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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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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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제1독서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9,4ㄴ-10 4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5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6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7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유다 사람, 예루살렘 주민들, 그리고 가까이 살든 멀리 살든, 당신께 저지른 배신 때문에 당신께서 내쫓으신 그 모든 나라에 사는 이스라엘인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8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9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10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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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제자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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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복음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6-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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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6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오늘의 묵상

 

우리는 여러 관계 안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방은 나에게 무시당하였다고 느끼고,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내가 먼저 준 상처의 대답은 아닌지,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그 사람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리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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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상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결코 기워 갚을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한다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끝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며, 체험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때문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님 복음묵상 (24년 2월 26일 복음묵상)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오늘은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집중코자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제가 남용하고 있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자비란 죄를 지었는데 죄지은 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그 용서하시는 사랑을 특별히 일컬어 자비라고 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을 일컬어 자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실 때 저의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느님께는 감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잘못된 태도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우습게 여기는 가장 나쁜 태도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태도이거나 세상 권력자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는 필요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로 교만하지 않고, 세상 권력자들을 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거나 용서할 사람이지 그들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저는 도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 다음으로 잘못된 태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에서 열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주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과 달리 정작 이스라엘 사람은 당연하게 여겼기에 아무 감사를 드리지 않았지요.

저의 잘못된 태도는 이런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저의 자비 남용과 용서 남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약의 남용과 비유하면 좋을 것입니다.

약이 좋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과신합니다.

그래서 약만 믿고 나쁜 짓을 계속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믿고 술을 계속 먹는 다시 말해서 끊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계속 용서하실 거라고 하느님 자비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철석같고 찰떡같고 확고하지만,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분명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뉘우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이 과신이고 잘못입니다.

이는 부모의 사랑을 믿고 흥청망청 돈을 쓰고 나쁜 짓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이런 저와 같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잘못된 또 다른 태도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위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았으면 옆으로 그 자비와 용서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비를 그렇게 받았어도 아직도 하느님 자비가 부족한 것처럼 자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더 자비를 베푸셔야 내가 자비로 가득 찰지!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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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국지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복음묵상 (24년 2월 26일 복음묵상)

우리는 나라와 주권을 빼앗긴 참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00년이 넘었어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고통을 받는다. 위안부,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두 나라 사이에 큰 숙제로 남아있고, 그 당사자들은 여전히 억울함과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런 우리처럼 이스라엘도 나라를 빼앗기고 힘센 나라에서 노예 생활을 했었다. 그들은 그런 고통을 겪게 된 것이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의 나라에서 노예 생활하는 치욕 속에서 그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음을 반성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이 벌을 내리신 거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고통은 죄가 일군 당연한 결과이지 하느님이 내리신 벌이 아니다. 그걸 그들은 그렇게 표현했다. 모든 삶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생각했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하느님을 마치 사람처럼, 아버지처럼, 임금처럼 여겼다.

이스라엘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느님을 이런 분이라고 고백했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탈출 20,5-6).” 죄의 고통은 삼대 사대에까지 전해지지만 그분의 사랑은 천대에 이른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사랑답게 당신 스스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다. 그분이 당하신 고통으로 우리는 나았고,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됐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예수님은 우리 자비의 되를 크게 만들라고 하신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거기에 누르고 흔들어서 담아주신다. 더 담아주고 싶으셔도 그 되가 작으니 더 주실 수가 없어 안타까워하신다. 내가 베푸는 자비의 첫 번째 수혜자는 바로 나다. 이웃이 바로 나다. 가장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다.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주인이신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라는(요엘 2,13) 요엘 예언자의 호소를 기억한다. 내 마음의 되를 옆으로 더 넓히고 속으로 더 깊게 파낸다.

예수님,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귀가 아니라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실제로 말씀 그대로 따릅니다.

마음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그렇게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처음 해보는 거라 어색하고, 그렇게 하면 괜히 손해 보고 뭔가 잃어버리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하지 않지만 주님이 이토록 간절하게 말씀하시니 주님을 믿고 그렇게 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더 큰 되를 집어 드는 걸 주저할 때 제가 용기를 내게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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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2월26일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신부님) 복음묵상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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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2월26일 매일미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묵상

 

근래 ‘시대의 스승’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장일순((1928-2010)과 신영복(1941-2016)을 꼽고 싶습니다. 두 분의 글씨도 참 깊고 독특하고 향기로운 예술입니다. 두 분의 평전도 감동적이라 보관 중이며 가끔 읽고 있습니다. 장일순에 대한 평과 사례를 소개합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었고, <녹색평론>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고 꼽았던 사람, <사상의 은사>라는 리영희가 존경했던 분..' ”

   무위당 장일순에게 감화를 받은 분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이분에 대한 찬사글도 끝없이 많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소개글 하나 나눕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할 지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며, 공무원에게는 민(民)을, 장사꾼에게는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정성을 다하라고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러 오신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해야 해.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요.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장일순은 길을 가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세세한 가정사를 묻고 어른들의 안부를 살폈다.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든 바구니 장사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연도 따랐다. 김지하의 말에 따르면 봉산동 집에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보통 2시간씩 걸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다운 참으로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경청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이분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생 과제를 제시합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에 이은 결정판 같은 말씀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우리의 ‘거룩함(holiness)’은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보여줘야 합니다. 거룩함이 온전함이며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삶이 거룩한, 온전한 삶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제 책명이 가리키는 바 역시 자비로움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우리의 평생과제를 제시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하느님의 얼굴도, 이름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비”입니다. 하느님을 닮을수록 자비로운 사람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화신입니다. 그러니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의 궁극 목표는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가르침에서 자비행의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이, 끊임없이 용서하고, 주는(giving) 사람이, 섬기는(serving) 사람이, 돌보는(caring) 사람이, 나누는(sharing) 사람이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교만하고 인색한 사람이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관대한, 지혜로운 자비의 사람은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고 주고 나누고 돌보고 섬깁니다.

새삼 자비로운 삶도 영적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삶을 선택하여 평생 훈련으로 습관화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합니다. 마지막 천국문 통과 시 주님께서 검사할 마음의 얼굴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얼굴인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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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다니엘의 동포를 위한 기도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자비행에 앞서 이런 진실한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훈련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자발적 자비행과 기도와 회개의 훈련 및 습관화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에 앞서 이런 철저한 기도와 회개가 우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회개가 없기에,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내로남불, 인면수심(人面獸心),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괴물같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기본적 정서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자기 인식을 전제로 한 겸손하고 자비로운 삶, 바로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요 이런 사람이 진정 참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자비의 훈련에 항구함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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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2월26일자 매일미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미사 강론

평화를 빕니다. 세상과 신앙 공동체는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문화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요.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불평 나라와 감사 나라 젊은이가 유학을 떠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불평 나라의 젊은이가 유학을 가 이웃 나라에 있는 감사 나라로 가서 감사에 대해서 배우다가 감사 박사학위를 따고 돌아와서는 "감사나라에서는 얼마나 감사만 하는지 정말 지겨웠어요."라고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감사 나라의 젊은이가 이웃나라인 불평 나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불평에 대해서 배우며 불평 박사학위를 따고 다시 감사 나라로 돌아와서는 "감사할 줄 아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해 준 것이 너무 감사하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심판하고 단죄하는 나라가 있고, 용서하고 남에게 베풀어주는 그런 나라가 있다면은 심판과 단죄만 하는 나라에서 젊은이가 용서하고 남에게 베풀어주는 나라에 가서 용서하고 베풀어주는 것을 배우고 다시 심판하고 단죄하는 나라에 돌아온다면 그 사람들은 세상에 그런 정의가 있는데 '용서하고 베풀어준다는 것'을 '단죄한다'거나 '심판한다'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심판하고 용서하고 남에게 베풀어주는 나라의 젊은이가 심판하고 단죄하는 나라에 가서 심판하고 단죄하는 거를 배워가지고 돌아온다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렇게 '심판하고 단죄하는 것을 용서합니다 '이렇게 말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프란치스코회에서 아버지이자 사부님으로 모시고 있는 '성 프란시스코'께서는 회개하실 때 나병 환자에게서 예수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볼 때 형제 자매 안에 계시는 주님을 우리는 보라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심판하려고 할 때 '주님을 내가 심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심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죄하려는 마음이 들 때 '주님을 단죄한다'라고 생각하면은 단죄할 수 없겠고요. 

  반면, 누군가를 용서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던 것을 생각하면은 그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하느님 아버지를 잘 섬기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가족과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다면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잘 섬기게 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열리면 이웃에게도 열리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우리는 자기의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비하신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어떻게 하면 잘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오늘 하루도 감사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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