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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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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함께 걷는 시간

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by 필로테아 2024.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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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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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2월 29일 매일미사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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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가 부자의 대문에 누웠있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2월 29일 매일미사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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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29일 매일미사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오늘의 묵상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불의를 저지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착취하여 부정한 재물을 축적하거나, 하느님의 가르침에 거스르는 길을 걸었다거나 하는 표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라는 묘사로 재물을 남용하며 살았을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줍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이 흠이 아니라, 오히려 미덕이 될 수 있는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의 삶이 저승에서 고통을 받을 만큼 그릇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저지른 큰 잘못이 있습니다. 바로 ‘무관심’입니다. 문을 여는 작은 수고만 하여도, 불쌍한 라자로의 처지를 볼 수 있었을 터인데, 그리고 그 현실을 보면 그의 마음이 움직였을 터인데, 그는 자신의 관심을 자신과 자신의 즐거움에만 돌렸습니다. 사실 부자는 자신의 집 앞에 라자로가 있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자로를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이 차가운 무관심이 부자가 저지른 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현대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무관심의 문화가 하느님 사랑의 반대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무관심을 극복하고자 교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의 현실에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안락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랑을 전하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길에 나가 상처를 입고 더럽혀지는 그때에, 우리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합니다. 문 앞에 라자로가 있었던 것처럼, 교회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우리는 이 시대의 라자로를 만날 것이고, 그들의 현실은 우리 마음에 이르게 될 것이며, 그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우리를 사랑의 실천으로 이끌 것입니다. 교회 문을 여는 작은 첫 시도에서 위대한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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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그 잎이 푸르고 줄곧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레미야서를 바탕으로 의지와 신뢰의 차이를 묵상해 봅니다.

누구에게 의지하는 것과 누구를 신뢰하는 것의 차이 말입니다.

의지의 문제점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기대어 서기에 스스로 지탱하거나 설 수 없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하면 지팡이 없이는 서 있거나 걸을 수 없습니다. 술에 의지하면 술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술 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서지 못합니다. 의지하는 그 사람이 다행히 좋은 사람이면 다행이지만 좋은 사람인 줄 안 그가 그렇지 않으면 큰 문제겠지요. 그에 의한 행복이 그에 의한 불행으로 바뀔 것이고, 나의 인생과 나의 행불행이 그에 의해 좌우되고 그에게 매입니다.

그렇다면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기를 믿고 자기 힘에 의지하는 사람 말입니다. 

    자기 인생과 자기 행복을 남에게 맡기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훌륭하고, 불교의 경우 이런 면에서 훌륭한 가르침을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오늘 예레미야서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라고 얘기하듯

자기를 과신하거나 아무도 믿지 않는 곧 과신과 불신의 자기 믿음이라면 다른 얘기일 것이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보다 더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과신이 타인 불신으로 이어지고 타인 불신이 단절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과신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문제이고 하느님과도 단절하게 하기에 더 큰 문제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물가의 나무처럼 싱싱하고 열매를 많이 맺지만,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단절되어 생명의 물과 단절된 사막의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믿으면 엽니다. 사람을 믿으면 사람에게 열고,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께 엽니다.

그러니 믿는 것은 과신이나 불신보다 낫고 앞서 봤듯 의지하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라자로 얘기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과 비교할 때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 특별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라자로가 가난해서 천국에 갔다고 하는데 실은 돈만 없어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라 의지할 돈도, 의지할 사람도 없어서 천국에 간 것입니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어서 하느님께만 믿음을 둔 것이고 하느님밖에 믿을 곳이 없어서 하느님이 계신 천국에 간 것입니다.

반면 부자는 라자로와 정반대 지점에 있고 그곳이 실은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돈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하느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고 불타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영원히 단절된 곳이 지옥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자입니까? 가난한 사람입니까?

의지하는 사람입니까? 신뢰하는 사람입니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OFM 작은 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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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은 원래 선한 품성을 지닌 백의민족이었다. 뜨거운 개숫물을 마당에 버릴 때는 ‘워이 워이!’ 외쳤다. 뜨거운 물에 벌레들이 다칠까 봐 어서 피하라는 것이다. 봄에 먼 길을 떠날 때는 듬성듬성하게 짠 짚신과 촘촘하게 짠 짚신 두 가지를 챙겼다. 마을 길을 갈 때는 촘촘한 짚신을, 산길을 갈 때는 듬성듬성한 짚신을 신었다. 봄철에 벌레들이 알을 까고 나오다가 짚신에 깔려 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콩을 심을 때는 세 알을 넣었는데, 한 알은 땅속 벌레 몫, 또 하나는 새와 짐승 몫, 마지막 하나는 사람 몫이라고 여겼다. 감나무 꼭대기에는 까치밥을 남겨 놓았고, 들녘에서 음식을 먹을 때는 ‘고수레’하며 풀벌레들에게 음식을 던져줬다. 여인들은 세 명의 몫을 더해 밥을 지었는데 걸인이나 가난한 이웃이 먹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는 어느 유명한 미국 소설가가 1960년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 사람들에 대해 쓴 글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모습을 보고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볏단을 가득 실은 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에게 미안해서 자신도 지게에 볏짐을 지고 가는 농부의 마음이 본래 한국 사람 마음이다.

 

  오늘 복음은 부자와 거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다(루카 16,19-31). 부자는 악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게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다(마태 19,24; 마르 10,25; 루카 18,25). 그 부자가 악행을 했다는 보도는 없다. 그런데도 그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았다. 그 이유는 그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문 앞에서 구걸하는 라자로를 매일 보았고 그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루카 16,24). 그런데 그는 라자로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매일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는 그 많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 좋은 거 먹고 해외여행 가는 건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가 돼서는 안 된다.

  그 부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소출을 얻자, 고민 끝에 더 큰 창고를 짓고 재산이 더 많아졌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게 됐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하느님이 그를 데려가셨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21).”

 

  사순시기에는 사순 저금통을 받는다. 보속 단식 그리고 희생을 돈으로 환산해서 저금통에 넣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자선단체에 그보다 더 큰 금액을 계좌이체하는 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 허술한 저금통을 보이는 곳에 놓아둔다. 가끔 얼마씩 넣기도 한다. 이미 여기저기 자동이체 해놓은 단체들이 있어도 그렇게 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는 법,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마음에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준 것이 주님께 해드린 것이고,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주님께 해드리지 않은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을 믿어 기도하며 성사 생활에 충실했으니 죄는 용서받고,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니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주님이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니’라고 물어오실 때 당황하고 후회하고 부끄럽고, 그런데도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괴롭고 지상교회에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밖에는 다른 기댈 게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 크든 작든 더 많은 기회를 주십시오. 거기서 살아계신 주님을 뵙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주님께 잘해드릴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구속주회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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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빕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전쟁이 자주 일어나던 북쪽 변방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이 노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아주 덤덤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웃 사람들은 노인에게 일어난 일들을 안타까움, 염려, 혹은 복 받은 일이라고 얘기하지만, 그는 이 모두를 너무 기뻐하지도 또 너무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덤덤히 여겼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송나라 말 원나라초의 승려회기원희(晦機元熙) 선사(禪師)가 지은 시로 "기경산허곡릉화상(寄徑山虛谷陵和尙)"의 "인간만사새옹마(人間萬事塞翁馬) 추침헌중청우면(推枕軒中聽雨眠)"이라는 구절에서

'새옹지마'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좋은 것만을 받기를 원하고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좋은 것만을 누리고 싶어하고, 또 좋은 대학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다니면서 많은 돈을 벌면 사회적 통념상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부의 많고 적음, 사회적인 지위의 보화가 아니라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잘 따랐는지, 또 복음의 계명을 얼마나 기쁘게 실천했는지에 따라서 하늘나라의 행복, 곧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와 라자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라자로의 히브리어 이름은 '엘아자르(el'azár)'인데 이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에서처럼 라자로는 세상에 살아있을 때 좋지 못한 것, 나쁜 것들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살아있으면서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있는지 알려주는 내용이 복음에 나옵니다.

"그는 부자의 집 문 앞에서 종기 투성이로 누워 있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진 음식으로 배를 간절히 채우기를 바랐지만, 걔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이 내용을 달리 보면 부자가 자기 집 문 앞에 있던 거지 라자로에 대해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며, 빵 한 조각 나누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라자로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죽음 이후에 천사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 안에서 평화를 누립니다. 이와는 달리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만을 누렸던 부자'는 죽어서 저승의 불길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만일 복음에 나오는 부자가 가난한 라자로에게 음식과 따뜻한 옷을 내어주었다면, 또 자신의 재물로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애덕을 실천했다면 그 결과는 분명 달라졌을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자신이 고초를 겪는 일도, 또 후회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 부자의 이름을 기억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비록 재산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각자의 처지와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사순 시기를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부분에서부터 주님의 자비를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한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이진훈 코페르티노의 요셉 신부님 미사 강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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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선택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선택이자 은총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천국도 지옥도, 회개도 사랑도 선택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장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연옥이, 지옥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선택에 따라 전개되는 현실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행복을 선택해 살아야 죽어서도 천국의 행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 삽니다.

타고난, 바꿀 수 없는 부정적 요소도 많지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합니다. 주님을, 희망을, 사랑을,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하루에 감사하며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다산의 어록 중 다음 내용도 우리에게 선택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더 가고 싶을 때 절제하고, 두려울 때 한걸음 나아간다.

탁월함이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고요할 때 텅 비면 밝고, 밝으면 통한다.

움직일 때 곧으면 공정해지고, 공정하면 넓다. 이러한 상태는 탁월함에 가깝다”

 

   얼마 전에는 군에서 전역 후 귀농하여 새로운 삶을 선택해 힘차게, 희망차게,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저를 삶의 멘토라 부르며 따르는 60대 중반의 ‘이용민 요아킴’ 형제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2005년 봄에 만났으니 무려 20년째 교류를 계속 중인 분입니다. 이분이 선물한 “신중년의 비상(飛上)”이라는 책 제목도 멋졌고, 날마다 비상의 삶을 선택하여 사는 모습도, 또 서문의 감사로 끝나는 끝말도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응원해 주고 지지해 준 아내 임영자 여사,

나의 인생 노트에 적어 놓은 글을 잘 정리해 준

아들 형록이와 딸 민지에게 감사하고 이 책을 바친다.”

 

   작년 8월 15일부터 시작한 선택-훈련-습관화의 도식에 따라 기상하자마자 시작한 면세육창 기도-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주님도 천국도 행복도 선택임을 확인하는 다음 제 ‘예닮기도’ 일부입니다.

  의식적, 의지적, 의도적 선택이,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은총의 사순시기는 말 그대로 깨어 회개하며 사는 시기입니다. 회개를 통해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의 참나를 사는 시기입니다. 사순시기뿐 아니라 매일미사 중 말씀을 잘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서 후반부 말씀 역시 우리를 뒤돌아 보게 하는, 또 회개를 촉구하는 충격적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이 말씀을 보면 구제불능의 사람이요,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에 가깝습니다. 사실 오늘날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 현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이렇게 인간이 사악하고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원판불변의 법칙’이니 ‘사람은 고쳐 쓸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회자되나 봅니다. 이런 부정적 숙명론에 도저히 주저앉을 수는 없기에 이래서 회개의 선택이, 회개의 일상화가 참 절박합니다.

인간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창세기 노아 홍수 후에도 나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 8,21)

 

   바로 이런 부정적 인간상의 전형이 오늘 복음의 이름 없는 무명의 부자입니다. 이름이 없는 부자, 존재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무와 같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도 복음의 부자처럼 부에 매몰되어 자기를 잃고 무지의 헛된 유령같은 삶을 살다가 제대로 살아보지고 못하고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복음 서두의 묘사가 참 충격적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부자는 오직 자기만 알고 라자로라는 존재는 관심도 없고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아닌 물건이나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라자로야 말로 부자에겐 구원의 문이요, 회개의 표지로 부자를 심판하지만 무지한 부자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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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감 없는 어떤 부자와는 달리 가난한 이는 이름이 있습니다. 진짜 하느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리듯 라자로는 이름도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흡사 제1독서의 예레미야서가 부자와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땅에서 살리라.”

 

  생각 없이, 영혼 없이 몸의 욕망 따라 살아온, 주님 탓이 아닌 스스로 자초한 업보의 화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부자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우리의 회개와 더불어 '내 중심'인지 “주님 중심”인지 우리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후자의 주님 중심의 모습은 그대로 라자로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여러분의 내면의 실상은 어느 쪽입니까?

외관상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이런 내면을 지닌 자가, 하느님께 날로 깊은 믿음의 뿌리를 내려가는 자가 정말 그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요 자유인입니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향기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우리의 회개를, 선택을 촉구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어떤 부자와 라자로는 사후 그 처지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이가 가로놓여 있는 데, 이것은 살아 있을 때부터 형성되어 고정된 단절의 구렁이입니다. 내 중심의 삶들을 살기에 각자는 고립된 섬처럼 되고, 참으로 모두가 하느님 중심의 삶들을 살 때 하나로 연결됨으로 서로 간 단절의 구렁도 사랑으로 메꿔질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래서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부단한 회개의 선택, 회개의 일상화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일상화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겸손과 온유, 자비와 지혜, 찬미와 감사, 희망과 기쁨, 자유와 평화의 참 행복한 하늘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지상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베네딕도 요셉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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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화가 앨리스 카하나는 15살에 독일군에 의해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갑니다. 이때 앨리스 카하나는 뼈아픈 기억을 하나 만들게 되었습니다.

   수용소로 끌려갈 때, 앨리스 카하나는 여덟 살인 남동생과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신발 한 짝만 신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신발이 벗겨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주의한 동생이라는 생각에 “넌 왜 그렇게 바보 같니! 너 자신의 물건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수용소로 끌려가며 닥친 혼란 속에서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동생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생은 다른 트럭으로 끌려갔고, 그 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라고 한다면 과연 미움과 저주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의 끝에 서면 후회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요?

나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주었던 아픔과 상처가 오히려 내게 되돌아와 나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후회를 더는 만들지 않기 위해 깨어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랑에 집중하면서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후회를 줄여나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마지막 심판 때에는 우리가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사랑의 실천에 얼마나 온 힘을 기울였나에 따라 결정이 됩니다. 바로 그 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했고, 라자로는 너무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둘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머물고,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 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악행을 저질렀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 가난한 라자로를 보살피지 않았음은 분명합니다. 개가 다가와 라자로의 종기를 핥을 정도로 사랑의 실천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그 무관심이 그를 저승의 고통으로 이끈 것입니다. 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부자의 이름은 전혀 알 수 없고, 가난한 이인 라자로의 이름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 안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린 사람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을 산 사람을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사랑 실천이 중요합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을 더는 만들지 않았으면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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