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함께하는 시간
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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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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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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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제1독서

선행을 배우고 공정을 추구하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1,10.16-20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19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20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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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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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생각과 말에 머무르고, 삶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사랑은 공허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에 대해서 비난하십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그저 머리와 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해석 권한으로 권력을 쥐고, 외적으로 권위를 상징하는 옷차림새에 마음을 쏟으면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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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선포에 힘이 있으려면 삶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더욱 효과적인 방식은 희생하는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한 삶은 어떤 유려한 연설과 글보다 세상에 더 큰 감동과 울림을 줍니다. 우리가 김수환 추기경님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이 시대의 어른으로 여기는 이유는 단순히 그분께서 가지셨던, 시대를 바라보는 뛰어난 신학적 통찰력이나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 이해에서 흘러나온 아름다운 금언들 때문만이 아닙니다. 언제나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불의에 저항하시고,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불이익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헌신적인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OFM 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사순시기)

김찬선신부님 배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오늘 주님의 이 말씀은 저를 두고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김찬선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자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제 여기 밥상을 하면서 얘기를 나누다가 제가 말씀 나누기를 얼마나 했는지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한 5년 정도 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아서 2008년부터 했다고 정정해서 말씀드렸는데 이때 저의 마음 안에 제법 긴 기간 꾸준히 했다고 약간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이내 그런 저의 자세가 잘못된 자세라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의 육신의 누이가 요즘 강론이 영적으로 옛날만 못하니 더 깊이 묵상하고 나누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오늘 마침 주님께서도 이런 제가 들으라고 말씀하시어 다시 찔끔했습니다.

사실 16년 넘게 거의 매일 말씀을 나눴으니 그 기간과 말의 양이 엄청난데 그 성찰과 반성과 나눔이 10분의 1만 실천으로 갔어도 저는 성인이 되었을 겁니다.

전기 작가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이런 저와 달랐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이 입으로 나왔고 그의 온 존재를 채우고 있는 빛을 받은 사랑의 샘이 밖으로 넘쳐흘렀다. 어디에서나 그는 늘 예수께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었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말씀이 머리에 머물지 않고 가슴으로 가고, 가슴으로 그치지 않고 손과 발까지 전 존재적으로 가 실천에 이르는 것은 기간과 횟수와 같이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것은 제가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제가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말씀대로 여러분도 제 말을 실천의 말이라고 믿었다가 실망하지 마시고, 여러분이나 저나 같이 살아야 하고 살고 싶은 것을 나눈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더 나아가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잘 실천하시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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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성베네딕도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사순시기)

“죽음의 잠에 빠지지 않게 제 눈을 비추소서.

제 원수가 ‘내가 이겼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시편 13,4-5)

 

  국내 사정이 4월 10일을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공천으로 참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공천 결과에 따른 반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환히 드러납니다. 국민들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참 아름답게 잘 떠나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온갖 추태를 부림으로 배은망덕(背恩忘德)과 더불어 그동안 내적 삶이 어떠했는지 환히 드러납니다. 가장 고약한 것이 배은(背恩), 배신(背信), 배반(背叛)입니다. 문득 오늘 다산의 어록과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예화도 좋아 나눕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사기

 

   사람이 진실, 고결(高潔)하고 겸손하면 저절로 사람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잘 살았을 때, 잘 떠납니다.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떠날 때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남기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분열과 불화를 남깁니다. 늘 떠남을 준비하며 살아갈 때 하루하루 충실할 수 있을 것이며 떠날 때도 아름답게 향기처럼 떠날 수 있을 것이며 참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19년 전, 2005년 참으로 수도원이 어려운 일을 겪던 해 써놨던 “떠날 때는 이렇게”라는 시(詩)를 주일에 이어 최초로 공개합니다.

   얼마 전 입춘(立春)과 우수(雨水)를 지나 내린 봄눈 내린 나무마다 설화(雪花)들 가득한 날에도 잘 어울리는 시입니다.

마침 주일 강론 후 강론 중 “봄이 되었다!”라는 시(詩) 중에 나오는 “봄의 맑음”이라는 말마디가 자기 이름과 같다고 반색하던 ‘춘숙(春淑;봄 춘, 맑을 숙) 도미니카’ 자매가 생각납니다. 이 말마디를 놓치지 않고 들은 경청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어떻게 잘 떠날 수 있을까요? 마지막 떠남인 죽음 역시 언젠가의 갑작스러운 선종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다 잘 떠날 때,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사순 1주간 화요일 마태복음과 제1독서 이사야서가 잘 떠남을 위한 답을 줍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가르침인데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의 교회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교회밖 각계각층의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지탄을 받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우리의 참 좋은 반면교사가 됩니다. 전반부는 이들의 언행이 불일치 함을 지적하며 이들의 허영을 단연히 배격하라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되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며, 남에게 보이고 싶어 하는, 드러내기 좋아하는 허영을 말끔히 일소하고 진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진실이 힘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생략이 불가하여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분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말마디가 큰 울림을 줍니다. 이런 자각에 투철한 이들이 정말 겸손한 이들입니다. 만민평등에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라는 것입니다. 스승님이자 선생님은 그리스도 예수님 한 분뿐이시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삶에 저절로 따라오는 내적자유와 내적평화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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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아우구스티노의 “아버지는 하느님이고, 어머니는 교회이고, 모두는 형제다”라는 말씀에 새삼 공감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효성스러운 “자녀답게”, 형제들 간에는 우애좋은 “형제답게” 살아갈 때 참 아름답고 품위있고 격조있는 삶이겠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상호존중과 상호 섬김의 겸손한 자세가 나오고 이런 이들이 주님의 참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거듭 강조되는 섬김과 겸손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명명되는 우리 수도공동체이고 우리에게 직분이 있다면 ‘섬김의 직분’,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우리의 여정이 있다면 ‘섬김의 여정’, 영성이 있다면 ‘섬김의 영성’ 하나뿐일 것입니다. 역시 섬김의 여정에서 여전히 초보자임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거짓경신례와 참된 경신례의 대조입니다.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경청의 강조에 이어지는 거짓경신례를 얼마나 혐오하는 하느님인지 실감있게 표현되는 다음 내용은 오늘 독서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눈을 가려버리라.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들어주지 않으리라.”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이라면 빈손으로 와도 주님은 반기실 것입니다. 경신례의,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선행과 사랑, 정의가 통째로 사라진 헛된 경신례의 거부요, 이어 주님은 참된 경신례를 위해 필히 실천해야 할 지침을 주십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다음 다섯 가지 명령은 모두가 실천을 명하는 “하라”는 동사들입니다.

“1.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2. 너희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3.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4.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5.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결국 오늘 말씀도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에로의 방향전환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요, 회개는 실천의 열매로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진정성을 보장하는 회개의 참 좋은 열매들이 경청, 진실, 겸손, 섬김, 선행, 사랑과 정의, 공정의 실천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잘 살 때, 비로소 잘 떠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옳은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 50,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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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빠다킹) 오늘의 묵상

 

  미래를 긍정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행복 수준을 높여 줍니다.

실제로 이들은 자기 계획에 대한 성취도가 높고, 꾸준함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죄를 저질러서 돈을 번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언제 잡혀 들어갈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늘 간직하고 있기에, 돈을 모으지 못하고 대신 도박과 유흥, 방탕한 생활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불안감을 없애고 행복감을 높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실패를 바라보게 됩니다. 다른 이의 말이 내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를 좌지우지하게 됩니다.

   지난겨울 중고등부 캠프 프로그램 중에 제주도 한라산 등반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등반하는데, 한 친구가 허겁지겁 아래로 내려갑니다. 방금 지나갔던 등산객 중 한 명이 무엇인가를 떨어트렸다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등산객이 놓고 간 검은색 봉지에 담긴 무언가를 들고뛰어 내려가서 주고 왔습니다.

제가 “그 안에 뭐가 들었는데?”라고 물으니, “쓰레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쓰레기는 자기가 버려야죠. 그래서 주고 왔어요.”

  누가 내게 쓰레기를 넘겼습니다. 그 쓰레기를 받으면 어떨까요?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 쓰레기를 계속 손에 들고 있으면 계속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얼른 그 쓰레기를 다시 넘겨야 합니다. 말과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적인 쓰레기들도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쓰레기들을 넘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지 실제로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옳고 자기들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두 틀렸다면서 단죄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 단죄를 받는 사람은 결국 죄인이 되어서 제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쓰레기를 넘기는 위선자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겸손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쓰레기를 넘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라는 귀한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통해서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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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구속주회 한국지부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신앙은 예식 참여가 아니라 삶이고 행동이다.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그들이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보다 거의 천 년 전에 살았던 이사야 예언자도 같은 말씀을 전했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이사 1,13).”

어느 날 고해성사를 주던 사제가 갑자기 고해소를 뛰쳐나와 곧바로 교구장에게 달려가 본당에 성인이 나왔다고 보고했다. 1년 만에 고해하는데 주일미사 한 번 빠진 게 죄의 전부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지어낸 우스개일 거다. 웃긴 데 뒷맛이 씁쓸하다.

단식할 때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자선은 자신조차 모르게 하고, 기도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하느님과 단둘이 은밀하게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나의 신앙은 예식이나 형식이 아니라 이웃들 특히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잘해주는 것으로 드러난다. 묵주기도 수백 단보다 빨간 불에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어르신을 기다리거나 같이 걸어가 주는 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이다. 신앙에 행동이 없으면 천사의 언어를 말한다 해도 그것은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1 코린 13,1).” 그래서 수도원과 성당이 시끄러운가 보다.

    이사야 예언자는 죄인을 부르시는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이사 1,18).” 하느님을 믿고, 십자가의 주님을 믿어서 내 죄는 용서받는다. 그것은 내 보속이나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차고 넘치는 호의 때문이다. 무죄함이 아니라 서로 사랑함이 신앙의 목적이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처럼 실천 없이 예식에만 참여하고 보이기 위해 기도하는 신앙은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게 된다. 미사 성찬례는 예수님 지상 삶의 종합이다. 한 마디로 주님의 삶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이 예식에 참례함은 의무이행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 내어주는 사람, 여기서 목숨을 잃어 저기서 참된 목숨,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이 되기를 바람이다.

    예수님, 주님의 성찬에 참례하며 오늘도 저를 버리고 죽여 이웃에게 양식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점점 없어져 주님의 향기만 남기를 바랍니다. 저의 생명은 제 후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이어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가 어머니처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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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7일 매일미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최문기 마티아 신부님 오늘의 묵상 (사순 시기)

   조선 중기의 학자,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미수 허목(許穆) 이 두 사람은 서인과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정치적인 사안을 놓고 여러 차례 충돌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17대 왕 효종이 승하한 이후에 아버지인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 황후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는가 아니면 3년 입어야 하는가를 놓고 벌인 이른바 예송논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가장 치열했던 정치적인 논쟁 중에 하나였습니다.

  요즘 관점에서 본다면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이 뭐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이 모든 정치적인 명분의 기본이었던 그 시대에 이 논쟁은 서로의 목숨을 걸고 벌어질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송시열과 허목의 감정도 서로 좋지 않았음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훗날 송시열이 큰 병에 걸리고 백약이 무효한 그런 상황이 되자 자신의 아들에게 정치적인 정적이었던 허목에게 약 처방을 받아올 것을 명령합니다.

   당연히 아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정치적인 원수가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처방을 줄 리가 없다라고 생각을 했지만, 송시열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목에게 받아온 약 처방 속에는 비상(砒礵)이라고 하는 독약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허목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고 확신을 하고 분개하면서 이 약을 먹어선 안 된다라고 말하지만, 송시열은 그는 나를 그렇게 죽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태어나게 약을 먹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병은 말끔하게 낫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송시열과 허목이 극한의 정치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목숨을 맡길 만큼의 깊은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둘은 사안을 놓고 경쟁할 때는 목숨까지 걸고 싸웠지만 상대방이 가진 진심과 정직함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상대의 관점과 견해에는 절대로 동의할 수도 없었고, 당연히 인간적으로도 못마땅한 감정을 가졌겠지만 그들은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았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논쟁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더 신중하게 보완하고 다듬는 개선의 계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비록 감정적으로는 미웠을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과 태도는 그다지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중해줘야 할 부분은 존중해 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실 모든 인간관계는 다분히 감정에 좌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좋으면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고, 싫으면 모든 것이 다 싫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자기 감정에 따라서 모든 것을 마냥 좋게만 보아주거나 반대로 무조건 미워하고 증오한다면, 그것은 건강하고 발전적인 관계를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가르침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어떤 접점도 없이 양 극단을 달리면서 서로를 악마화하고 증오하는 가운데 분열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볼 때, 오늘 복음 말씀은 깊이 묵상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님께선 모든 인간관계가 대립과 분열이 아닌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기를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성자의 육화와 십자가의 죽음은 화해와 평화를 바라시는 주님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이사야 1장 10절)."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호소처럼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더욱 주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순 시기에 우리 모두 더욱 열심히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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