번성할 것이다."

「신명기 30장 15-16절」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신명기 30장 19-20절」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라는 말마디가 참 은혜롭습니다. 헛것인 세상 우상들에, 결국은 버려질 짐같은 것들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께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제1독서에 "오늘"이란 말이 무려 4회 나옵니다. 영원한 오늘, 지금 여기 오늘을 뜻합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신약의 새모세,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바로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장 23절

 

'누구든지',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보편적 구원의 진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여 따라야 할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버리고 내 책임의, 내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한결같이 날마다 오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더불어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도 날로 깊어져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 '나'의 실현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비로소 늘 선물인생이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힘껏 늘 십자가의 길 선물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때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 인생이 될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 오늘을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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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결'을 통해서만

 

신학생 때 저를 신경 쓰게 했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무릎 통증입니다.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 났던 적이 있는데, 당시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서인지 신학교에 들어가서 계속 통증이 있었습니다. 병원에 가보니 무릎에 물이 많이 찼다면서 커다란 주사기로 물을 빼주면서 무릎 사용을 하지 않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안 좋아질 것이라는 말씀을 의사 선생님께서 해주셨습니다.

 문제는 신학교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반드시 꿇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깁스를 한 것도 아니어서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무릎이 아프다고 하면, '젊은 놈이 뭘 아파?'라는 식입니다. 무릎 아픈 것보다 꾀병 부리는 것처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더 힘들게 했습니다.

 고통은 단절과 고립에서 온다고 합니다. 세상에 홀로 있다는 느낌이 있을 때, 우리는 고통 안에 머물게 됩니다. 따라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연결'을 깨닫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님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연결'을 통해서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삶 안에서 단절과 고립은 계속 이어집니다. 육체뿐 아니라 특히 정신 안에서 강하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연결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만남 안에서도 이 '연결'을 유념해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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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결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우리와의 연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잡아 주셨고, 또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 연결을 위해서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사흘 만에 되살아는 부활까지 이야기해 주십니다. 혹시라도 각종 고통과 시련 안에서 주님과의 연결을 끊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즉, 주님과 연결되어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연결 없이 과연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계속된 불평과 불만 속에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우리는 주님과의 연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주님과 연결해야 하고, 이웃과도 연결하면서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고통의 삶이 아닌,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복음서와 규칙서 등 상기 복음 묵상 글 中 인용부호(" ")가 표기된 부분은 이해를 돕기 위해 적절한 인용의 출처를 찾아 제가 작성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오늘의 묵상 제목은 묵상글을 읽고 임의로 지은 것입니다. -필로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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